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경의 삶과 영성

정일우 신부
예수회신부로 한때 서강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며 20여년 빈민사목자의 길을 걸었고,
지금은 유기농사를 지으며 직거래운동을 하고 있다.

소제목
1.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
2.농부에게도 영성이 있는가?
3.질문과 대답

개종을 권하지 않는다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일리노이주의 아주 시골입니다. 제 조상들은 모두 농사를 지었고, 형님하고 조카들은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60년도에 한국에 와서, 서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도시 빈민지역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4년전부터 충청북도 끝자락에 있는 속리산 옆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먼저, 이 자리는 내가 설자리가 아니라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환경이나 농사, 그리고 영성에 대해 별로 할 말도 없고 오히려 제가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서 배워야 돼요. 교육을 받아야 되는데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벼를 베야 하는 바쁜 시기인데 이곳 유실장님이 꼭 해야 된다고 매우 묘하게 간곡하게 부탁하셔서 하게 되었습니다. 묘한 기술보다는 아마 영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
니다.  이렇게 나누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수련'이라는 책에서 나온 기도문을 기초로 관상(觀想)을 좀 설명할 것입니다. 두번째는 성서적인 근거, 세번째는 모르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대개는 많이 아실 거라 생각해서 로욜라 이냐시오의 기도문을 통해 농부의 영성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는 예수회를 창립하신 분입니다. 그 수도회가 여러분의 조상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 역사를 아십니까? 16세기경, 이냐시오는 1491년에 태어나서 1556년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죠. 이냐시오는 예수님한테 완전히 반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되플이하고자 했었지요. 그런데 그 당시 구교인 천주교는 많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결국 그의 첫 번째 목적은 교회쇄신이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 복음대로 살면서 교회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외국 선교였습니다. 중국, 인도, 일본에 천주교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냐시오 기도는 저희들 삶의 핵심이자, 영성의 핵심입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이 산다면 환경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냐시오를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천주교를 또한 선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이라는 짧은 책이 있습니다, 원래 말은 영적인 운동(체조), 영조(靈操)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운동하는 프로그램을 천주교에서는 피정이라고 합니다. 한 달간의 영적인 프로그램 중 먼저 약 10일간은 창조문제와 죄를 다루고, 나머지 3주간은 예수에 대해서만 기도합니다. 예수공생애 기간의 성경말씀을 놓고 공부하는 것을 피정(避靜)이라 합니다. 그 마지막 30일간의 기도문은 제가 드린 인쇄물에 있습니다. <주의: 기도문 삽입> 이 기도만 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문의 내용대로 살아야 합니다. 살뿐만 아니라 생활화  해야 합니다. 묵상기도는 머리로 기도하는 것, 예를 들어 성경구절 가지고 분석하고 기도하는 것, 주로 머리를 많이 쓰는 거죠. 그런데 관상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훨씬 수동적
인 기도입니다. 성경구절을 읽고 별 생각 없이 마음으로 말씀을 보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방법은 마음으로 계속 되새기는 것입니다. 제가 85년 속리산 법주사에 속한 한 암자에 한 달간 있을 때 겪은 간단한 체험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느 날 암자 위로 산보하다가 그냥 멍하게 있었습니다.
앞에는 소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무 가지가 나한테 다가왔습니다. 비록 느낌이었지만, 이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시선 안에 지금까지 얼마나 폭력이 많았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를 보면 모든 대상을 잡아먹는 폭력의 시선이 아니고 내가 가만히 있어도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이것이 관상기도의 핵심이자 자세입니다. 첫 번째, 기도는 내가 받은 모든 선물을 다시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것, 태어나면서부터 이 순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혹은 조상들이나 친척들로부터 감사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면 좋은 것만 떠올리고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소위 좋지 않았거나 힘들고 어려웠던 것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이냐시오는 각 피조물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 돌, 모래 한 알, 동물, 식물 등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심으로써 존재하게끔 하십니다. 문제는 그것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 하는 겁니다. 느끼는 기술을 키워야 합니다. 물질 내지 식물 등의 모든 생물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존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식물을 번성하게 하시고 능력을 주시며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수고하시고 일하시는 것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시며 노동하십니다. 네 번째는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이냐시오는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태양과 햇살, 샘과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 태양과 태양에서 나오는 햇살, 혹은 샘과 물은 다릅니다. 햇살은 태양이 아닙니다. 그리고 물은 샘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은 그 물이고 빛은 그 빛입니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성도 이런 것입니다.
영성은 여러 가지입니다. 구교와 신교의 영성이 조금 다릅니다. 색깔이 약간 달라요. 사실 천주교 안에서도 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수도회에 따라 -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 베네딕트회 - 약간씩 다릅니다. 여하튼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내기'입니다. 어떤 글을 보면 잘못 번역한 것이 있더라구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과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찾는다는 것은 어딘지도 모르고 찾는 것이지만, 이냐시오에게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기가 아니라 찾아내기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다 더 크게 드러나게 하자는 것은 이냐시오가 가장 많이 썼던 말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살게 되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사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대한 구별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관상을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 영성 중에서 이냐시오의 영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성서적 근거
이제 성서적 근거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창세기 1:1,2를 보면,'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했습니다. 여기서 물(수면)이라고 표현했는데, 원래의 말은 혼돈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카오스(chaos)입니다. 맨 처음에 혼돈이 있었는데, 그 위에 하나님의 영, 입김, 기(氣)가 휘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氣)가 혼돈 안에 퍼져가므로 모든 질서가 생겼다는 것이죠.
두 번째 창세기 1:26,27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덩어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사람이 뭐냐하면 흙덩이에다 하나님의 입김을 넣은 존재입니다. 인간 구조는 흙과 하나님의 입김이므로 모순 덩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돈 안에서 질서가 생기므로 물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가 물질 안에서 퍼지다가 식물이 생기고 식물 안에서 동물이 생기고 동물 안에서 퍼지다가 모든 것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가 계속 퍼져나가는 과정, 계속적으로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도 하나님의 입김이 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퍼져나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세 번째는 야훼가 모세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4-6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러 다가서는데 야훼가 모세에게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고 있는 장면이 나오죠.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영성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모래 한 알이라도, 낙엽 한 잎이라도 다 거룩합니다. 영성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다 거룩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마 27:50,51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 이 세상 어디든지 지성소가 되었다는 얘기죠. 우선은 야훼께서 그 좁은 곳에서 해방되셨을 거예요. 얼마나 갑갑해 하셨겠어요. 외로웠을 거예요. 일년에 한 번 그것도 한 사람만이 들어오니까요. 아무튼 휘장이 찢어지므로 인해 하나님이 나오실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죠. 지성소라는 의미가 없어지니까 한자리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든지 거룩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거룩할 뿐만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므로 성령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 핵폭탄 터지듯 성령이 온 세상에 터졌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자리가 아닌 곳이 없는 거죠. 마 25장에 있는 최후심판 내용을 봅시다. 내가 장례식을 집전 할 때 많이 읽는 부분이예요. 굶주리는 형제, 목마른 형제, 나그네 된 형제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최후심판은 쉽게 말해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자리 아니에요? 그러나 이 말씀에는 하나님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없어요. 그냥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병든 사람에 대한 얘기뿐입니다. 깜짝 놀랐어요. 기준은 서로 서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이냐 뿐이예요.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병든 사람이 바로 나다. 예수다. 그 외는 할 얘기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젠 너희들을 종으로 부르지 않고 벗(형제)으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을 내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이 목요일 밤이었는데, 부활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 형제들에게 가서 얘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종이 아니고 '벗'이라 하셨고, 또 형제라 하셨습니다.

다음장: 농부에도 영성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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