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앙 이야기

6월 정의 평화 생명을 위한 현장예배 - 설교문

작성일
2023-06-30 11:28
조회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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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한 기도회 설교문 - 류순권 집행위원

[너 사람아 일어서라]

1 "너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 그는 나에게 기운을 불어넣으시어 일으켜 세우시고 말씀을 들려주셨다.

3 "너 사람아! 나에게 반항하는 역적의 무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나를 거역하기만 하였다.

4 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내 말을 전하여라.

5 본래 반항하는 일 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_  겔2:1-5 (공동번역 개정판)

지난달 환경운동연합이 진행한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관련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5.4%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한다고 답했습니다. 또 응답자의 72%는 방류 이후 수산물 소비를 줄이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국무총리와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이 나서 오염수가 기준치에 맞으면 마실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마치 후쿠시마 핵 오염수가 기준치에 맞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을 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벌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술 더 떠서 한 총리는 도를 지나친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인해서 우리 수산업 종사자들이 심각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사법당국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마치 어민들의 피해를 핵 오염수의 해양투기로 인한 것이기보다는 마치 유언비어 살포자들이 만든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어찌 고집이 센 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방사선에 피폭이 되면 우리 인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방사선 방호체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그 결과가 개인과 사회 모두에 위험(손해)보다 이익이 매우 크다면 그 행위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사선 피폭을 최소화해야 함은 방사선 방호체계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방사선 방호의 대상은 개인과 환경이며, 오랜 기간 그 골격을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 International Commission on Radiological Protection)가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권고합니다.

방사선피폭이 개인의 건강과 환경에 유해 한 영향을 준다고 해서 모든 방사선피폭을 방호 할 수 없습니다. 방호는 관리 또는 제어를 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 방사선피폭을 제어할 수 없을 경우 방호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 자연방사선피폭)

방사선피폭의 구성 요소는 피폭 원인인 방사선원, 피폭하는 사람, 그 사이에 있는 피폭경로로 정의됩니다. 이들 3가지 중 하나 이상에 적절한 노력을 하면 피폭을 줄일 수 있으며, 가능하다면 방사선원을 제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가 주장하는 방사선 방호의 3원칙은 정당화, 최적화, 선량한도입니다. 그런데 후쿠시마 핵 오염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오염수 점검에서 가장 중요한 ‘오염수 방출의 정당성’ 평가가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당화 원칙이라는 것은 핵으로 인한 일정한 이득이 있어야만 핵으로 인한 손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핵 오염수의 해양투기는 일본 정부에게는 이득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을 비롯한 태평양 도서 국가는 손해만 있습니다. 그런데도 IAEA는 정당화 원칙에 대해선 아예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인 ‘최적화’ 원칙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주장하는 대형 탱크 보관 방법이나 모르타르 고체화 방법, 그린피스가 제기한 콘크리트 이용 방법 등을 모두 검토하지 않은 사실에서 입증이 된다고 합니다.

핵 오염수 해양투기가 핵폐기물 처리 중 가장 최적화된 방법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하지 않은 것은 IAEA가 핵산업을 보호하고 일본 정부를 합리화시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에 투기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그 낯가죽 두꺼운 행위를 막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는 결코 바다로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핵 오염수 해양투기를 반대합니다.

우리는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버리는 행위에 대해 ‘방류’와 ‘해양투기’라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합니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의 진실이라는 소책자를 보면 ‘방류’는 모아둔 물을 흘러 보낸다는 말입니다. 대안을 모두 고려하여 특별한 불확실성이 없는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에 반해 ‘투기’는 대안을 모두 고려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확실성을 안고 버리는 비정상적인 처리를 말합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물에 희석해서 바다로 흘러 보내는 것이며, 선박에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배관 라인을 따라 바다에 버리기 때문에 ‘투기’가 아니라 적법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사고로 발생한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행위는 ‘해양투기’라고 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인 생명의 바다에 핵 오염수를 투기하려는 이들의 행위로 볼 때 4절에서 말한 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이고, 그 고집이 센 자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생명 존중의 법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행위에는 언제나 물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명 존중의 마음보다는 무엇이 더 경제적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물질 만능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이고 고집이 센 자들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반항하는 무리라 칭하시며 이 반항밖에 모르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고집이 센 자들,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을 그들에게 전하라고 에스겔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듣지도 않을 말을 왜 전해야 하는가?

저는 하나님의 초점이 말을 들을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말을 전하는 에스겔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에스겔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너 사람아 일어서라’ 이 시대에 외쳐야 할 소리를 외치라고 부르신 것 같습니다.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이렇게 외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원천인 바다에 핵 오염수를 투기하지 말라’고 외치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는 선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돌보는 주체로서 생명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위들에 대해 멈추라고 외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멈추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외치면 그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명령을 감당하고도 실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갖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역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하는 활동가들을 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난받는 이들과 활동하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에 갇혀 실망하고 상처받고 넘어지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충분히 공감되고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미래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는 세계를 보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도 많은 생명을 통해 살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의무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어떤 행동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변화는 의무감이 아닌 감동을 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의무감은 있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피조 세계에 감동을 주는 삶은 없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오늘 우리가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의 사명을 따라 외치는 자리에 있을 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기후변화라는 절제 절명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 인류가 지혜를 모아야 할 이때 여전히 배타적인 국익 논리에 피조세계는 계속적으로 희생 당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너 사람아 일어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 외칩시다.

여기에서 우리가 외치는 우리의 외침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외침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함께 우리 미래 세대들이 함께 살아질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