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프란치스코의 생명사상과 삶

엄두섭 목사

엄두섭 목사는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전까지 은성수도원 원장으로 계시며, '길', '영성생활', '영성의 새벽', 특히 한국의 프란치스코라 불리는 이현필선생의 전기 '맨발의 성자'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를 썼다.
소제목
1.소홀히 하는 수도원영성
2.늑대도 형제였다.
3.태양의 노래
소홀히 하는 수도원 영성
먼저 영성이라는 관념은 초종교적인 관념입니다. 다른 종교나 다른 정신운동을 하는 기관에서도 비록 영성이란 용어는 쓰지 않지만 비슷한 표현을 쓰기는 합니다. 예를 들면 '영기'라든지 '영의(靈衣)' 또는 '오라(aura)',인도 요가에서는 '프라나'라고 합니다. 우리 동양사상의 도가에서는 '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철학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요즘에는 개신교 신학교에서도 '영성'신학을 가르치는 곳이 많이 생겼습니다. 원래 기독교에서는 처음부터 '영성'이라 부르지 않고 '기독교 신비신학'이라 부른 적도 있고 '기독교 윤리학', '심신생활-믿는 마음', '완덕의 길', 또는 성인·성녀들을 연구하는 '성인학', '수덕심신학' 등 여러 가지로 불리던 것을 요즘에 와서는 한 데 묶어 '영성 신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영성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단일한 것인데 기독교적인 것이 나타날 때에는 환경과 형편에 따라 다양성을 띄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톨릭적인 영성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고, 개신교적인 영성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고, 혹은 그리스정교회적인 영성이라 말할 수도 있고, 수도하는 수도단체의 경우에는 예수회(이냐시오 로욜라)적인 영성, 프란치스코적인 영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영성 변천을 어떤 분은 3가지 단계로 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순교적인 영성, 다음에는 종말적인 영성, 마지막으로 경건하고 순교적인 영성이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초창기로부터 6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의 영성 생활의 방편과 주제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예배, 성례 혹은 카리스마, 또 열심히 전도하는 일, 영성 훈련, 신비주의 수도원 등이었습니다. 초창기 기독교회 예배의 기본요소는 유대교 회당의 예배와 비슷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시편을 외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고 찬송을 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기독교인들이 매 주일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을 추가한 것이 예배라고 합니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들인데, 성경상 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고린도 교회에 각종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은사는 아마도 교회에서 너무 남용해서 교회를 분열시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영성 생활을 위해서 한 특별히 어려운 훈련으로는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 그랬는데 십계명을 지키는 그런 도덕률이 있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영성 생활을 하기 위해서 음식이나 술, 성적인 생활 등을 절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 같은 경우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세속을 비판하고  몸단장을 잘 하지 않고, 인위적이고 부도덕한 것은 구경하지 않으려 하고, 또 저급한 음악을 듣지 않는 생활을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에서는 교육자들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수도원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수도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원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수도원은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써 예수님 이전부터 있었죠. 유대교에서 주전 2세기부터 에세네라고 하는 일종의 수도 단체가 있었는데 어느 면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성인, 성녀들 모두가 수도원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죠. 수도원 운동은 영성생활에 중요한 기관이고, 우리가 잘 아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같은 분들이 사막 속에 들어가서 수도한 예가 있죠. 밖에 기독교 신비주의가 영성 생
활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는데, 동방교회는 지중해 동쪽에 있는 교회들이죠. 서방교회는 서편에 있는 로마가톨릭 계통의 교회인데, 동방교회 나름대로의 영성적 특징이 있고 서방교회의 영성적 독특성이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하는 기도도 예수 기도라고 하는데 역시 영성 생활을 하는 방편이죠. 그밖에 널판지에다 예수님, 성모마리아를 그려 가정마다 모셔 놓고 입맞추고, 촛불 켜고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반면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 계통 교회의 영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수도원 운동입니다. 그 중에서 대 성인이면서 독특한 수도회를 시작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요.
성 프란치스코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182년에 태어나서 122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23세 때 회개하고 개종하여 4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유명한 대 성자 프란치스코가 활동한 기간은 불과 22년인 것이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기독교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가장 위대한 성인이고, 종교적인 천재라고 말할 수 있겠죠. 또한 일종의 종교적인 로맨티시즘 운동을 일으킨 성인이라고 봅니다. 프란치스코는 사랑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사람이고 성 프란치스코는 그보다 300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800년 전 사람이죠. 우리는 종교개혁자 하면 마틴 루터를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란치스코도 종교개혁자입니다. 그 당시에 로마 가톨릭교회도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는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대항적인 개혁이라고 본다면 프란치스코의 개혁은 사랑의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하르낙이라는 교수는 "프란치스코는 그 당시에 다 무너져가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벽을 와르르 헐어버리지 아니하고, 다만 그 성벽 밑에 자기의 조그만 수도 암자를 지었다"라고 평했습니다. 그것이 프란치스코입니다.
그 당시 로마교회가 부패해 있었지만 헐어버리지 않고 무너져가는 그 밑에다 자기의 조그만 오두막을 지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얼굴을 그린 화상 같은 것들이 전해 내려오는데 키가 작고 얼굴은 참 못난 사람입니다. 못난 얼굴의 사람이지만 한 번 프란치스코를 바라본 사람이라면 교황으로부터 도둑놈들과 심지어 짐승들, 새와 곤충들까지 그에게 감화를 받았고, 또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교황 피오 11세는 프란치스코를 가리켜 또 하나의 예수, 혹은 나사렛 예수의 화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저더러 말하라고 하면 예수님 다음으로 추천할 사람은 프란치스코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같은 분이지요. 예수님의 거울이자, 성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성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 교역자들이 수도원도 잘 모르지만 프란치스코를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성인이 아니라 - 종교개혁 이전의 성인이니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랑할 만한 그런 성인입니다. 교회는 성인을 기다리고 성인을 통해서 유지되는데 이탈리아에서 한 사람, 프란치스코가 일어나서 오늘날까지 800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인종, 모든 시대, 모든 종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의 감화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사렛 예수의 종교지요. 여러분이 잘 아는 일본의 성자 가가와도 하천풍언은 프란치스코의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법정 스님 잘 알지요. 강원도 산골에서 혼자 살고 계시면서  참 좋은 글을 많이 쓰는 분인데, 그 분이 쓴 글을 읽으니까 성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라고는 글에서 제일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감화를 받았다고 볼 수가 있죠.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아씨시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성격이 아주 너그럽고 천진난만하고, 단순하고, 젊은 시절에는 정열적이고 자유분방했습니다. 물론 회개하기 전이죠. 우리
나라에도 각설이타령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죠. 이런 사람들처럼 프란치스코도 기타 치고 노래부르고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돈 잘 쓰고 호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2살 때에 이웃에 있는 게루지아라고 하는 옛날 도시국가와 아씨시가 전쟁을 할 때, 갑옷을 입고 기사로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1년 동안을 적국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전쟁포로가 돼서 갇혀있다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성격이 변해서, 친구들도 멀리하고 우울해지면서 사색에 잠기고, 그러다가 병이 생겨 인생의 허무함과 적막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에 프란치스코가 말을 타고 혼자 아씨시 교회로 가는데 맞은편에서 문둥병자가 절룩절룩 오고 있었어요. 프란치스코가 제일 무서워하던 것이 문둥병자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말머리를 돌려서 도망치려 하다
가, 비겁한 자신을 뉘우치면서 말에서 내려 문둥병자를 포옹하고, 그 입에다 입을 맞췄습니다. 우리가 볼 때 큰 사건은 아닌 것 같지만 제일 무서워하던 문둥병자에게 입을 맞췄다고 하는 이 사건은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껍데기를 쪼아 밖으로 나온 것처럼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23살 때, 프란치스코는 회개하고 아씨시에 있는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 끓어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영음이죠. "프란치스코 내 집은 타락했다. 내 집을 세워라. 너는 내 집을 세워라. 내 집이 무너져가고 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처음에는 다미아노 성당이 퇴락했으니 그것을 수리하라는 말씀인 줄 알고 성당 수리부터 시작했는데, 결국 그것은 그 당시 기독교 전체의 타락을 수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줄 깨달았습니다.
또 한가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209년 어느날, 그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날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는 마태복음 10장 5절에서 15절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둘씩 내보내면서 "옷 두 벌을 갖지 말라,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 발에 신도 신지 말라. 지갑에다 금이나 은이나 동전 하나라도 갖고 다니지 말라, 주머니도 갖고 다니지 말라, 먹을 식량 하나 갖고 다니지 말라."하는 말씀인데, 사제가 낭독할 때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이 직접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자기에게 말씀하고 있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감동해서 당장 그 자리에서 그 말씀대로 실천했어요. 좋은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벗어 던지고 농부들이 입는 자루 옷을 하나 얻어 입고 성당 마당에 굴러다니는 새끼줄 하나 얻어다가 허리에 묶고, 신발을 벗어 던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보고 이렇게 하라고 했다는 그 감격으로 예배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어느 성문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거기 가서 두 손을 들고 "형제들,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음성에 거기 모였던 사람이 감격했고, 그 중 몇 사람이 프란치스코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최초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중심으로 "작은 형제회"라는 것을 창설했습니다. 그것이 프란치스코 교단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장: 늑대도 형제였다

환경신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