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에게
영성이 있는가?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농부의 영성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소개할 때도 말했지만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농사꾼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지금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말이 많지 않아 마음이 평안하고 여유가 있어요.
긴장과 폭력도 없고 겸손합니다. 자기 한계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200㎞ 떨어진 학교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면 집에 오곤 했지요. 떠날 때는 가끔 아버지께 '농사가 잘 될 것
같은지'하고 여쭤보면 '내가 할 것은 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 분께 달려
있다'고 하셨어요. 농부들은 자기 할 것을 하고 나머지는 한계를 알기
때문에 겸손하게 그 분께 맡깁니다. 저는 1960년에 한국에 와서
연세어학당에 다니며 한국말을 6개월 동안 공부했어요. 그 다음 해인
61년도 봄에 서강대학교에 다니는 지방학생의 집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 당시 농촌은 매우 가난했죠. 그런데 마침 식탁에 달걀이 올라왔어요.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때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깝다
생각하면서 내놓는 게 아니고 아주 기쁘게 기꺼이 내놓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니라 닭까지 잡아서 대접 하시더라구요. 더 인상적인 것은 나를
부를 때 교수라 부르지 않고 손님이라 불렀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60년대 교수의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죠. 그런데 교수라 부르지
않고 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손님이 더 존대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죠.
저녁때 한 방에 모여 앉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저는 한국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라 한 마디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말한다는
것이, 벽에 있는 그림을 보고 예쁘다고 했어요. 또 학생 형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아름답다, 맘에 든다고 했어요. 놀라운 것은 제가 떠날 때
그 그림과 옷을 주시는 거였어요. 너무 미안했죠. 그 때는 물질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었죠, 또 그 때는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음식 같은 것도 남기는 게 없었어요.
낭비하는 것도 없었어요. 있다면 퇴비장으로 가져갔죠. 자연에서 꼭
필요한 것만큼만 쓰고 남는 것이 있다면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냈어요.
60년대 초, 그 때는 물질보다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돈이라는
것이 인간과 사회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인간 사회를 무너뜨렸어요. 그
다음에 자연이 파괴되었죠, 여러 가지 좋은 질서를 파괴해버렸습니다.
저는 서양사람이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동양사상의 가르침이
더 마음에 들어요.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야훼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말씀은 마음에 안 들어요. 유대인의 피해의식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서양인은 자연을 극복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거죠. 동양사상을 우리 믿음과 관계시켜 보면 더 옳다는 생각이
들어요.사람은 대자연 안에 있는 것입니다. 농부는 매일 흙을 만지며
논밭에서 참깨, 들깨, 토마토, 수박 등 생명을 가꾸는 것이죠. 영성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죠. 나중에라도 저는 아무 신앙도 갖지 않은 농부의 영성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분명히 사람에게도 영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불교도 믿지 않고 구교, 신교도 믿지 않는 농부들에게도 영성이 있어요.
하나님의 개념은 드러나지 않지만 매일 자연을 만지는 사람이니까 영성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농부들은 모내기할 때마다, 또는 새벽마다 논과
밭을 한바퀴씩 돕니다. 그냥 보는 거예요. 제가 볼 때에 그게 관상기도(觀想祈禱)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농사는 감으로 하는 거죠. 식물이 건강하냐, 건강하지
않느냐는 머리로 분석하는 게 아니고 감으로 느끼는 거죠. 저는
아직 그런 기술이 없어요. 평생 농사를 지었다면 감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지만 말이죠. 어쨌든 그 사람들은 관상 기도하는 사람들이죠.
왜‘나락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잔다’는 말이 있잖아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토마토 농사짓는 사람이 있는데 분명히 느낌이 있어요.
통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관상하는 버릇이 있다는 거예요.
다음장: 질문과 대답
처음장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