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레위기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레위기 6-7장에는 다섯 가지의 제사가 나온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이다. 이에 있어 번제와 소제는 각각 동물과 곡식을 하나님 앞에서 모두 태워버리는 제사이다. 번제와 소제에선 인간을 위해 남기는 곡식과 고기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하는 제사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자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귀속된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구약의 제사는 강조한다. 곡식과 동물들은 먼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주인도 아니며, 중심도 아니다. 제사를 통해 그러한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구약의 제사는 나타낸다. 인간은 제사를 통해, 동물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과 같이, 그들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이제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나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바침을 통해 우리는 다시 거듭 나게 된다. 동물들이 제사를 통해 바쳐질 때, 그 동물들의 생명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안에서 더욱 온전한 생명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면서, 마치 동물의 피 자체가 우리의 죄를 속하는 것과 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제사를 통해 동물의 피가 기계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제사의 과정에 의해, 이 세상의 자연물과 우리의 생명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제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결단을 하게 된다. 나의 생명, 나의 가진 것, 나의 존재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으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 주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사를 통해 우리의 과거의 죄를 용서받음과 동시,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향한 미래적 결단을 하게 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나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임을 일깨우는 예식이 구약의 제사이다. 레위기 25장은 희년의 법을 우리에게 말한다. 일곱 번째 되는 해는 안식년으로...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주기도에 나타난 '일용할(에피우시오스)'의 번역은 단순하지가 않다. 보프는 그의 책 '주의 기도'에서 이 단어에 '필수적인', '매일의', '내일을 위한'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를 살펴볼 때 우리의 식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필수적인 양식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참된 양식이란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양식을 뜻한다. 이 세상에는 필요한 양식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비본질적인 양식도 있다. 꼭 먹어야 되는 양식이 있고 먹지 않아야 되는, 먹으면 해가 되는 양식도 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요 6:27)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이 세상에는 참된 양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양식이란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다. 영생이란 우리가 체험해보지 못한 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시적인 말로 그 말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생명을 주는 양식, 삶의 에너지를 주는 양식, 삶의 활력을 주는 양식, 삶에 창조성을 공급해주는 양식, 건강을 주는 양식이 참된 필수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비싼 값을 주고 샀지만 양식이 안 되는 것이 많다. 비싸게 사먹어도 생명력을 주지 않는 양식이 있다.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매일의, 매번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달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만이 참된 양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에서 나오는 양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진정한 양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다(시 104:14-15, 27-28). 요 6:31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하늘양식이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의 실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경험하였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병이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양식의 위력을 보여주셨다. 하늘의 양식만이 진정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양식이다. 보통의 인간은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양식들을 잘라먹고 산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덧입고 사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의 기운에 의해 지탱되어진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빵이지만, 하나님께 바치면 주님의 오병이어가 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늘의 양식이...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에베소서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에베소서 1:23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로 묘사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온 피조물을 그의 충만함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살펴볼 때 만물의 피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물들은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피나는 사투를 하여야 한다. 식물들도 겨울에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채 극한 상황을 이겨나가야 한다. 인간의 피곤함 또한 부족한 모습의 극치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피조물의 부족함과 공허함을 충만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공해로 상처나고 얼룩진 산하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손길을 통해 어루만지신다. 그러한 만물의 구원은 만물 자체 내에 있는 진화의 능력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와 교회의 머리(head)라고 하면서도, 교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body)이라고 언급한다. 이방의 헬라사상에서는 종종 우주가 신의 몸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성경은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임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만물의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의해 중재된 의미에서의 충만이지, 하나님의 유출적인 충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오늘에 있어 그러한 신적인 충만을 직접적으로 매개하시는 분은 성령님으로서, 성령은 우주 만물에 하나님의 충만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이 충만의 형태로 우주 만물에 내재하여 있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배제된다고 할 수는 없다. 에베소서는 만물의 충만의 개념을 피력하기에 앞서, 그 만물을 충만케 하는 주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하늘에 오르신 분, 곧 이 세계를 초월하여 계시는 분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만유를 만유 위에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그런 분이시다(엡 4:6). 이 본문은 하나님이 만물을 초월하여(above), 만물을 관통하여(through), 그리고 만물 안에(in) 계신 분으로 묘사한다. 그 하나님은 이 자연 만물 속에 내재함과 동시에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만물을 관통하여 있다. 성경은 영지주의의 주장과 같이 영과 육이, 정신과 물질이, 머리와 몸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이원론적인 실체로 보지 않으며, 머리와 몸이 상합하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것으로 말한다(엡 4:15-16). 만물에 충만하여 내재하면서도 만물을 초월하여 있는 실체, 성경은 그러한 가능성이 예수...
2012.07.02
생태전망에서 성서읽기(7)/ 출애굽기/ 노영상/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은 10가지 재앙으로 시작된다. 모세에 의해 하나님의 재앙이 이집트의 백성들에게 내려졌다. 첫 번째의 재앙은 나일의 물이 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물의 오염으로 인해, 이집트인들은 나일의 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타민족을 억압하는 이집트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환경적 재난으로 시작된다. 정의를 짓밟는 자들을 향해 땅이 소리지르고 있다. 두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재앙은 먹이사슬의 파괴에서 나타나는 이상현상이다. 갑자기 개구리와 이와 파리 떼가 이집트의 전역을 덮치게 된다. 여덟째의 메뚜기 재앙도 마찬가지이다. 생태계는 종간의 균형을 긴밀히 유지하며 지탱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이 무너져 한 종의 개체수가 급격히 증가할 때, 우리는 재앙을 만나게 된다. 다섯 번째의 재앙은 가축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재앙이다. 이러한 재앙은 우리도 최근 경험한 바 있다. 광우병, 구제역 등의 질병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도살되었었다. 정부는 월드컵의 해를 맞아 이러한 가축 질병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일곱 번째의 재앙은 우박 재앙으로 기상이변에 따른 재앙이다. 아홉 번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힘을 통해 어두움으로 이집트의 전역을 어둡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의 재앙은 이집트 사람들과 가축들의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이다. 환경적 재난은 사람들의 죽음의 행렬로 이어진다. 땅으로부터 나오는 고통이 사람을 집어삼키고, 인간생명의 생존의 가능성을 위협하게 된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자연이 주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쓴물로 인해 백성들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세는 바위를 통해 시원한 물을 백성들에게 공급할 수 있었다. 광야의 굶주림은 백성들의 모세에 대한 원망을 증가시켰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을 꾸짖으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굶주림을 모면하시게 하였다. 백성들은 광야의 경험을 통해, 비옥한 토지에 대한 동경을 더욱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비옥한 땅으로의 이주를 그들은 소원하며, 출애굽한 그들의 최종목적을 다시 확인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가나안 땅은 광야에 상반된 개념으로, 척박한 땅 광야와 비옥한 땅 가나안이 출애굽기에서 대비되고 있다. 출애굽기의 구원은 저 세상적이기보다는 이 세상적이다.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하고, 비옥한 땅을 그들의 소유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추상적 개념이기보다는 구체적인 형태로 그들에게 다가서 있다. 오늘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척박한 땅에서 그들의 생명유지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계시록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계시록은 생태적 전망에 대한 많은 언급을 포함하고 있는 책이다. 21:1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해 말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 영혼의 구원이란 좁은 영역 내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온 세상의 전적인 변혁을 그 속에 담고 있다. 인간과 더불어 그 인간을 휘감고 있는 환경의 변혁을 계시록은 강조한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22:1-2) 썩은 물 속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물고기들로 냄새나는 강들이 천지인 우리의 환경에, 생명강이란 단어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이 없어 마르고, 시들어 가고 있는 식물들과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는 생명나무에 대한 소망을 갈구하고 있다. 혼탁한 물, 그리하여 한 자 깊이도 잘 보이지 않는 강과 바다가 널려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수정같이 맑은 물에 대한 희망을 우리는 포기할 수는 없다. 계시록은 그러한 생명나무를 기르는 생명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발원하고 있음을 말한다. 오늘의 피폐된 환경의 치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법을 고치며,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우리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 바로 설 때, 우리의 생태계도 바로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본문은 그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이 만국을 소성(therapy)할 것이라고 한다. 환경문제는 한 나라 내의 문제가 아니며, 만국의 문제, 국제적인 문제임을 그 본문은 말한다. 생명나무는 만국 곧 세계의 각 나라를 치료하고 그들에게 참 생명을 줄 것이다. 4:7의 말씀엔 하늘나라에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가 있었음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천국에는 사람만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할 때가 많다. 천국에 사람만이 있고,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강이나 건물이 없으면 그 천국은 정말 심심한 것이 될 것이라 본다. 위의 본문에는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사자는 야생동물의 대표이며, 소는 가축의 대표이고, 독수리는 공중에 나는 새를 대표하는 동물들이다....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 읽기 호세아 노영상/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고대 근동지역의 신들은 일종의 풍요를 약속하는 풍요신들(fertile gods)이었다. 바알은 농경신이었으며, 아세라는 생산신이었다. 이 신들은 모두 잘 사는 것과 다산을 보장하는 신들이다. 이러한 신들의 숭배는 풍요제의로 이어지며, 그 풍요제의 중 거룩한 결혼(성혼, 히에로스 가모스)의 의식이 포함되었다. 바알과 아세라는 이 땅을 비옥하게 하여 우리에게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이런 거짓된 우상숭배가 오히려, 이 땅을 황폐하게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참다운 풍요로움과 행복을 주시는 분은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서, 여타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풍요를 향한 약속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세아 11장 2절은 그러한 우상숭배를 일종의 간음행위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간음의 죄악은 우리의 땅을 황무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2:12).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4:3). "타작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요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9:2).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 근원이 마르며 그 샘이 마르고 그 적축한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13:15). 이상의 말씀들과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임을 언급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자연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여타의 모든 관계가 그릇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는 분으로 모든 만물이 다 그의 명령 하에 있다. 이에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언약을 맺으심과 동시, 우주 전체와도 언약적인 관계를 맺고 계신다.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2:18) 호세아는 이 본문에서 하나의 우주적 언약의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들짐승과 새와 곤충과도 언약의 관계를 맺는 분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농사를 잘 되게 하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비옥함과 참다운 풍요로움을 주시는 분은 아세라 목상이 아니며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기를 잘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풍요함을 주는 하늘과 땅을 예비하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로마서 : 피조물의 탄식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도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로마서 8:18-23) 이 본문은 피조물도 인간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뿐 아니라, 온 피조물이 해방과 자유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의 구원은 자연 자체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해방 또는 구원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이란 단어가 복수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일차적으로 의미하기보다는 신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여러 주석들은 말한다. 자연의 회복을 위해 인간 나름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생태적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 편의 책임이 요청된다. 자연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바라보며, 현재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절망을 향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면 새로운 기쁨이 될 일종의 산고와 같다. 현재의 고통은 장차 전 피조물을 포함한 우리에게 미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영은 이미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었지만, 인간의 몸은 그와 다르게 현재에 있어 고통을 당하는 중에 있다. 하나님의 처음 익은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은 새로워졌으나, 우리의 육체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고통 중에 있다. 그렇게 몸의 구원이 영의 구원과 같이 하듯, 자연 만물의 구원에 인간의 구원이 선행하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대해 인간의 영이 차지하는 위치가, 자연에 대한 믿는 자 곧 인간이 담당하는 위치와 같다. 영이 새롭게 되어 몸도 새롭게 되는 것 같이,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자연...
2012.07.02
성서읽기 이사야 : 전 지구적 샬롬 노영상 /장신대 교수 이사야서는 나름의 구원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사야가 말하는 구원의 단면을 35장 1-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여기서 구원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약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이 힘을 얻고 자유롭게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는 것의 세 가지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종교적인 구원, 사회정의 실현으로서의 사회적 구원, 메마른 땅에서 샘이 터지는 것으로서의 자연 회복의 세 가지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칼과 창을 녹여 곡괭이와 호미를 만드는 세상을 이사야는 꿈꾸었었다(사 2:4). WCC는 그간 이러한 구원을 JPIC(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란 표어를 통해 구현하여 왔다. 이 땅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정의를 세우는 것, 전쟁이 없는 평화를 정착하는 것, 자연에 대한 착취를 종식하고 새로운 풍요로운 지구를 건설하는 것이 이사야의 비전이었으며, 그것은 JPIC에 연결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전지구적인 총체적 샬롬을 지향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한, 생태계의 회복의 문제를 신중히 다룬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의 구절이 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이 복음성가는 이사야 11장과 35장의 말씀을 노래화한 것으로, 정말 우리에게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선사한다. 사막화되어 가는 지구에 새로운 샘이 솟구치고, 숲이 우거져 새들이 우짖는 그러한 지구를 우리는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샬롬의 성취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사야 43:11은 여호와 외는 구원자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총체성으로서의 구원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가 열심히 그것을 이루실 것이라 하였다(9:7). 이 자연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풍요로운 자연을 선사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서, 이에 그 자연은 우리에게 또 다른 하나의 녹색 은총이 된다.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43:20). 하나님은 그가 자연의 은택을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것을 은총으로 베푸신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가꾸시는 이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내가 메마른 산에 강을...
2012.07.02
생태전망에서 성서 읽기(2) 창세기: 선악과와 생명나무 노영상 / 장신대 교수, 본회 집행위원 1. 창세기의 결론은 50:20에 나타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이 본문은 다섯 가지 차원의 구원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로, 형제 사이의 화목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요셉의 가족은 치유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사회적 구원의 모습이 나타난다. 만민구원은 나와 이웃 사이의 바른 관계로서의 구원을 말한다. 세 번째로, 심리적 구원의 모습이 언급되어 있다. 요셉은 최종적으로 자기가 받은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고통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다. 네 번째로, 종교적 차원의 구원이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을 선한 분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은 나와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신다. 마지막으로, 생태적 구원의 모습이 드러난다. 기근에 의해 온 인류가 멸절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통해 극복된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구원은 총체적 샬롬의 모습을 띠고 있다. 생태학은 관계의 학문으로서, 피조물들의 관계적 존재의 모습을 부각한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며, 주변환경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생존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2. 창세기는 생태학적 구원의 의미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창세기는 먼저 인간과 자연의 관계 파괴를 인간의 타락에 연결하고 있다. 인류 최초의 타락엔 동물인 뱀이 관여되어 있다. 창세기 3:1은 여호와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말한다. 뱀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인간은 타락하게 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옥토가 거치른 황야로 변한다. 땅의 황폐화는 홍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를 통해, 인류가 멸망 직전의 상황에 직면한다. 물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관계성 속에서 인간을 죽이는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물은 생명의 물임과 동시에 심판의 물이기도 하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모든 동물들이 방주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산폭발과 지진이라는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계속적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사람 요셉에 이르러서 극복된다. 3. 창세기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자연과 연관된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은총으로 주셨다. 2:15-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의 성경읽기(1) 이른 비와 늦은 비 - 요엘서 - 노영상 장신대 교수 1. 요엘은 환경적 재난과 위기가 오고 있음을 예언하였다. 1) 먼저 토양오염 문제가 지적된다: 밭이 황폐해졌으며, 토양이 오염되어 씨가 흙덩이 속에서 썩고 있다(1:10, 1:17). 2) 수자원 고갈과 수질오염 문제가 부각된다: 시내가 말랐고, 들의 풀이 불타고 있으며, 바다에서 악취가 난다(1:20, 2:20). 3) 대기오염을 통해, 해와 달이 캄캄해지고, 별빛이 약해지고 있다고 말한다(2:10). 2. 요엘은 이러한 재난은 환경파괴적인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회개를 강조한다. 그는 깨어 울 것을 말함과 동시에(1:5), 금식하며(2:12),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제안하였다(2:13). 3. 그러나 우리의 환경문제는 개인적인 대처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 전반의 총체적 개혁이 요구된다. 이를 위한 정치 경제구조 전반에 대한 논의와 개혁이 요청되는 것이다. 요엘은 이를 위해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모일 것을 제안한다. 1990년 전지구적 위기를 논의한, JPIC 제1차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소집되었다.우리는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4. 하나님은 자연이 돌이킬 수 없는 대파국에 이르기 전, 인간에게 경고의 사인을 계속 보낸다. 요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으니 대비하라고 말한다(1: 15, 1:16, 2:31).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징조들이 보이고 있다. 물고기의 떼죽음, 강물의 마름, 숲의 황폐화, 잦은 지진,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남용, 과소비적인 삶의 스타일 등. 5. 환경문제의 최종 시나리오는 파멸이 아니다. 요엘은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준다. 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다(2:32). 아무리 인류를 위협하는 많은 징조들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종국적으로 실망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힘으론 이러한 파국을 극복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그러한 난관을 이길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이 자연에 대한 은총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땅이여 두려워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였음이로다. 들짐승아 두려워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리로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며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2:21-23).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
2012.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