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황사와 부활구함미정 / 기독교윤리학 박사, 목원대·협성대 강사시인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제목의 연작시 중에서 아홉째 편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만약 10억이 넘는 중국 인민들이 한꺼번에/ 천안문 광장을 자가용을 타고 질주한다면, 동시에 먹고 싼다면/ 무쓰를 처바른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 자금성 노자의 후예들이 素素하게/ 虛의 자전거 바퀴나 굴리는 덕택에/ 압구정동 가득 자동차 바퀴가 넘쳐난다?"'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천박한 소비문화를 질 높은 삶의 모델인 양 여기며 그 쪽으로 가깝게 공간 이동을 하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사실상 중국 사람들이 고맙고도 미안한 존재다. 그들 다수가 '노자의 후예' 답게 자전거를 애용하는 덕분으로 그나마 지구의 파산선고가 유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12억이 넘는 중국인 모두가 우리와 같은 소비수준으로 산다면 이 지구는 당장 부도가 나고 말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중국으로부터 황사가 찾아 왔다. 노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흙먼지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 닥쳤다. 이번 황사는 미세먼지 농도가 평소의 20배로 사상 최고 수치라고 한다. 미세먼지 경보제를 실시하는 미국의 경우, 미세먼지의 하루 평균농도가 ㎥당 350㎍을 넘으면 '위급' 경보를 내려 모든 사람의 바깥 활동을 금지하고, 특히 호흡기나 심장질환자, 노인과 아이들은 반드시 실내에 머물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사상 최악의 황사바람이 전국을 강타한 지난달 21일의 경우, 최고치를 보인 서울 한남동에서는 ㎥당 2046㎍의 농도가 계측되었다니 그 심각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시거리가 크게 떨어져 자동차 추돌사고가 줄을 이었다. 서울·경기·대전·충북 등지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임시휴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떡볶이나 어묵 등을 파는 길거리 노점상들도 울상을 지으며 임시휴업을 해야했다. 그러고 보니 해마다 이맘때면 눈이 쓰리고 목이 따끔거려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나도 황사의 피해자인 셈이다. 모 방송국 기상캐스터가 황사보도를 하던 중 "이웃도 잘 만나고 볼 일"이라며 비아냥거리던 것이 생각난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경솔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웃을 잘못 만난 탓에 내가 불편하다는 논리는 철저한 이기심의 표현으로서, 결국 나 역시 이웃에게 별로 좋은 이웃 노릇을 못하고 있음을 반증할 뿐이다. 이번 황사가 극심한 까닭은 지난 겨울 동안 중국 대륙의 신장자치구·네이멍구(내몽고)·몽골 지역 강설량이 예년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온건조한 찬바람(편서풍)이 몰아닥쳐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이고 근시안적인 이유일...
2011.07.18
무엇을 위한 환경운동인가김영락 / 본회 사무총장, 목사10년 전에 환경운동을 막 시작했을 때, 필자는 '환경운동은 성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때의 대답은 '환경오염으로 종말이 오더라도 환경운동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하고 나서 받는 질문 중에는 '환경보전을 위한 노력보다 환경오염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른데, 환경운동은 환경파괴에 의한 파국을 늦추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라는 내용도 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환경문제에 대해서 고심을 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실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온 세계가 경제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는 상황에서는 에너지의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고, 산림자원을 비롯한 모든 자연자원이 소모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올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사회개혁의 기대를 받고 출범한 참여정부도 환경문제를 다루면서 경제논리나 정치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인들의 삼보일배로 국민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새만금 갯벌 매립사업이나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한 핵폐기장 건설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적으로는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인명과 환경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비극은 눈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사회적 사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환경의 중요한요소가 되는 인간 하나 하나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지구적 비극의 바탕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어주시며, 그곳에서 유유히 거닐며 평화와 사랑을 만끽하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대도시를 건설하고 그 곳에서 경쟁과 싸움을 일삼으며 자신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 속에서 '녹색 십계명'을 외치며,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 정치인들을 설득시키고,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등등의 환경운동이 과연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레위기 26장을 읽으면서 필자는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남은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부르심을 믿게 되었다. 26장은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키는 자를 배부르게 하시고, 계명을 어긴 자는 굶주리게 하고, 그 땅은 폐허가 될 것이며, 거기에 사는 자를 땅에서 쫓아내신다는 말씀을 하고, 땅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에 그 땅은 비로소 안식을 누리고 회복된다고 말씀한다. 그렇다! 자연은 인간의 죄에...
2011.07.18
현대 생태신학자들(1) -그들의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1974년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모임을 통해서 환경신학, 생태학적 신학이 태동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60년대초 인류의 진보신앙에 의구심을 품었던 로마클럽의 경고를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세계교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폰 라드의 제자였던 붸스터만의 창세기 주석서는 성서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읽어갈 수 있는 눈을 갖게 하였다. 종래의 구속사 중심의 신학이 역사만을 하나님의 계시지평으로 이해하고 창조를 역사해석의 도구로 사용했다면, 생태학적 성서읽기는 자연을 하나님 이해의 원지평으로 삼았으며 그로써 자연 없는 창조의 신학적 한계를 지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독일을 비롯한 영미 신학계에서는 생태학적 신학 및 윤리 를 주제로한 엄청난 연구물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신학 및 성서읽기가 동일한 방향성만을 띤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천년신학 전통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오늘의 당면 생태계 위기 상황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또는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 종교 속에 내포된 인간중심주의로 보느냐 아니면 타락된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위기의 극복을 위해 인간중심적 세계관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과 인간의 청지기성 회복을 대안으로 하는 주장, 그리고 오늘날의 기술과학을 남성 원리의 산물로 보고 오로지 자연과 여성의 동(同)근원성을 말하는 생태학적 여성학의 시각에서만 자연의 치유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뿐 아니라 성서전통을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극단의 여성신학자들은 기독교 전통밖에서 고대 및 동양적 전통에서 새로운 영성이 발원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창조의 보전을 무로부터 창조교리와 삼위일체 구조 속에서 생각하려는 몰트만과, 이 두 교리를 포기해야만 전 생명체를 존속케 하는 자연신학이 가능하다고 보는 미국내 과정신학자들이 있으며, 인간의 청지기성만 회복하면 생태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카톨릭 신학자 지틀러가 있는가 하면, 전 우주만물은 하나님 몸으로써 세계관적으로 새롭게 이해해야만 된다고 보는 여성신학자 멕훼이그가 있다. 또한 종래의 종혁신학이 계시를 성서(문자)에만 한정시킴으로 해서 전 자연이 하나님의 영역임을 망각했다고 비판하며 자연이야말로 원은총임을 말하는 매튜 폭스, 그리고 자연을 하느님의 녹색은총으로 보며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인 적색은총은 녹색의 의미가 사라질 때 공허하다고 보는 맥 다니엘 등의 신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원죄를 교만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내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즉...
2011.07.18
201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