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목회 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 다시 읽기, 열세번째 <다니엘> 다니엘 노영상 /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장신대 기독교윤리 다니엘서에 나타난 생태적 의미를 고찰해보려 한다. 먼저 1:12은 다니엘을 위시한 그의 친 구들이 채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혈색이 좋았음을 말하 고 있다. 성경은 동물의 생명에 대한 경외함이 없이, 함부로 동물을 죽여 우리의 식물로 삼 지 말 것을 말한다. 동물의 피째 먹지 말 것과, 그의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삼지 말 것 등의 단 서조항은 이런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말씀들이다. 많은 성인병들이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의 과량 섭취에 기인하는 것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여러 영양학 자들에 의해, 채식만으로도 영양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음이 발견된 바 있다. 고대교회의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는 창세기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 “자연이 우리 인간들 에게 준 값싼 채소와 과일 등의 단순한 초식 음식들을 먹고살면서 그에 만족하는 것이 필요 함”을 강조한다. 고기와 같은 단단한 음식은 영양은 많지만 소화하기 힘든 음식으로 간주되 었다. 그러한 육식은 몸을 덥혀 최음제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고기는 성 적인 욕구와 행위를 증진시킨다고 여겼다. 아울러 폭식과 미식은 사회적 비도덕이며, 또한 종교적인 죄로 간주하였다. 이에 의거 당시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검소함과 금식을 몸의 욕 정을 극복하며 욕망을 조절하는 것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여 강조하였다.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비판한 대표적인 신학 중의 한 명이 다. 그의 논문 ‘금식에 대하여’(De Leiunio)에서 그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우리로 하여 금 하나님에게 더 가깝게 한다고 하였다. 특히 건조한 음식의 생식을 강조하였는바, 그는 포도주 없이 고기와 양념과 습기가 많은 채소 등의 음식만 먹을 것을 권한다. 그는 다니엘 의 예를 들어 채식이 건강에 좋음을 말하고 있다. 베네딕트는 병든 환자를 제외하곤 고기 를 먹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인 성 안토니 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음식으로 빵과 소금만을 먹었으며, 음료수로는 물만 먹었으나, 채식 주의자였던 철학자 피타고라스와 같이 건강하게 장수하였다고 하였다. 중세에는 금요일을 고기를 먹지 않는 날로 정하여 실천함으로써, 동물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 러나 종교개혁자들은...
2012.07.02
신학과 목회 2004. 7-8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신학과목회ꊱ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 다시 읽기, 열두번째 <시편> 주의 영으로 지면을 새롭게 하소서 노영상 /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장신대 기독교윤리 하나님을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다스리시는 분으로 말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시편 24:1-2). 이 본문은 온 우주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만물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 임을 강조한다(시편 136: 5-9, 95:4-5, 8: 3-6 참조).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낳으며, 주님 을 위해 존재한다. 그 하나님은 자연의 질서를 만드시고 지배하시는 분이시다(시편 104 편).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주인인 것 같이 행사할 때가 있다. 자연을 착취하고, 부 리고, 괴롭힐 때가 많다. 우리는 만물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돌보라고 하나님으 로부터 책임이 위임된 자연을 위한 청지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자연 안에서 평안을 누 리도록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잘못될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잘못된다. “여호와께서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거민의 악 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 물이 되게 하시고”(시편 107:33-36). 본문은 거민이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자연을 황폐하게 하심을 언급한다. 인간과 하나 님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인간을 심판하시며, 그들이 회개할 때 자연을 다시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그 생명을 유지 하는 힘을 얻는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나사는 인간은,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에서 소외당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신 분일 뿐 아니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29-30) 문맥상으로 볼 때, 위 본문에서의 ‘저희’란 동물들을 위시한 전 피조물을 가리킨다. 하나님 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 다. 특히 하나님은 그의 영을 보내시어, 이와 같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하고...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16 요 나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요나서는 이방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가능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며, 그들을 향한 선교를 부축이고 있다. 요나서는 이방인 중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있음을 말한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1:9) "그들이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1:16) 결국 요나서는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의 사람들이 요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게 되었음을 증언한다.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3:8~10) 이와같이 요나서는 이방인이 선교를 통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책이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며, 온 인류를 향한 것임을 강조한다. 요나서의 이같은 구원관은 자연을 향한 확대된 구원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요나 4:1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육축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음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육축들도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다. 그러나 이 말씀과 다르게 우리는 동물들에 대해 무자비할 때가 많다. 사냥, 낚시, 농장식 영농, 동물실험 등으로 동물은 오늘도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의 한국은 스페인의 투우, 캐나다의 새끼물개 도살과 함께, 개고기를 먹는 나라로 동물보호자들로부터 많은 지탄이 되어 왔다. 아직 우리나라는 동물보호의 문제에 있어 후진국으로, 이 분야의 입법문제에 더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요나서 3:8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3:7도 참조). 이 본문은 회개를 위해, 사람만 베옷을 입는 것이 아니며, 짐승들도 베옷을 입을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회개는 인간의 전유물만이 아니며, 짐승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한다. 우리는 가끔 기도와 예배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며, 이 자연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땅과 바다와 별 등...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15 에스겔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에스겔서 1장에 네 생물이 나타난다. 그것은 그룹으로 칭하여지는 것으로 일종의 천사를 의미한다. 그 네 생물의 얼굴은 사람, 사자, 독수리, 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야생동물을 대표하며,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조류의 대표격이고, 황소는 가축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에스겔서는 하나님 주변의 모습에서 동물들의 상징을 그려내고 있다. 동물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에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존재들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서는 자연친화적 그림을 통하여 시작되고 있다. 에스겔 47장은 새 예루살렘의 새 성전 모습을 묘사한다. 새 성전 묘사 중 중요한 부분은, 그 곳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 나오고 있다는 구절이다. 그 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의 생물들이 다시 살게 되며, 죽은 바다가 다시 소생하게 되고, 강 양쪽으로는 과일나무들이 풍성한 수확을 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강물은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그 강물에 의해 맺혀진 과일들을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병을 고치는 약재로 쓰여질 것이라고 47장은 말한다. 에스겔서는 오늘의 인간들의 생명의 질이 물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언급하는 것이다. 물이 죽으면 모든 생물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며, 물이 다시 살아날 때 주변의 생명체들도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많은 나라들이 물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적은 수량으로 국민의 마른 목을 축이기 어렵게 된 나라들도 많다. 국민들이 더러운 강물을 먹으면서, 많은 질병에 걸려 괴로움을 당하는 곳들도 있다. 수자원의 관리는 국가의 국방이나 재정 경영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한 계절에 집중하여 비가 오는 나라에선, 알맞게 댐을 설치하여 물을 가두어 주고 나머지 계절들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라 생각한다. 양질의 수돗물을 제공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문제와 직결된다. 강들의 오염을 막으며, 깨끗한 수원지를 개발하고, 물을 정확히 정수함과 동시 좋은 수도관을 통하여 양질의 물을 시민들에게 공급하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공장폐수, 농가들에서 나오는 폐수, 일반 가정에서 방출되는 폐수 등에 의해 우리의 물은 생명체들이 살 수 없는 물로 변해가고 있다. 물을 살리는 것이 많은 생명체들을 살리는 길인 것이다.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생태학적인 재난을...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에덴동산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창 2:8-17은 에덴동산의 모습을 묘사한다. 크게 보면 에덴동산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네 개의 강이며, 다음은 나무들이다. 에덴동산을 언급하는 성경구절들의 공통점은 강과 나무의 구성이다. 성경은 에덴의 모습을 생태 친화적인 모습으로 그린다. 기계와 빌딩이 아닌 맑은 강이 있고, 그 옆에 탐스런 과일들이 열리는 나무가 자라는 곳이 에덴이다. 계 22:1-2은 그 강과 나무를 생명 강과 생명나무로 묘사한다. 오염된 죽음의 강이 아니라 그 물로 모든 생명들을 먹이는 생명의 젖줄이 에덴에서 발원하고 있다. 에덴은 또한 인간과 동물들을 먹일 수 있는 생명의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다. 인간 타락의 결과로, 강이 말라 사막같이 되었으며, 나무와 풀이 시들어 죽어가는 곳이 되었다. 겔 19:10-14은 하나님의 분노로 세상이 광야, 곧 메마르고 가뭄이 든 땅으로 변하고, 나무의 가지들과 실과들이 불에 타들어감을 묘사한다. 창세기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특별한 두 가지의 나무에 대해 언급한다. 죽음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이다. 죽음의 나무로서의 선악과는 인간이 따먹는 즉시 죽는 나무이며, 생명나무는 그것을 먹음으로 영생하게 되는 나무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따먹고 인간들이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간들이 생명나무로 접근하는 길을 막으셨던 것이다(창 3:22-24).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야기되었다. 그것은 일면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죽음이었다. 자연이 배태한 과일로 인해 인간은 죽음의 길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강이 보존되고 나무가 보존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요소임을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묘사를 통해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강이 살아야 하고, 나무가 살아야 한다. 온 국토의 강들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죽음의 강들로 변하고 있고, 산의 나무들이 대기의 오염으로 인하여 바싹 타 들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우리는 강의 본맥과 지류들을 다시 살려, 이 세상을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 한복판의 청계천을 생명이 있는 시내로 복원하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청계천을 복원함으로 우리 가슴에 시원한 강이 흐르도록 하여야 한다. 신약성경은 인간에게 접근이 금지되었던 생명나무가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계 2:7은 하나님께서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마태복음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생태신학적 해석 마 3:16-17엔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이 나온다. 세례받을 때, 물이라는 매개체가 사용된다. 물은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들을 가진다. 창 1장의 천지창조의 내용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물 위를 운행하시며 그 물을 동요시키면서 만물을 만들었음을 읽게 된다. 물은 생명의 모태이다. 하지만 물은 창조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파괴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죄를 멸하시기 위해, 많은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 및 방주 속의 동물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물로 쓸어 버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시 홍해의 물을 통과하며, 애굽에서의 노예의 때를 씻게 된다. 그들은 홍해의 물 세례를 통해, 노예에서 자유인의 상태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세례 시 물에 의해 죽고 사는 경험을 한다. 그 물은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부여받기도 하며, 그 자연이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음을, 그 세례식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부활하는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 1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 또한 이러한 물질적 자연의 거룩한 변형을 가르친다. 하나의 물질로서의 오병이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잡혀 쓰여질 때, 많은 사람을 먹이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 된다. 마 26장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푸신 모습이 나온다.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자신의 피와 살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육이 영으로의 변형의 예들을 우리는 16장의 변화산의 사건 및 28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사건에서 다시 찾게 된다. 자연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인 바, 그것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질 때, 우리의 생명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동식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애정 6:26-28은 천부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돌보는 분이실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생명도 돌보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러한 동식물들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10:29은 작은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함이 없이는...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12 골로새서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골로새서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우리에게 말한다.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지 않는, 당시의 사상들에 대해 비판한다. 영지주의와 유대주의 및 천사숭배와 금욕주의 사상 모두가 기독론에 충실하지 않은 것들로, 기독교의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을 바울은 강조하였다. 이러한 골로새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함께, 우리는 그 책에서 생태학적 전망과 연관된 기독론적 논거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골로새서는 창조의 근거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 본문은 만물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됨과 동시, 그 만물의 목적이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언급한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이단 마르시오니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신 물질과 관여되어 있는 성부 하나님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골로새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있었음을 강조한다. 오늘의 이 세상과 자연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여 속에서 창조된 것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대상들임을 성경은 말한다. 두 번째로 골로새서 1:20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원 범위를 확장하여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격적인 인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만을 위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동물과 식물 등을 포함하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목의 피로 말미암아, 동물도 기쁨을 찾고 식물도 주님 안에서 새로운 평안을 얻게 된다. 세 번째로 골로새서 1:17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만물에 대한 관여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가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창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신 바,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이 질서 잡혀 있음을 위의 본문은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이 만물을 지금도 성령 안에서 유지하시고 지탱하시는 분이다. 만물이 그 없이는 바로 설 수 없다. 온갖 만물이 그리스도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가을걷이 절기가 하나님의 명절인 까닭 왕대일 / 감신대 교수 구약성서 오경에는 가을걷이에 대한 규정이 여러 번 수록되어 있다(출 23:14-17; 34:18-24; 레 23:9-22; 민 28:16-31; 신 16:1-17). 창세기를 뺀 오경의 나머지 책들에 가을걷이 이야기는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반복되는 구절마다 의미의 색깔은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그 모든 구절들은 다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 때 지켜야 될 종교절기로 묘사되고 있다. 가령 레위기 23:9-22의 규정을 들여다보자.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야웨 하나님의 추수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대로 지켜라”(14절, 21절)고 규정하신 추수 이야기이다. 좁게는 성결법전(레 17-26장)에, 넓게는 시내산 법령집(출 19:1-민 10:10)에 삽입되어 있다. 단순히 가을걷이만을 털어놓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하신, 그래야 이스라엘이 길이 길이 살게 될 것이라고 규정하신 하나님의 처방(prescription)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레위기 23:9-22의 앞뒤 맥락에서도 밝히 드러난다. 곧 안식일(레23:3-4), 유월절(레 23:4-8), 새해맞이(레 23:23-24), 속죄일(레 23:26-32), 초막절(레 23:33-36)에 관한 규정 사이에 햇곡식을 바치는 절기(레 23:9-14)와 추수절기(레 23:15-22)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가 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먹거리를 거두어들이는 일은 야웨 하나님이 명절로 정한 절기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곧, 이스라엘 사회에서 절기란 사람들이 즐기는 축제이기 이전에 먼저 야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명절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하는 절기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추수 이야기가 야웨 하나님의 명절로 명시되어 있다는 것은 추수 이야기가 단순히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아님을 암시한다. 추수란 세속적인 절기가 아닌 거룩한 절기, 곧 거룩한 사건이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절기요, 하나님의 때에 관한 이야기이다. 땅에서 나는 곡물을 수확하는 행위를,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하나님의 때로 규정해 놓고 있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추수 이야기가 하나님의 세상 다스리심과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레위기 23장의 전체 서론을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할 주의 절기들, 곧 내가 정한 절기들은 다음과 같다.(레 23:1-2). 추수절기란 때(occasion)에 관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추수 이야기는 어떤 때에 관한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땅에 관한 이야기인...
2012.07.02
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레위기 노영상 / 본회 집행위원, 장신대 교수 레위기 6-7장에는 다섯 가지의 제사가 나온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이다. 이에 있어 번제와 소제는 각각 동물과 곡식을 하나님 앞에서 모두 태워버리는 제사이다. 번제와 소제에선 인간을 위해 남기는 곡식과 고기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하는 제사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자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귀속된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구약의 제사는 강조한다. 곡식과 동물들은 먼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주인도 아니며, 중심도 아니다. 제사를 통해 그러한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구약의 제사는 나타낸다. 인간은 제사를 통해, 동물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과 같이, 그들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이제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나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바침을 통해 우리는 다시 거듭 나게 된다. 동물들이 제사를 통해 바쳐질 때, 그 동물들의 생명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안에서 더욱 온전한 생명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면서, 마치 동물의 피 자체가 우리의 죄를 속하는 것과 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제사를 통해 동물의 피가 기계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제사의 과정에 의해, 이 세상의 자연물과 우리의 생명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제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결단을 하게 된다. 나의 생명, 나의 가진 것, 나의 존재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으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 주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사를 통해 우리의 과거의 죄를 용서받음과 동시,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향한 미래적 결단을 하게 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나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임을 일깨우는 예식이 구약의 제사이다. 레위기 25장은 희년의 법을 우리에게 말한다. 일곱 번째 되는 해는 안식년으로...
2012.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