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12월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복음서는 그렇게 찾아온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그린다. 그리고 그 사건을 약 2천 년 전 어느 중동 마을의 일이 아니라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 이들에게만 구원은 현실이 된다. 그 과정에서 예수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일도 벌어지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분을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를 하게 되는 일도 일어난다. 그렇기에 신앙이나 구원은 신비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신학자 보프는 생태학을 관계에 대한 학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쩐지 ‘생태’라는 말에는 ‘공동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한다. 우리가 따로 떨어져 혼자 존재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끼리도 ‘더불어’, ‘함께’가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생태학의 세계에선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지만 결국 물과 공기, 바람과 햇볕, 흙과 풀, 나무와 새, 벌레와 미생물, 동물들과 떨어져 살아갈 수 없다. 본적도 없고, 목소리도 들은 적 없는 이들과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로서 살아가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공동체로 살고 있다는 말은 인류가 초래한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가 우리(생태공동체)의 긴밀한 관계망을 깨뜨릴 때 그것이 공동체에 속한 모두의 위기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적자생존”,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통해 ‘적자생존’은 틀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가 영향을 깊이 주고받으며 진화해왔고, 그 과정은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다. 먹고 먹히는 일이 있으나 가학과 피학의 관계는 아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고백할 때 그 관계가 ‘적자생존’이 아니듯, 먹고 먹히는 관계도 결국 힘의 구조는 아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우리는 서로의 먹이가 되고,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 새로운 존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관계의 신비를 잃어버린 순간, 즉 힘의 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때 위기가 시작되었다. 인류는 강자로 군림하면서 공동체의 다른 이들을 착취했다. 그리고 순환을 통해 유지되던 세계를 망가뜨렸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2021.11.26
기후위기 시대, 우리가 삭개오입니다 임지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활동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 성서 곳곳에서는 이 땅에 정의를 일구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일깨운다. 이 시대의 정의는 결코 기후위기를 간과한 채로 선포될 수 없다. 기후위기는 이제 단지 미래에 닥칠 일이 아니며,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으로 찾아오고 있는, 지금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심상치 않다. 세계 곳곳에서 폭우와 폭염, 초대형 산불 등의 기후재난들이 잇달아 일어나며, 이로 인해 피해를 입고 고통받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전 유엔 인권 최고 대표 메리 로빈슨은 ‘기후변화는 21세기 인권에 가장 심각한 도전’이라 말했다. 성서는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마태복음5:45) 분이라 증언한다. 성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기후란, 악인이냐 선인이냐, 의로운 자냐 불의한 자냐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위해 주신 은총이라 할 수 있다. 지구에 사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로 기후인 것이다. 이 기후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구 위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을 기대어 살아가도록 부여하신 토대를 빼앗는 것이며 지금까지는 없었던 무자비하고도, 잔혹한 폭력인 것이다. 한국교회여, 기후정의를 외쳐라 기후변화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이들이 수백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에게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닌 오늘의 고통이다. 국제난민감시센터(IDMC)에서는 전 세계 난민이 780만 명에 육박하며, 이 중 기후 난민이 분쟁 난민보다 약 3배 더 많을 것으로 추산한다. 또한 세계경제포럼(WEF)에서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 관련 사건으로 2050년 안에 최소 12억 명이 난민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문제는 이처럼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받는 이들이 기후변화의 발생에는 책임이 없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기후정의(climate justice)’를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9월 25일 기후위기 비상행동에서는 ‘지금당장 기후정의’를 메인 구호로 삼고 집중기후행동에 나섰다. 전국적으로 1만여 명이 기후행동에 동참했으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도 기후위기 기독교 비상행동을 통해 기후정의를 외치는 일에 함께 행동했다. 기후정의란 국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기후위기를 야기했고, 기후위기로 인한 고통과 피해 또한 불평등하게 돌아가며,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불평등이 가중되지 않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기후위기의...
2021.11.12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 <디그로쓰 Degrowth> (요르고스 칼리스 외 지음, 우석영, 장석준 옮김, 산현재, 2021년)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어느 나라가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강대국이냐 약소국이냐를 이야기할 때, 조금 더 노골적으로 잘 사는 나라냐 못 사는 나라냐를 따질 때 흔히 일정 기간 동안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수치인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을 따져보게 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내총생산이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차이로. 하지만 최근 2위 중국이 경제성장을 통해 미국의 국내총생산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머지않아 경제성장이 더 가파른 중국이 미국의 국내총생산을 따라잡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총생산을 국민의 수로 나눈 1인당 국내총생산은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2017년 UN 통계에 의하면 당최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리히텐슈타인 공국이 모나코와 룩셈부르크를 제치고 1인당 국내총생산이 가장 높은 나라다. 미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으로는 간신히 9위, 중국은 중간 정도 되는 세계 75위이다. 대국들로서는 좀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기후위기고 나발이고 간에 오로지 경제성장뿐이다. 부탄은 국내총생산으로는 별 볼 일이 없는 126위의 나라이다. 하지만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GNH)에서는 항상 1위를 차지한다. 국민총행복지수는 평균행복(Average Happiness), 행복수명(Happy Life Years), 행복불평등(Inequality of Happiness), 불평등조정행복(Inequality-Adjusted Happiness)을 통해 각 국가의 국민들이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측정한 수치다. 부탄이 국민총행복지수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탄 사람들은 경제성장 대신 불교의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가 지구를 괴롭게 만든다는 이야기에는 선뜻 동의한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성장은 이로운 것이고 또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생물다양성감소, 기후위기. 사실 경제성장이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인데도 말이다. 또한 경제성장은 사회의 불안, 소득불평등, 공동체의 파괴, 배타주의와 능력주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단 하나의 원인이다. 때문의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의 망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탈성장, 혹은 적정성장(Degrowth) 운동이 바로 그 방법이다. <디그로쓰>는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사회경제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전환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경제성장 없는 그린뉴딜, 보편 기본 소득, 보편 돌봄 소득, 보편 기본 서비스, 커먼스(Commons, 공공자산) 회복, 노동시간 단축,...
2021.10.29
생태적 무기력 넘어서기 '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2020년) 독서 후기 이진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후변화가 만든 생태적 위기로 세상은 대멸종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지난 1992년 리우 기후변화협약이 채택된 뒤로 줄곧 이야기된 사실이다. 그런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으니 내가 잘못된 건가? 예민해지고, 화가 가득차고, 의심하게 되고, 결국 무기력해진다. 마침내 일상생활의 소통과 관계에 장애가 발생한다. 증상은 분명하지만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는 없다. ‘기후 우울’(climate grief), 혹은 ‘생태 불안’(eco-anxiety)이라고들 한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이나 생태적 위기에 대해 이야기해도 변하지 않는 사회에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증상이다. 세상이 바른 방향으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완전한 치료는 어려울 것이다. 대신 증상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있다. 아직 감춰진 보석같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창조세계의 온전성’(integrity of creation)을 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 대자연이 아니라도 좋다. 보는 눈과 듣는 귀만 있다면 책상 위의 작은 화분에서도 하나님의 기운을 입은 생명의 섭리는 여전하다. 그리고 그 오랜 야생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책 한 권. 당신은 고귀한 존재이며 당신의 시간은 다시 있지 않을 신비의 세계라고 속삭이는 책 한 권 역시 무기력에 빠진 나의 손을 잡아준다. 메리 올리버는 서른 권이 넘는 시집과 산문집을 낸 미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는 1935년에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메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에서 지내다 2019년에 플로리다에서 잡초가 우거진 모래언덕에 묻혔다. 그녀는 진정한 바닷가 습지 안내자였다. 그녀의 글에는 습지에서 살아가는 새와 물고기와 동물들과 나무와 풀에 대한 눅눅하고 포근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냥 저절로 아름다운 것들에 관한 그녀의 낮고 작은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상처의 위로를, 절망의 희망을 찾았다. 밤새 내 마음 불확실의 거친 땅 아무리 돌아다녀도, 밤이 아침을 만나 무릎 꿇으면, 빛은 깊어지고 바람은 누그러져 기다림의 자세가 되고, 나 또한 홍관조의 노래 기다리지(기다림 끝에 실망한 적이 있나?). (천개의 아침, 71쪽) 시인이 된다는 것은 깊은 영혼을 간직하기 위해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사가 매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맑은 언어를 빚어내는 일인 듯하다. 그래서 진즉에 시인이 되는 것은 포기했다. 그래서 늘 우왕좌왕 상처투성이다. 그래도 메리 올리버와 같은 이가 찾아낸 지구의 거룩한 이야기에 마음 한 자락 굳어버린...
2021.10.08
한국교회의 의미 있는 첫걸음, '2050년 탄소 중립 선언' 이양환 간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인간의 책임과 역할 기후위기, 전 지구적 위기이다. ‘전 지구’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같이, 이 위기를 맞은 생물종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다. 이 푸른 별에 발붙여 살아가는 모든 생물종들이 이 위기를 동일하게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후위기”라 불리는 이 급격한 환경 변화의 책임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급격한 기후 변화의 주도적인 책임이 단연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은 이 별의 역사에서 비교적 긴 시간을 존속해온 것은 아니었으나, 합리성이라는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방법들을 익혀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성의 바탕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여러 생물종의 멸종을 이끌어내고, 여러 작물의 유전자를 조작해왔고, 수많은 탄소를 배출해왔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의 과오들을 우리의 잘못으로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또한 인간이 지닌 고도의 합리성 덕분이다. 이를 통해 변화하는 기후의 비정상성을 판단하고 위기상황을 인식하고, 어떻게 다시 이 푸른 별을 정상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결국, 이 별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에 대한 책임과 역할 모두가 인간에게 가장 크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지금까지 스스로의 합리성을 올곧게 사용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다. 언제나 이기와 욕망의 문제가 이를 왜곡시켜왔기 때문이다. 사사기에서는 한 시대의 암흑기를 표현하며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삿17:6)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현실에 비추어 말 그대로 적확한 표현이다. 각기 인간은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지만, 참 옳은 방향은 각자의 이익만을 따져서는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후위기 시대에 시험대에 오른 인간이 심판받을 것은 단지 고도의 합리성만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합리적인 해결책을 인류 공동체가 함께 수행할 것인가. 진정으로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사과하며 재발을 방지할 것 인가하는 심정적이고 도덕적인 차원도 함께 심판받을 것이다. 전세계적인 기후위기 대응 노력 기후변화는 이미 30년 전부터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리우선언’과 ‘의제 21', '생물다양성 보전 협약’, ‘기후변화협약’ 등이 채택되었던 <환경 및 개발에 관한 유엔회의(UNCED)>에서부터 국제적인 사회 논제로 부상해왔다. 더불어 1997년에는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규정하는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가 일본 교토에서 채택되었고, 이후 2015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선진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가 감축 의무에 참여하는...
2021.10.01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고 말 것이다 "너희는 망한다! 주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는 자들아, 왜 주님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새번역, 아모스 5장 18절) 예언자들은 멀쩡한 나라, 아니 부유하고 강성한 조국을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했다. 심지어 망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는 침략군에게 투항해야 한다"고 선포하는 이도 있었고, 곧 도래할 끔찍한 결말을 대중에게 전해야 하는 상황이 고통스러워 자기 운명을 저주한 사람도 있었다. 예언자들은 포로가 돼서도 마른 뼈가 살아나는 기적을 전해야 했고, 불타고 잘려 버린 그루터기에 남은 희망을 이야기해야 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읽을 줄 알았고, 그 속에 놓인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런 운명에 처한 이유가 이스라엘이 스스로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에 애타게 아파했다. 최근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6차 보고서 중 제1실무그룹 보고서가 발표됐다. IPCC는 이 보고서를 제54차 총회에서 승인했다. 2018년에 나온 '1.5℃ 특별 보고서'의 내용도 대중들에겐 아직 낯설고 어려운데, 이번 보고서는 사실상 '1.5℃ 특별 보고서'의 결론보다 더 우울한 전망을 담고 있다. 앞선 보고서에서 경고했던 시기보다 약 10년가량 위기의 시점을 앞당겨 전망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극지방 빙하가 녹고 해수면 상승이 일어나며, 해마다 발생하는 극단적 기상이변 현상이 더 자주 발생하고, 지금 멈추지 않는 한 이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전망했다. 과학자들은 데이터를 통해 결과를 추론하지만, 실제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로 추론·전망보다 더 심각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경고가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망하고 말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기후 위기,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녹색연합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8월 12~19일 전국 만 14세 이상 69세 이하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기후 위기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했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 ±2.53%p). 다가올 대선의 중요 의제로 기후 위기를 다뤄야 한다는 응답이 91.1%에 달할 만큼 기후 위기는 이미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는 중대한 문제가 됐다. 응답자 중 97.7%가 기후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으며, 80.1%는 이 문제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 인식하고 있다고 답했다. 기독교인들의 위기의식도 특별히 다르지 않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2019년...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