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과 생명적 사고
송항룡 교수
성균관 대학교 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도교철학사', '동양철학의 문제들', '흐름의 철학, 머무름의 철학' 등이 있다.

소제목
1.생명:"현재,여기,살아 있어야 한다
2.동양적사고:"깬다(覺)-다른차원으로 들어감
3.질문과 대답

  생명:  "현재,여기, 살아 있어야 한다"

동양사상과 생명적 사고, 환경, 생명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동양사상에 상당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사상 즉 유교, 불교사상 그리고 제가 전공하고 있는 노·장 사상을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은 생명사상입니다. 동양은 '생명'으로부터 출발하거든요. 동양사상의 전부를 꿸 수 있는 사상은 '생명'이죠, 생명은 생욕, 즉 생생지욕(生生之欲)합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생명은 현장성, 시간상으로 현존하는 특징이 있어요. 어저께 살아있었던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내일 살아있을 것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예요. 살아있는 것은 항상 현존합니다. '시정(時正)'은 현존성을 이르는 말이예요. '시에 맞게', '적절하게', 시대에 맞게'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 다 여기에서 나온 얘기예요. 동양에서는 퇴계나 공자가 살고 있던 시대를 현존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옛날이죠. 현재는 내가 선 자리가 현재예요. 그보다 더 현재는 없어요. 내가 선 자리, 그 중에서도 남이 선 자리보다 내가 선 자리가 더 직접적이예요.
'나에게' 주어지는 현재를 동양사상에서는 말하는데, 생명의 특성을 보게 되면 첫 번째가 '동일성의 거부'예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은 같은 생명이 하나도 없어요. 같은 생명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 각자 자기 존재 이유를 가집니다. 저 송항룡이 몇 만년 거슬러 올라가도 나하고 같은 존재는 없어요. 이 지구상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거예요. 유일하게 있죠.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생명이죠.

두 번째는 '반복성의 거부'예요. 살아있는 생명은 반복이 불가능해요. 사람은 지금의 인생을 두 번 살 수가 없죠. 한 번 살고 가는 거예요. 뒤로 물러나서 다시 살 수가 없어요. 반복이 불가능한 것이죠.

세 번째 특성은 '불변성의 거부'예요. 살아있는 것 중에 변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란 없어요. 꽃 한 송이도 보게 되면 시시각각으로 변해요. 만들어진 조화는 그대로 있지만, 생화는 오늘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달라요. 살아있는 것은 잠시라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네 번째는 불변성하고 비슷할 수도 있는데, '고정성의 거부'를 들 수 있어요. 가만히 붙박이로 고정돼 있을 수 없어요. 살아있는 거는요. 언제나 유동성.
다섯 번째는 '일정성의 거부'. 일정성이 거부되지 않는 것은 죽어있는 세계에나 있는 거예요. '차이성'을 일컫는 말이예요. 달리 말하면 다양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다양하다기보다는 차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별성이라고 해야 할런지 몰라요. 사실 동양의 철학은 보편이 무너지는 철학이예요. 동일성이 무너지니까 보편이 무너질 수 밖에요. 그리고 남는 건 특수만 남고요. 특수가 뭐냐, 현장은 특수밖에 없어요. 보편
은 현장성을 가지는 게 아니예요. 사람, 사람으로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여기 앉아 있는 선생님들 중 누구도 사람으로  지칭되지 못해요. 그건 아주 공허한 개념이예요. 구체적으로 있을 때에는 김아무개, 송아무개, 바로 '나'가 있는 거예요.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게 '나'거든요. 시간적으로도 같은 게 있을 수 없고 공간적으로도 같은 게 있을 수 없어요. 그렇게 존재하는 게 바로 현실이고 그래서 동양에서는 현실로 내려오라고 하지요. 관념에서 떠들지 말고 '여기'로 내려오라는 말이예요.
동양철학이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가 언어문제예요. '여기서, 여기'라고 하는 언어문제가 가장 컸죠. 그걸 장자가 이어받아 파헤치고 다음으로 달마를 지나, 해명 육조에 와서 소위 선생님들이 많이 알고 계시는 불교에 이르는 겁니다.
'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선불교, 대승불교거든요. 이때 나온 금강경오가, 5종으로 된 선학에서 언어의 문제가 확 규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승들이 주고 간 화두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불교는 불교라는 아버지하고 노자, 장자라고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모보다 훨씬 폭이 넓고 훨씬 똑똑한 자식이죠. 아버지보다는 엄마를 많이 닮았기 때문일 거예요. 노장적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또 이것(중국불교)하고 공자, 맹자라고 하는 아버지하고 만나서 태어난 것이 성리학이예요. 성리학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노장사상과 불교를 모르고 성리학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좀 있죠. 만약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성리학이 순리대로 계승되어 왔더라면 한국성리학은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정권을  쿠데타를 일으켜(비합리적으로)  강탈하고 나니까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것들을 전부 이단으로 몰아버리게 되지요. 그것이 자기의 피와 살인데 그것도 모르고 이단으로 내 치니까 자신이 이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죠. 사실 한국성리학은 중국성리학 하고는 조금 달라요. 나쁘게 발전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성격이 다르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오늘날 노장이니, 불교가 이단으로 되어 있지 않찬아요. 그것처럼 21c에 접어들면서 한국 유학사, 철학사의 한 획을 그으려면 주자학도 다시 봐야 해요. 성리학하는 퇴계나 율곡만 보아서는 안돼요. 넓어져야 해요. 어디로 돌아가야 되느냐, 동양의 본래의 입장이 무어냐,  본래의 뿌리가 뭐냐 하는 데서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해요. 하여튼 생명은 '반복성의 거부'니까 항상 '일회성'이죠. '불변성의 거부'니까 '변화성'이죠. '고정성의 거부'니까 유동성이죠. '일정성의 거부'니까 '임의성'을 띤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속성을 가진 것을 살아서 존재한다고 하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살아 있다.동양은 돌멩이 하나도, 풀 한 포기도, 물도 다 살아있는 것으로 봐요. 모든 존재자는
다 살아있는 거고, 그 정의가 어디서 오느냐 면 '여기서' 온다. 여기라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공간 상에 있다'는 것이예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상에 있다는 거예요.선생님들께 다소 실례되는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불변하는게 뭐가 있을까요? 신성을 불변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건 이쪽에서 보면 허구개념이예요. 허구개념, 실재하는 게 아니예요. 그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요구성에 의해서 요청된 것이지, 실재하는 게 아니예요. 동양사상의 실재자를 정의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을 벗어나서 존재하지 못해요. 여기서부터 철학은 시작돼죠. 시공간, 여기라는 말은 사실 변해요. 변화철학, 변한다는 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시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어요.
주역은 이 세상에 있는 존재자의 정의를 내리는 책이예요. 동양에서는 존재자의 정의를 여기에서 제일 포괄적인 정의를 뭐라 그러죠? 존재자를 포섭할 수 있는 외연이 제일 넓은 개념을 '우주'라고 해요. 宇宙. 우주 안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는 없어요. 여기서 '우(宇)'는 공간을 말하는 거예요. 공간(空間)요. 사방(四方), 동서남북이 사방이죠. 우리는 공간을, 사방을 '우'라고 그래요. '주(宙)'는 뭔고하면 시간이예요. 이건(宇) 공간
을 말하는 것이고, 이건(宙) 시간을 말하는 거예요. 이 안에 있는 것만 존재하는 거죠.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형식이예요. 이것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동양사상의 출발점이예요. 있는 것만이 실재자다. 그래서 동양의 진리관은 '진리는 공허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거예요. '실제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어요. 서양에서 말하는 진리의 정의는 그렇지가 않아요. '보편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말해요. 실제로 존재하고 안 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보편 타당한 것이어야 하죠.

 " 성인들 -제일 나쁜 x 들이다."

그렇다면 동양에서 말하는 '진리는 실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실재하는 것'이란 뭘 까요? 살아있다, 그래서 실재하는 존재자이죠. 살아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주체, 그것(존재자)하고 마주서려면 인간 사고가 살아있어야 해요. 생명적 사고를 해야죠. 그게 죽어있으면 못 봐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고, 살아있는 말을 요구하는 거예요. 전부 살아있는 게 문제예요.각설하고 존재자, 생명적 존재자는 이렇게 있어요. 시공간 상에 있다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에 얽힌 레이다 망에서 벗어나는 존재자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봐야죠.  '진리는 보편 타당하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인데, 동양의 눈으로 보면 거짓말이예요. 사실 진리는 '동서고금을 초월해서 변하지 않고 있는 존재'라고들 하지요. '동서'하면 공간이고, '고금'하면 시간이잖아요. 그래서 동양철학자들은 그걸 두고 거짓말이라고 그래요. 있지 않는 걸 가지고 말하니까요. 그런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공허하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아까 말했듯이, 내가 사는 것은 100년 전에 사는 것도 아니고 100년 후에 사는 것도 아니고 지금을 살아요. 지금 있게 되면 지금 여기에서 문제 삼아야 해요. 지나간 것은 죽은 존재예요. 때문에 '동서고금을 초월해서', 뭐 이런 정의를 내리진 않아요.
그럼 어떻게 내리느냐, 지금 이 옆에 있는 게 뭐냐, 이거예요. 그 실상의 세계를 선의 세계로 보는 거예요. 노자 장자식으로 얘기하면 그게 '자연'이예요. 살아있는 생명과 그걸 인식하는 것, 거기에 사고의 초첨을 맞추면 살아있는 사고가 되고 선이 되는 거예요. 선의 세계.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갈 때, 복선일 경우 이 차가 가는 속도록 옆의 차가 가면 제대로 보여요. 앉아있는 저쪽이. 나는 서 있고, 훽 지나가면 뭐가 탔는지 몰라요. 대상의 세계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도 살아있어야 한 호흡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게 지금 서양에서 동양에 관심을 가지는 키포인트예요. 서양에서 동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존재형식이 무너지면서 부터예요. 언제 무너지죠? 무너지는 시점을 '신과학'이라고 해요. 이게 무너지기 전까지를 고전물리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전물리학이 뭐냐. 시간과 공간이 일정하다고 보는 걸 말해요. 고정돼 있다고 보는 거예요. 절대공간, 절대시간이라고 해요.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존재하는 기반 위에 있으니까 존재자도 일정
하게 볼려는 거죠.이게(존재형식) 무너진 게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이젠베르그, 보잉, 슈뢰딩
거……. 이렇게 내려가는 것이 신과학이예요. 차 타고 갈 때의 시간하고 밖에 있을 때의 시간이 달라진다고 봐요. 비행기 타고 있을 때 시간도 그래요. 우주선 탔을 때의 시간도 달라진다고 보긴 마찬가지예요.동양은 어떤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앉아 있을 때의 시간이 달라진다고 봐요. 미운 사람하고 있을 때도 달라요. 거리도 마찬가지예요. 밤의 공간이 다르고 낮의 공간이 달라요. 선생님들 밤에 차 타고 가 보세요. 굉장히 멀어요. 아침에 다시 와 보면 '아, 이렇게 가까웠는데 멀게 느껴졌어!' 이러거든요. 분명히 밤에는 멀어요. 서양적 사고로 시간이고, 거리고, 공간이고 간에 일정한 잣대를 만들어요. 그 잣대로 재니까 밤에 더 길다는 걸 착각이다 그런다구요. 직접 부딪혀 운전해 가면서 암만 정신 차리고 가도 먼데도 말예요. 도대체 그 차이를 인정을 안해요. 간접적으로 자를 갖다 대 보고 거기에 의지한 채로 앉아 있기 일쑤예요. 제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가도 밤에 가면 멀어요. 옛날 선인들이 그랬잖아요. 심부름 보내면서 "밤길은 머니라, 어서 서둘러 떠나라" 그런 얘기들 많이 하잖아요. 왜 직접적으로 나하고 마주선 걸 인정 안 하고 간접적인 도구를 이용하고서야 그걸 맍다고 판단하는 거예요.이쯤 되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하는 정의도 무너져요.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성적 동물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인간은 마음을 가진 동물이지, 이성적 동물이 아니예요. 그래서 동양은 심(心)을 문제 삼죠. 우리나라에서 그 무서운 칠악 논쟁이 벌어진 것도 이것에 대한 싸움이예요. 기거봉하고 퇴계선생하고 오랫동안 싸운 것도 마음, 정(情)에 대한 싸움이었어요. 성경에 대한 논쟁 가운데 가장 빈번한 것이 인간의 마음을 대한 싸움이예요. 서양에서라면 아마 문제거리조차 되지 않았을지 몰라요. 그러나 마음이란 그냥 가만히 있는게 아니예요. 복잡성이 존재해요. 불교에서 이를 일컬어 백팔번뇌라고 하죠. 백팔번뇌란 108가지 마음에 드는 번뇌를 말해요. 이중에 하나가 이성이요. 그 많은 기능 중에 한 가닥의 기능이죠. 한 가닥으로 인간 전체를 커버해 가며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는 건 무리한 발상이예요. 여기에 '인간 해'의 모순이 있다고 봐요. 이것은 인간 이해만 아니라 인간과 마주선 물상, 이른바 과학의 세계, 물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까지도 그르칠 수 있어요. 신과학쪽에서 보면 이래요. 과학실험을 할 때 우리는 감정적인 요소는 배제하고 맨 이성으로만 봐요. 그런데 이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성 앞에만 마주서는 물질세계를 보게 된 것예요. 그동안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 왔음을 알게 된거죠. 그래서 동양적인 면에 관심을 갖는 거구요.
동양의 주역과 노장은 어떤가요. 시중에 나와있는 책을 보세요. '2000년 전 선인들이 이러한 사고를 하다니'하게 될 거예요.
생명과 반대되는 것은 기계예요. 기계는 일정해야 돼요 결국 고정적이구요. 기계요? 또 반복해야 돼요. 반복이라는 게 없으면 법칙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낙하의 법칙'같은 과학은 생명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아요. 과학화한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작업이예요. 죽여 놓고야 존재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동양에서는 요걸 날카롭게 본 거죠. 어느 시점에서냐 하면은 '역(易)' 우리는 이것을 (제 아무리 복잡해도)
두 가지 부호로 볼 수 있다고 봐요. 시간과 공간. 이거(공간) 부호라면 부호예요. 우리는 공간화시키지 않고는 알 수가 없잖아요. 여기에 딜레마가 있기도 하지만요.  개념이라는 것은 문자라는 것에 전부 공간화시키는 거예요. 공간화시켜서 전부 죽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공자가 말한 인(仁)은 이천년 전에도 인(仁)이고, 지금도 인(仁)이예요. 죽었으니까 변화성을 가질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문자의 한계예요.(이 한계를 지적하는게 언어문제예요.) 우리는 시간을 표기할 수가 없어요. 표기를 하려면 공간화시켜야만 하지요. 한 금 가는 것, 이거 공간이거든요. 공간화시켜야 시간을 알 수가 있어요. 생명도 살아있는 걸 공간화시켜야 해요. 다만 공간화하게 되면, 공간적이 되는 딜레마에 빠지니 문제지요.
이러한 점이 주역에서 누차 강조돼요. 우선 '효'라고 하는 하나의 도가 있다고 칩시다. 그 '효'는 고정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처음 것인지 둘째 것인지, 혹은 나중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주역을 살아있는 것으로서의 '효'를 보려면(어쩔 수 없이) 그 시간을 찍어내서 부호화한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역을 보기 힘들다고 해요. 살아있는 것, 쉽게 말하면 문자는 다 죽어있는 거고, 시체와 같아요. 미이라와 같아요. 거기에다 보는 사람이 콧김을 불어넣어 숨결을 불어넣어 봐야 하지요. 이게 동양에서 글을 읽고 문자를 보는 방법이예요. 전부 그거예요. 우리는 표기를 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언어의 요구성과 언어의 한계성을 수없이 지적하는 화두가 뭔가요? 언어의 한계성을 넘어서려는 거예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무언가 캐치하는 걸 노리는 거지요. 우리가 시계를 보고 그걸 공간화하면 시간을 아는 거 아닌가요. 공간을 통해서 시간을 아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문자를 통해서 살아있는 생명을 아는 거예요. 문제는 그게 항상 어렵다는 거지요. 기계로, 개념으로 하게 되면, 개념은 뭐예요? 문자화되는 게 개념이죠. 이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거리는 어떤가요? 잣대 위에서, 거리는 잣대 위에서만 인정돼요. 밤에 갈 땐 분명히 멀었는데 재 보니까 같다거나 여자는 안돼하는 식이죠. 왜 앞에 마주 선 직접적인 것을 인정 안 하고 엉뚱한 것만을 인정하는 거죠.그렇다고 잣대와 시계가 필요없다는 건 아니예요. 동양에서 잣대와 시계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요. 그러니까 필요할 때만 쓰면 되는거죠. 둘이 사랑을 하는데 한 금 갔다 두 금 갔다 하며 사랑을 속삭인다고 해서 사랑이 존재하는 게 아녜요. 서양식으로 하면 문학도 존재하지 않을런지 몰라요. 박목월의 시에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라는 싯귀가 있어요. 분명히 달이 가지, 구름이 가지는 않아요. 그걸 고도의 합리적 사고(과학적 사고)에 적용하면 '과학적 착각'이라 해야겠죠. 구름이 간다. 우리는 그저 물이 흐르는 거고, 산은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물 위에 있으면 산이 오히려 걸어가요. 배 타고 가면 산이 가요. 배가 안 가요. 기차 타고 있으면 전봇대가 가요. 포플러나무가 가죠. 차가 안 가요. 내가 가만히 앉아있는데, 가긴 뭐가 가요. 바뀌는 거야,
다 그렇게 하나로 붙박아 놓으면 그렇다고 하게 되면, 시가 존재하지 않게 돼요. 그렇게 되면 박목월의 시는 웃기게 되죠. "무슨 구름에 달 가듯이야? 그걸 왜 좋은 시라 그러지 "하게 되겠죠?
이처럼 문학적 요구성이 있을 때 다르고, 기계적 요구성이 있을 때 달라요.  무언가 요구성이 있을 때마다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이치예요. 이것(요구)을 필요화시키는 것이 잣대고요. 잣대는 필요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니까 필요가 없으면 다르게 되어야죠. 왜 한 번 세운 거 가지고 필요가 있으나 없으나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거죠. 이게 동양에서 진단하려는 문제예요.
다시 말해 서양에서 말하는 '공간'과 '거리'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잣대 눈금 위에 존재하게 돼요.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데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계의 좌판 위에 있게 돼요. 그러면 사람들은 시계 위에, 좌판 위에 있는 시간만을 생각하고, 시간을 시간이라 인정도 안 하게 돼죠. 시간은 시계의 글자에 갇히게 되고, 거리는 잣대의 눈금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예요. 시체를 붙들고 하는 거고, 그게 인간의
한계예요. 그 한계를 벗어나 죽이는 작업을 하되 한 번 죽여놓고 내내 있지 말고, 살려냈다 죽이고, 또 ……. 일정성, 필요, 잣대. 우리가 잣대 없이는 살 수 없어. 그 잣대를, 필요한 잣대를 찾아내서 세워 보세요.
이쪽 노자, 장자 쪽에서 보면 -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성인들이 제일 나쁜 놈들이다. 왜? 그 잣대를 만들어놓고 간 거거든요. 잣대, 그 잣대를 만들어서 사람의 우열을 만들어 놓고,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잣대는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야.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자는 풀 한 포기, 조약돌 하나도 까닭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어요. 하물며 사람이야 쓸모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어요. 다 자기역할을 가지고 태어났죠. 그런데 엉뚱하게 세상의 잣대를 만들어서 이건 쓸모있는 사람, 이건 쓸모없는 사람. 지금 중고등학교 수능 시험도 딱 그거잖아요. 왜 영어, 수학만 잘 하는 게 머리 좋은 겁니까? 이건 누가 만든 잣대예요? 그러니까 집에서도 돌대가리, 사회에서도 돌대가리라고 하고, 자기도 돌대가리라고 생각하고 말아요. 자기가 뭘 잘 하고, 자기가 뭘 하는지, 요거를 찾아내 주어야 해요. 이것을 찾아내지 않고, 남의 잣대에만 맞추는데 용을 쓰다니…….
이러한 사고는 살아있는 사고와 구별이 돼야 해요. 현실적으로 밤에는요, 우리의 세포구조까지 달라져요. 어린아이를 길러보면요, 낮엔 멀쩡하게 놀다가 밤엔 열이 펄펄 나요. 이건 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예요. 세포구조, 생태구조가. 사람뿐만이 아니라 물체까지도 달라져요. 쇠붙이 같은 것도 여름에는 붙고, 겨울에는 떨어진다 잖아요. 이렇게 달라지는 것처럼 여름, 겨울이 다르고 정확히 보면, 밤, 낮이 달라요. 어두울 때 다르고,
밝을 때 다르구요. 왜 이걸 두고 일정하다고 야단인지. 솔직히 말해서 밤에만 살아있는 나는 영의 세계에 부딪힐 것만 같아요. 밤에만 사는 박쥐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낮에 사실 영이 있다고 하면, 낮에 사는 영은 밤에 사는 영과 뭔가는 다를 것 같아요. 달라요.정확하게, 세밀하게 보게 되면 일회성, 같은 순간은 하나도 없어요. 여기에 의거해서 이루어지는 한의학에서는 - 지난 시간에 하셨다 그러는데, 거기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론상으로는 동일처방이 불가능해요. 동일처방은 있을 수가 없어요. 감기에 걸린 환자라고 해도(그 처방은) 다 달라요. 여자 다르고 남자 다르고, 같은 여자라도 체질에 따라 다르고, 그 약을 복용하는 시간이 아침, 낮, 밤이냐에 따라 다 달라요. 감기약이라면 쌍화탕 하나 놓고 여기 주고, 저기 주고, 이런 식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언제나 환자를 진맥하게 돼요. 약의 성질도 그래요. 인삼이 유명하다 그러죠. 인삼도 체질에 따라서 반응이 전혀 반대 반응이 나올 수 있대요. 체질에 따라서 전혀 반대의 반응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고들 그래요. 맞는 게 있고, 안 맞는 게 있고. 지금 우리는 서양의학에 너무 젖어있어요. 누가 먹고 나았다고 하면 저마다 먹으려고 그래요. 그거는 그 사람의 그 때에 맞아서 그런건데도, 먹어보니 안 나아, (그 사람이 나은 것마저도) 거짓말이래요. 그거 거짓말 아니예요. 그 사람은 그 체질에 그 몸에 그 찬스에 맞아서 그 때 먹어서 나은 거야. 실질적으로 그렇더라도 나도 먹고, 너도 먹는다고 해서 낫지 않아요. 동일성에 자꾸 적용시키니까 그런거예요.이거를 잘 드러내는 게 주역의 세계예요. 그거 거짓말이야? 그게 맞는다면  똑같은 마음을 먹고 뽑았는데, 왜 이거하고 다르지. 자기가 똑같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똑같은 것은 없어, 동양에는. 아까하고 지금인데, 어떻게 똑같아요? 이건 서양적 사고에서 하는 소리예요. 그래서 정(情)은 한가지에 한 번밖에 못하는 거예요. 두 가지를 줄 수 없어요. 한 번이야. 오직 일회성이야. 한 번이야. 이 한 번. 사는 순간도 한 번. 지금 선생님들이 제 얘기 듣느라고 여기 앉아 계시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지금 소모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 소중한 것,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거예요. '되풀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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