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작성일
2021-10-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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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추수감사주일을 11월 말로 보통 정하여 지키고 있다. 오래전부터 지켜온 것이라 그냥 지키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한반도에서는 추석이 전래의 추수감사의 의미를 담은 명절인데 굳이 11월 셋째 주 주일을 정하여 추수감사의 주일로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여 날짜를 바꾸는 교회들도 종종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른 절기들만큼 날짜가 중요한 날은 아니다. 한해의 수확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로서 날짜보다는 지키려는 ‘의미’ 자체가 중요한 날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이 근간이고, 값없이 주어지는 ‘은총’에 대한 ‘감사’는 받는 이의 당연한 반응이다. 이를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생각해보면 역시 삶에 은총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추수감사주일에는 우리를 배불리는 오곡백과 역시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다.
안성진씨가 지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찬양이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라고 부르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과 활활 타는 화덕 앞에서 했다는 고백의 말이나 하박국 예언자의 노래가 떠오르는 가사다. 찬양은 ‘감사’가 상황과 환경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는 믿음의 태도 말이다. 당장 눈앞의 현실에 사로잡혀 좌절과 절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넋두리처럼 하는 것보단 더 큰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정부의 2050 탄소중립위원회 국민참여분과와 함께하는 간담회에 종교환경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한 적이 있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설립된 이 위원회는 2050년까지 배출되는 온실가스와 흡수되는 온실가스를 같은 양으로 만들어 더 이상 온실가스의 농도를 늘리지 않는 사회로의 전환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이를 위해서 사회시스템의 변화와 대전환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전제 아래 탄소배출량 감소를 위한 여러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하지만 산업계의 반발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내놓은 시나리오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 수많은 비판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기술분과의 위원장과 산업분과의 위원장이 차례로 나와 시나리오 안에 대해 설명하며 이들은 지금 당장의 상황으로는 이 시나리오 안도 사실상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이쯤에서 만족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그러나 당장 처한 현실은 엄혹하고, 겪을 미래는 참혹한데 돈벌이가 중요할까? 당장 먹고 살 오곡백과를 심고 기를 땅이 해수에 잠길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도대체 산업이 무엇이고, 돈이 무엇일까?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총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삶에 감사가 있을리 없다. 결국 기후위기는 그러한 삶의 당연한 귀결이다. 기후위기는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고, 올리브 열매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는 세상, 양 떼와 송아지도 없는 삶을 예견케 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회심하고 은총으로 족한 삶을 회복했어야 했다.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풍요에 취해 사실상 돌이켜야 하는 시점에 머뭇거리고 브레이크를 잡지 못했고, 돌이키기엔 너무 많이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만큼 위기는 코앞에 다가와 버렸다.
이 위기를 넘어서고 고치는 것 역시 어쩌면 ‘은총’을 이해하고 ‘감사’를 일상화하는 것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기후위기를 염려하는 이들은 ‘탈성장’을 이야기한다. 위기 앞에서 ‘성장’ 대신 멈추어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해야 하는 방향의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출이 늘고, 풍요를 누려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그런 것이 없고, 잠시 배가 고플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쁘고 행복하더라는 하박국 예언자의 고백이 어쩌면 절실하게 필요한 때 일지도 모르겠다.
(임준형,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간사)
* 월간 새가정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