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인
사고: "깬다(覺)-다른 차원으로 들어감을 의미"
이것이 동양적인 사고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 말하자면, 살아있는 것이예요. 하나의 생각에 붙잡혀 있는 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정관념, '착(着)'이라 그래요. '착'은 머물러 있다는 말예요. 머물러
있다. 사고가 한 곳
에 머물러 있게 되면 문제해결을 못하는 경우가 참 많아요. 무착(無着).
머물러 있지
말라.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다, 배운다 하는 것이 무착인데, 이걸 불교식으로
말하면
'깬다'라는 말이예요. '각(覺)한다', '깨닫는다' 하는 말은 '무착'하고
동일어 예요. 머물러 있으면 갇히는 거예요. 사고에 갇히는 거야. '사고에
갇히지 말라'는 것을 두고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 하고, 불교 쪽에서는 '선(禪)'이라 해요. 정신적인
자유의 세계. 날마다 순간 순간 새로운 것들이 발휘되고 있는데, 생각은
옛날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현실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니까 그렇지 하고 말하는데 그게 이유예요.
살아있는 사고, 살아있는 사고가 필요해요. 살아있는 생명적 사고. 현대식으로
말하면
열려진 사고예요. 갇힌다는 건 '착'한다는 소리예요. 무착이라고 하는
것은 오픈, 열려
있는 것, 열려진 사고라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 생명적 사고지요. 사실
생명적 사고는
다른 말로 바꾸면 살아있는 사고, 열려진 사고라고 봐도 좋을 줄 알아요.
그럼 살아있는 사고, 열려진 사고가 뭐죠? 지금 내가 있는 듯한 사고예요.
살아있는 건
'지금' 사고예요. 옛날에 누가, 주자만 해도 죽은 지 1,200년이 돼요.
주자의 말을 따르는 거는 지금 사고가 아니죠. 1,200년 전 죽은
사고예요. 내가 생각하는 사고 이여야 해요.
그래야 현실철학이 돼요. 주자 말만 따라 가면서 주자가 옳으니까 나도
옳다. 이건 큰
시행착오예요. 내가 1200년 전에 가서 살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걸
읽고 있는 건
나예요. 내게서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느냐가 문제예요. 주자가
어떻게 이해했느냐
가 문제가 아니고. 주자가 이야기한 걸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해
요. 그게 현재의 사고예요. 2000년 전을, 내가 살아있는 현재로 끌어내리는
사고, 이게
철학이예요.
서양하고 동양은 사고가 달라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보는 관점부터가
달라요. 서양에서는 절대시간, 절대공간을 봐 왔어요. 최근 들어서 무너지는데
봐 왔던
것이 조금 무너지다 마는 거예요. 동양은 애초부터가 시간과 공간이
고정된 개념이 아
니예요. 시간이라는 말은 사실 동양에는 없어요. '간(間)'은 잘랐다는
소리예요. 지금 어
느 시각하고 어느 시각하고 사이라는 말이거든요. 시간이라는 말은 이게
얼마나 맹랑
한 지 아세요? 우리가 수학에서 'x'를 시간이라고 하고, 'y'를 공간이라고
하면, 시간과
공간이 함께 하는 자리는 '0'이예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 있어요.
시간과 공간이
다 있어요. 공간 떠나고 시간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시간 떠나서 공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없어요. 시,공간이 함께 하는 자리에 있는 것만이 '현존'이예요.
이 자리는 이 자리일
뿐이예요. 수학상에서 x도 '0', y도 '0'. 대개 우리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자르던가 요렇게 잘라, 요건 미래고, 요건 과거다 하죠.
시간을 자르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자르는 건데, 본래적으로 일정하게
있지 않아요. 있는 건 이 자리에만 있어요. 이 자리에만. 그러기 때문에
시간이 고정될 수가 없어요. 필요한 만큼 자꾸 잘라지는 거예요. 수능
시험을 칠 때 한 시간이 120분 이더라 구요. 필요한 게 한 시간이라고
쳐요.
동양은 시공간에 대한 관심이 참 많아요.
'주역'을 다른 말로 말하면 '시공간의 철학'이
라 할 수 있는데 더 들어가 보면 시간에 대한 철학이라고 봐도 좋아요.
시간하면 동양
에서는 공간이 따라 붙으니까요. 공간하면 시간이 따라 붙어 있구요.
서양은 이걸 갈라
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공간이 없이 시간만 존재하는 세계, 시간
없이 공간만으로
존재하는 세계. 사실 영원불변이라는 말은 존재자에게서 시간성을 폐쇄시키고
공간만
으로 설정할 때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영원불변) 사유상에서만
존재하는 거
예요. 사유상에서는 그걸(시간과 공간) 분리할 수 있거든요. 실질은
같이 있는데, 사유
상에서 분리시켜요. 시간 따로, 공간 따로. 선생님들 이상하게 들으실지
모르겠는데, 뭘
얘기하려고 하냐면 사고를 이야기하려고 해요. 그래서 시간을 이야기해도
'간(間)'에 대
한 이야기는 잘 안 해요. '시', '시'와 '시' 사이. 불교에서 겁(劫)이라는
시간은 꽤 긴 시
간이예요. 사방 40m 되는 두께의 돌을 백년마다 한 여인네가 내려와서
얇은 옷으로 스
쳐가지고,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가 '겁'이라고 해요. 거기다 또 몇
천만 겁이라고 그
래요. 그것과 상대되는 개념은 뭔지 아세요. '찰나'예요. 서양에서는
시간을 잘라봐야
0.000몇 초밖에 못 잘라요. 그리고 그건 필요해서 자른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아무 필
요없는 시간이라 할 수 있죠. 우리가 사실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래야만
해요. 시간은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 필요없는 시간인거죠. 찰나는
찰나로 머물러 있
어요. 시간이 아니지요. 잘라 보니까 그렇게 자를 수가 있다는 얘기지,
자른 만큼 시간
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예요.
시간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요. 요놈을 갖다가 부호화하니까(문자화하니까)
공간으로 밖에 나타낼 수가 없어요. 시간은 나타낼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시간을 읽
어라', '시간을 집어 넣어서 읽어라' 하는 거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이렇게 있다 그래도
여기가 고정된 위치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자주 부정하면서
나타나요. 긍
정을 했다 하면 그걸로 고정되니까요.
이러한 시도들은 선승들이 화두를 열어가는 것에서 리얼하게 볼 수 있어요.
제자가 질문을 했을 적에 답을 해주는 법이 없어요. 답을 해 주면 그것의
값을 그것으로 알거든요. 그래서 석가모니의 맨 마지막하신 말이 뭐예요?
예수님 맨 마지막하신 말씀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석가모니의 맨 마지막하신 말씀이 "나는
사십 구년 동안 단 한
마디도 설법을 한 적이 없노라." 죽은 다음에 자기 말이 곧 진리인
줄을 알고 그것에
갇혀서 글만 읽고 그것만 파고 앉아 있을까봐 한 얘기거든요. 말에 있는
게 아니예요.
팔만 대장경 그게 진리가 아니죠. 진리를
파내는 갈고리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나라, 서양사람들이 동양적 사고를
이해하는데 힘든 점이 이런 것이라고 해요. 아까 서양에서 절대시간,
절대공간 같은 것을 무너뜨리더라도 사고발전이 없다고 하였죠.
서양에서는 누가 뭐라 말하면 그게 진리가 돼요.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때 비로
소 다른게 나타나죠. 그때부터 그게 또 유지돼고요. 그리고 또 가다가
새로운 게 발견
되면 그게 되고, 이런 식으로 나가요. 동양은 그렇지 않아요. 순간순간이다
새롭죠. 내
내 다르게 존재해요. 동일성이 없거든요. 서양에서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틀을 깨
자는 거예요. 그럼 틀이 뭐냐? 동양에서는 이 틀을 가리켜 '기(器)'라고
하지요. 기(器)
란 한번 만들어지면 변형이 없고, 그대로 고정돼 있어요. 다른 걸로
변하지 못해요.
노자에 이런 말이 있어요(칠판에 '원목(原木)'자를 쓴다). 이거는 나무토막을
말하는 거
예요. 나무토막. 원시림에서 툭 잘라낸 나무토막, 다듬지 않은 원목.
껍질을 벗기지 않
은 나무, 이건 아무 쓸모가 없어요. 벽난로에 불을 때려고 해도 쪼개야
쓸 수 있어요.
그대로 놔두면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이건 쪼개야 쓸모있는 것으로 변해요.
쪼개서 만든
그릇은 쓸모있는 거예요. 쓸모있는 것은 고정시켜야 쓸모있는 게 돼요.
그런데 한번 그
릇을 만들면 그건 바가지로만 쓰지 다른 걸로는 못 써요. 바가지는 깬다고
해서 판자
나 기둥을 만들 수 없어요. 이런 걸 한정된 거라 해요. 한정된 것은
시간성을 안 타요.
시간성을 타는 것은 용도가 달라지면 다른 것으로 쓰여지는 거예요.
동양적 사고에서
보는 시간적 초월, '초월'이라는 말은 시간을 초월시켜야 알 수가 있어요.
시간을 초월
시킨다는 말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고요.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머물러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건 다 머물러 놓고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못 본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른다'하는 말은
뒤집어져요. 초월
시켜야 아는 거예요. 오히려 시공간상에 실제로 있는 것은 모르는 거예요.
카메라로 물
흐르는 것을 찰칵 찍으면 흐르는 물이 멈추어 선 것으로 접하잖아요.
우리의 감각기관
은 모두 그러한 작용을 해요. 가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을 필름에다
담아 놓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머물러 놓아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사실은 초월시켜야
알 수
있는 거거든요. 판자를 만들려면 다시 원목을 쪼개야 만들지, 이거(바가지)
쪼개서는
안 돼요. 마찬가지로 이미 만들어진 남의 사고 속에 머물러 있으면 새
사고를 못해요.
원위치로 돌아와 있어야 돼요. 원위치로 돌아와 있어야 지금의 사고가
나갈 수가 있어
요. 그런데 다 여기 머물러 있어요. 한 번 만든 바가지를 가지고 이건
왜 판자가 안 되
느냐 이걸 걱정하는 식이예요. 되질 않죠.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해요.
물론 여기도 실
질적으로는 쓸모없는 자리가 되죠. 무용지용(無用之用)이죠. 사실은
쓸모없는 쓸모예
요. 이 놈을 쓸모있는 것으로 끌어내리는 곳이 곧 현실이예요. 우리는
자꾸 형이상학적
으로 올라갈 줄만 알았지, 끌어내리는 작업은 잘 못해요. 동양 진리의
기반이 뭔지 알
아요? 내가 선 자리, 지금 바로 이 자리가 진리의 토대예요. 진리가
서 있는 자리를 말
하는 거예요. 이 자리를 떠나서는 진리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노자는 나무토막을 '도'라 그랬어요. 도를 쓸모없는 거라고 본 거죠.
도를 갖고 현실의
생활로 내려오면 그 도는 의미있는 도가 돼요. 그런데도 도를 깨닫는다고
현실을 내버
리고 산이고 어디고 간다고 들 하니 문제예요. 현실을 버리고 가서 어쩌자는
거예요. 도
닦느라고 수 십년 보내고 죽어가기 전에 깨달으면 뭐해요. 지고 가려고
깨닫나요? 살아
있을 적에 의미없는 거는 의미없는 거예요. 처자식 다 내버리고 온 청춘을
허비해 버
리고 칠팔 십에, 죽어갈 적에 혹 깨달았다 쳐요, 그게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우리가 사
는 이 자리에서 문제를 끌어내야 해요. 불교에서 참다운 승려는 세속으로
내려와서 대
중 속에서 같아져야 된다고 해요. 나는 다르다, 나는 다르다 하며 비현실적이
되면은
안 돼요. 내려갈 자리로 철저하게 내려가기 위해서 잠시 수행기간을
가진다거나 하는
거지, 그걸 이탈해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절대 아니예요.
아까 말했듯이, 진리의 자리, 바로 이 자리를 깨는 것이 '각(覺)'이예요.
깬다 그러잖아
요. 깨뜨리는 게 아니예요. '깨뜨린다'는 말은 일정한 상태의 모습이나
틀로 있는 것을
부순다는 말이거든요. 파(破)하는 게 아니예요? 그릇을 들고 가다 깨는
것, 동그랗게 있
는 것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 깨지는 거예요. 하여튼 지금까지 있던 모습의
형태를 깨는
것이지요. 이걸 우리말로 하면 참 재미있어요. '깬다' 그러잖아요.
지난 16일일엔가 불교 정통에서 연 모임에서 이현주 목사님이 '영성'에
대해 발표하고,
도곡 스님이 '깨달음'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어요. 저도(엉뚱하게) 토론자로
참여했죠.
스님께서 깨달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지 궁금했고 교회는 제가
무식하니까(제 집
사람이 제 것까지 다 믿어주고 있어요). 여하튼 영성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던 저는
그 모임에 나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깬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깬다, 잠을 자
다가 눈을 뜨는 것도 깬다 그래요. 우리말로 "깨워라" 그러잖아요.
자다가 "늦잠잔다,
깨워라." 이러잖아요. 눈을 뜨는 것,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도 깬다
그래요. 기절했다가
일어나는 것도 깬다고 하죠. 이거를 불교에서는 '각(覺)'이라고 그러죠.
각을 다른 말로
하면 '개안(開眼)'이라고 그래요. 이것도 깬다라는 말이예요, 깨달음.
여기에서 공통점을 뽑아보면 뭐예요? 뭔가 하면 깬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있던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내 앞에 마주 세운다는 뜻이예요.
우리가 사과를 들고 가다가 깼다고 칩시다. 그걸
보면서 쓸모있는게 몹쓸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가치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지금
까지 있던 것이 깨짐으로 다른 차원으로 들어섰다고 봐야 해요. 그게
깨짐이예요. 깬다
는 말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는 거예요. 모든 대상은 늘 다른 차원으로
있어요. 살아
있는 거죠. 그런데 내가 잠을 자서 다른 삶을 맞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깨어있어야 해
요. 사고가 살아있으면 자꾸 새로운 사고를 접할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차원, 지금까
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드는 것을 깼다고 해요. 물론 한 번
접어들고서 그
대로 계속되는 거는 또 깨는 게 아니예요. 어디 가서 한번 깨게 되면
다 되는 줄 알면
안돼요. 다 내다보고 다 완전한 것처럼 아는데, 천만에요. 깨는 건 내내
속행이예요. 그
거 가지고 계속 머물러 있으면 자는 거예요. 정지돼 있는 거니까.
새로운 사고. 재미있는 건 기독교에서 '거듭난다'는 말을 하죠.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글자 그대로 '중생(重生)'이라는 말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다름 아닌 깨는 거지요. 한번 거듭났기 때문에 "나, 다 됐다"하면
되나요. 자꾸자꾸 거듭
나야지요. 유학에서 날로 날로 새로워라 그르잖아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이걸 기
계론적으로 생각해서 날로 새로운 거라고 하면 우리는 살 수가 없어요.
선생님들도 아
까하고 같은 모습으로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자기
아들, 자기 부
인 자꾸 달라지면 어떻게 해요. 우리가 사고를 바꾸지 않아도
아무 지장이 없으며 문
제에 부닥치지 않으면 구태여 깰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거예요. 깨달음이란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예요. 아무 문제 없는데 깨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는 깨달을 필요도 없는데 기계적으로 자꾸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동양
적 사고가 아니라 기계론적 사고예요. 깨달음이라는 거, 깨지는 게 필요할
때 깨지는
거예요. 필요하지도 않은데 기계론적으로 무조건 깨고, 필요하지도 않은데
전부 변하는
걸로 하루도 못 살거예요 변할 자리에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겠지요.
변해야
할 때 안 변하려고 안간힘을 쓰니까 문제해결이 안 되고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 아니겠
어요.
불교에서 '생각하지 말라'고 하죠. 이것도 기계론적으로 이해하면 안
돼요. 사람이 생각
을 안하고 어떻게 살아요? 그건 말도 안 돼요. 도인이나 그럴 수 있을까요.
아무리 도
를 깨닫고 왔다 그래도 그 사람 밥 안 먹고 사나요? 땅 안 밟고 살구요?
이렇게 생각
하면 안 돼요. '염(念)'이라는 건 생각 안한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바
꿔라, 그런 이야기지요. 생각을 멀리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생각자체를
다 버리라
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뇌, 번뇌를 가지고 생각을 바꿔라. 새로운 생각을
하라는 거지요.
그 말이예요.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다가 실연을 당하게 되면 거기에
매달려가지고 아
프잖아요. 생각을 바꾸면 안 아파요. 불교는 이고동락(離苦同樂)이라고
번뇌와 고뇌를
이겨내고 없애자는 종교에요. 고뇌를 다른 거로 대치시키면 종국에는
아무 것도 없게
돼요. 사업이 실패했는데 거기에 붙들려가지고 헤어나지를 못하면 다른
길이 없어요,
자살밖에는. 그걸 다른 걸로 바꾸면 아무 것도 아닌데….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어떤 전제 위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거하나 하고 질문받겠습니다.
우리나라에 개화기의 신채호, 임꺽정 소설
을 쓴 홍명희, 그리고 문일평, 최남선, 이들 모두 동경유학 시절 천재라고
알려졌던 분
들인데 그 중 호남 문일평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아마 요
즘 같은 땐가 봐요. 길을 가다가 들국화가 피어 있는 걸 보았어요(칠판에
그리면서).
들국화가 이렇게 생겼나? 누구하고 갔냐면 생물학자하고 그 다음에 화가하고,
예술가
하고요. 둘이서 길을 가다가 들국화 한 송이를 봤어요. 화가인 예술가가
"참 사람이 그
림을 그리고 예술을 한다고 하지만은 요런 미와 같은 결정체는 있을
수가 없다" "요거
야말로 미의 결정체다"라고 얘기한 반면, 생물학자는 "야,
고놈도 후손을 남기려고 하
는 하나의 생식기에 지나지 않구나" 이렇게 본다 말이예요. 생물학자는
생식기로 보고
예술가는 미의 결정체로 본 거예요. 하나는 생식기로 보고 하나는 미의
결정체로 본단
말이지요.
누가 잘 본 거예요? 서양에서는 그걸 요구해요. 생물학자가 옳게 본
거냐, 미술가가 옳
게 본 거냐. 이거 둘 중에 하나를 택하려고 그래요. 어떤 게 옳은 거고
어떤 게 그른
거예요? 만약 다 옳게 못 보지 못한 거라면 양비론이 돼요. 그죠? 둘
다 옳게 본 거라
면 양시론이 돼요. 둘 다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럼 보는 건
어떤 걸까요. 옳게
보는 걸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잘못된 걸 문제삼을 수 있는 거예요. 만약
그게(옳다고 정
해 놓은 것) 잘 된 것이면 문제될 게 없을 거예요 그 잣대는 누가 세운
거죠. 도대체 누구 생각이냔 말이예요.
우리나라 속담에 '개 눈에 똥만 보이고…' 그런 거 있잖아요? 실례되는
말 인 것 같습
니다만, 누가 본 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많은 신학자들이 있는데, 어느
신학자가 본 것
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이거(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누가 결정해요?
만약 본래의 뜻
을 안다고 하는 신학자가 있다면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하
나님은 우리를 알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너 잘못됐다', '내
가 본 것만이 옳은 거다'하는 딜레마에 빠지기가 쉬워요. 여러분께 과제를
한 가지 드
리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꽤 오래된 것이예요. 신약만 따지더라도
2000년이예요. 구약은 더 오래 됐구요. 고전 중에 고전이죠. 그런데
이게 항상 살아 있어서 생생한 책
으로 읽히고 있어요. 지금도 살아있는 책, 중세기에도, 현실에도 살아있는
책, 언제나
현실에서, 현존성으로 읽히고 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책, 그 생명은
무엇일까요? 왜 옛
날 책으로 안 읽히고 지금도 리얼하게 생생한 책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책으로 읽히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해요.
제가 말씀드린 것을 생각해 보시는 걸로 제 강의는 끝내고 질문받겠습니다.
다음장으로
환경신학으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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