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대답

문 : 강의 잘 들었습니다. 제 전공이 자연과학(수의학)이기 때문에 제 질문이 선생님께
질문이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한가지 자연과학 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죽은 사고는 살아있는 사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만약 죽어있는 사고가 살아있는 사고에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까요? 두 번째로 현대 자연과학은 그 결과가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연구의 결과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동양사상을 바탕으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은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자연과학의 산물인 기술이 우리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

답 : 무념(無念)이라고 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건 아니예요. 지금 하는 생각이
문제가 있다면 그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바꾸란 말씀이예요.  죽은 사고, 우리는 죽은
사고에 들지 않고서는 사고 자체를 진행할 수 없어요. 세상이 변한다고 하지만 머무르
게 하고서 인식하는 것처럼, 머물러 있는 사고 내에서만 사고의 내용이 생겨요. 물론
죽이는 작업은 필요할 때만 하는 거예요.
과학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죽은 사고가 필요하고, 머물러 있는 게 필요하
고, 법칙이라는 게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법칙을 필요한 만큼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아도 이걸 절대화시키고 현실화시키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몇만 년이 흘렀는데도 그것에만 고정시키는 사고, 그게 죽은 사고죠. 아까 시계가 필요없다는게 아니었어요. 필요에 의해서 만든 거면 필요할 때만 적용을 시키고 절대화시키지는 말라는 얘기예요.
고전물리학이 무너졌다고 해서 고전물리학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고전물리
학이 적용되는 세계에는 고전물리학이 적용돼야 돼요. 양자물리학에 내려가서는 그게
적용이 안된다는 거죠.
양자론(量子論)이 뭐냐면 전체를 포괄하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느 조
건과 어느 범주 안에서만 진리이고 존재한다고 보는 거죠. 종래 과학이 그걸 무시하고
우리의 감정까지 기계적으로 보니까 문제가 생긴거죠. 기계가 적용되는 세계가 있고,
그것과 다른 것이 적용되는 세계가 있어요. 그걸 하나로 풀려고 하니 문제지요. 이건
다원주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과학은 동일반복을 전제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가 없어요. 법칙이란 게 성립될 수 없죠.
물론 법칙이란 '부득이' 해서 생긴 반복에 불과해요. 달력을 보면 올해에도 10월 12일
이 있고 작년에도 10월 12일이 있어요. 이걸 같은 날이라고 봐야 돼요? 편리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일 뿐 절대 안 같아요. 작년 10월 12일엔 제가 여기에 오지도 않았어요. 근
데 뭐가 같아요? 사실의 세계는 달라요. 편리에 의해서, 요구에 의해서 같지 않지만 같
다고 간주할 것은 하되, 사실과 혼동하면 곤란해요. '유무 '관념도 그래요. 우리 조상의
과학책에는 '무'의 개념이 없어요. '없다'라는 개념이 없어요.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있고 없고 하는 거죠. 없다는 것은 동양에서는 생존을 못해요. 모르는 영역이 있
을 뿐이죠. '모르는 게 없다', 이거 동양에서는 말이 안 돼요.
보석도 마찬가지예요. 이거 보고 '새빨갛다' 그러는데 내가 보는 것 하고 선생님 보는
것 하고 달라요. 현미경으로 보면 또 달라요. 그럼 현미경으로 본 게 본래의 색깔이예
요? 아니면 눈으로, 안경 안 쓰고 본 게 본래의 색깔이예요? 이거(본래의 색깔) 누가
결정하죠. 다른 조건에서 보면 색깔이 따르기 마련예요. 따라서 어떤게 옳은지 판단하
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예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해요. 기준은 누가 정하죠? 기준이란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미를 심사할 때 미술가들만 모였을 때와 생물학자들이 모였
을 때의 기준은 달라지는 거예요. 따라서 누구는 잘못됐고 누구는 옳다가 아니예요. 존
재조건, 거기 위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보편이라는 기준의 가능성
이 거부되는 거예요. 어떠한 전제나 조건 아래서의 결과만을 기다리게 되는 거죠. 전체
를 포괄하는 그러한 설정이란 존재하지 않거든요.
사실의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사실의 세계는 뭔지 몰라요. 멀리 보이는 사람은 멀리 보
이는 대로, 가까이 있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대로 알고 살 뿐이죠. 본래의 것이 뭔가 따지는 건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일이예요. 우리에겐 그게 필요한 게 아니예요. 아까 말한 원목 말이예요. 그건 쓸모없는 거예요. 지금 어떻게 마주 섰느냐가 문제예요. 그게 현실의 문제, 생활의 문제지요. 동양철학한다는 젊은 애들(대학원생) 가운데 '왜, 30년 전 선배들이 하던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느냐'하는 이들이 있어요.
솔직히 30년 전에 퇴계가 썼던 것에서 문장만 바꿔놓았지 다른 게 뭐가 있냐는 거죠.
다른 게 뭐냐? 저는 애들더러 이럽니다. "노자 하면 '도'를 규명하는 책이고, 불교하면
'공'을 해명하기 위한 걸로 알기 쉬운데 초첨은 여기 있는 게 아니다. 현실에 있다. 노
자가 말하는 '유명의 세계',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를 규명하는 게 문젠데 그건 분명 '밖
의 세계'의 말이다. 있다 하더라도 그건 쓸모없는 얘기야. 원목이 쓸모없는 것처럼. 그
러나 그걸(원목) 바탕으로 이게 생기는 거니까 이게 있기는 있는 거야." 절대적인 필요
한 건데 그것이 어떻게 있는 거냐 따지면 그만큼 그릇으로 고정되는 거지요. 얘기가 엉뚱한 데로 가네요. 원래 자신이 없으면 논점 변경의 오류. 엉뚱한 데가서 한참 떠들잖아요. 죄송합니다.

문 : 선생님 말씀에 수긍하면서도 그 논리 속에서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
선 동양사상의 관점을 다원주의라 하셨는데 그럴 경우 미술가와 생물학자, 둘 사이에
이해와 공유를 위한 노력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또 하나는 동양적 사고에 가
장 접근하고 있는 서양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미술가와 생물학자는 각각 꽃을 봤
는데 인간의 생이라는 것은 단 한번도 그 꽃이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 꽃을 세워 놓지
못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인간의 사유가, 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꽃을 세우지 못
하고 자기 자리로 끌어내리기만 한 것에 대한 비판이지요. 이것은 관점의 다양성을 넘
어 그것 자체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것 같은데요.

답 : 제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은 실재하고 있는 것의 정의, 존재자의 정의예요. 이
건 우리가 필요로 한 거죠. 필요하지 않은데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예요.
선생님 질문은 전체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죠. '보편성'이라는 걸 부정했는데 그게 요구되지 않느냐는 질문이죠. 필요와 실재는 달
라요. 필요한 것은 실재하기 때문에만 있는 건 아니죠. 요구해서 있는 거예요. 보편이
필요하니까 보편을 요구해도 되는 거예요. 보편을 절대화시켜서 그러니까 필요도 없는
데 보편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거예요. 필요하면 절대적으로 따라야죠. 마구 찾아야죠.
요는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 거고, 실재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 이걸 말씀 드
리는 거죠. '필요없다'가 아니예요. 저는 학생들에게 그래요. 우선 철학을 하려거든 가
치관에 사로잡혀 무엇이 얼마나 쓸모 있는 건지 따지지 말라고요. 가치문제는 상황에 따
라 달라져요. 이 때 이 가치를 수용했다고 해서 그걸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면 다른 상
황에서는 혼동을 겪게 돼요. 이것이 현실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가치문제이죠. 그럼 동
일한 꽃을 본 이 두 사람에게서 공통점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냐. 공통점을 찾을 필요가 있을 때는 찾으면 돼요. 생물학자가 이쁘게 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러면 그 다음에 시각을 돌려서 이쁜 쪽으로 봐서 동의할 수 있는 거고, 그 다음에 너도 네 것만 고집하지 말고 한번쯤 과학에서 봐라 하면 그 쪽에서도 동의할 수 있겠죠.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필요하면 이렇게 동의할 수도 있고, 저렇게 동의할 수도 있죠. 공통점은 필요에 의해서 설정되는 거예요.
문제는 필요와 상관없이 절대화 시켜버리니까 정작 필요할 때 필요한 가치를 세우지 못
한다는 거예요. 여고생 쌍둥이가 지하철에 앉았느데 어떤 사람이 옆에 앉아가지고 '야,
고놈, 똑같다'고 생각해요. 근데 장가들어 보면 달라요. 똑같긴 뭐가 똑같아요? 똑같다
면 상황이 달라져도(장가를 가더라도) 똑같아야죠. 그럼 남편들에겐 큰일이겠죠.
그래요 동양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면 질서세계가 무너져요. 선을 봤는데 '아, 나는 틀렸
다'하고 한 번 딱지 맞으면 영원히 시집 못 가는 거예요. 관점이 동일하니까. 딱지 맞
았더라도 이 사람은 또 좋다고 하거든요. 그게 '제 눈에 안경' 아닙니까. 결국은 이렇게
다른 세계가 모여있는 게 동양의 조화예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가 모여 트리오 연
주를 하다가 첼로 소리가 더 멋있다고 그것 따라가면 다 깨요. 아무리 시끄러워도 자기 것을 쳐야 돼요. 달라야 돼요.
'다르다'. 다른 것이 함께 있는 것을 화(和)라고 해요. 그래서 부부화할 때 절대 이 화
(化) 안써요. 남자, 여자 달라. 달라서 결혼한 거예요. 같으면 뭣하러 결혼을 해요. 그래
요. 달라서 했어요. 그래서 부부유별(夫婦有別)이예요. 별(別)이 다르다는 소리예요. 그
런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보면 이 틀이 무너진다는 거예요. 아내 손목을 잡아도 이
게 남자를 잡은 건지 여자를 잡은 건지가 희미해지면서 깨진다는 거예요. 화가 깨진다
는 거죠. 이걸 분명히 하려면 지킬 건 분명히 지켜야 해요.
동양에서는 예(例)가 제일 강하게 요구되는 데가 부부관계예요. 부자지간에는 예의가
필요없어요. 부부지간에는 예의가 필요해요. 아무렇게나 대하게 되면 여자하고 사는지,
남자하고 사는지를 모르게 되고 그러면 부부화합은 깨지는 거예요. 이게 생생하게 살
아있으면 언제나 신혼초 같아요. 화합이 됐다는 건 별미가 있거든요. 모든 객체가 다
자기 개성을 가지고 있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 동야사상에서도 동일성이 있기에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어요. 유학, 성
리학이 여기에 속해요. 그러나 노장 쪽에서는 다르기 때문에  공존한다고 보아요. 서로
다른 유기체들이 나하고 같으면 요구성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다르기 때문에 내가 이
사람에게 요구성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커요. 한 시간에, 한 버스를 타고,

 한 강의실에
서, 한 교과서를 읽고, 한 선생님 밑에서 듣는 교육방법은 앞으로 지양되어야 해요.  
토플러 책 읽다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다 다르게'. 영어, 수학만 잘해야 머리 좋다
는 식이 아녜요. 사람은 아무거나 잘하면 다 의미가 있어요. 이런 식으로 읽다가 '야
요거 상당히 노장적이다'하고 느낀 적이 있어요.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문 : 사후세계…
답 : 동양에는 원래 시종이 없어요. 시종이 없으니까 생사도 없지요. 생은 시고, 사는 종 아닙니까? 다른 것들도 다 시종이 없어요. 생사가 없어요.  말하자면 죽음을 마지막, 즉 종이라고 생각 안해요. 동양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보다 사실 죽음 앞에 훨씬 초연합니다. 아주 초연해요. 당연히 받아들여요. 거부하지 않아요. 결국 죽고 사는 것에 대한 우려는 사고에 달려 있어요. 죽고 나면 이 세상보다 더 좋을 줄 어떻게 알아요. 여기서 좋으니까 저기서는 아닐거다. 여기가 좋으면 저기는 더 좋을 수 있는데, 왜 여기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죠? 그리고 죽기 전까지 자기 목숨이 살아있는 거라면 자기 목숨이 죽기 전까지는 죽어있지 않은 거겠네요. 그러면 있지도 않은 허깨비를 갖다 놓고 왜 두려워해요? 목숨이 있는 날까지 죽음을, 그 허깨비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요. 왜 없는 것에게 생생하게 있는 것이 잡아 먹히느냐 이거예요. 없어요. 오지 않았으니까 없잖아요.
어린아이들은 있지 않은 것을 무서워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벽에 붙여놓은 그림이 무
서우면 막 무서워하죠. 있다고 착각하니까 그래요.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있지도 않은
데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니까 어린아이가 있지도 않은 괴물그림 갖다 놓고 있다고 하
는 것하고 똑같아요.
오지 않는 한, 죽음은 없어요. 죽고 나면 산 건 없는데 비교할 성질의 것이 못 되죠.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구별의 존재가 아니고, 구별이 없으면 문턱 하나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면, 그건 죽으나 안 죽으나 같은 거예요. 그렇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러니까 언제 죽어도 그건 살아있는 대상이 아니예요. 있을 적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는 없는 거고, 하나는 있는 건데 어떻게 구별을 해요. 있는 거 하고 없는 거 하고 자꾸 구별하는 걸 보고 오류라고 하는 거예요. 동양은 이렇게 생사문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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