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깨달음, 마음의 생태학

우리가 말하는 생태적 삶과 새로운 세상

사회 : 유미호 /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획실장
발표 : 김영락 /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유정길 /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
       박영석 / 원불교 천지보은회 공동대표
       문영석 / 서강대 수도자대학원 교수
       허병섭 / 무주진도리 생태마을 주민
       박병상 /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김조년 /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사  회 : 안녕하세요. 생태적 삶을 생각하며 환경운동을 하시는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생태적 삶의 경험은 각자 현장으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을 일구어 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되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분들은 김영락 목사님, 유정길 국장님, 박영석 대표님, 문영석 교수님, 김조년 교수님, 그리고 이 곳 활동가웍샵에 오셔서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신 허병섭 목사님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또 오늘 이 주제를 선택하신 여러분들도 자신의 생각하는 생태적 삶과 그리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가운데 우리가 나아갈 길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길 희망해봅니다. 우선 저희 단체에서 사무총장으로 계신 김영락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생태적 삶은 어떤 것인지 들어볼까요.

김영락 : 3,4년 전쯤에 무씨를 밭에다 뿌리고 몇 달이 지나 다 자란 후 뽑으면서 텅빈 흙 속의 공간을 보았습니다. 그때 떠올랐던 생각은 '아! 무가 흙을 먹고 자랐구나' 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흙을 먹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쌀이라든지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흙으로부터 온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태초에 조물주가 인간을 흙으로 지은 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흙으로 지음을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그리고 또 생각하니까 아침에 화장실에서의 배설이 사실은 흙으로 가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인간은 결국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생물학자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1년에 98%의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이 교체가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우리는 흙에서부터 와서 흙으로 가는 구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면 인체는 자연의 한 부분이기에 인간을 위해서 환경을 보존하려는 환경운동은 너무나 좁은 의미의 환경운동이며, 보다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몸이 하나라는 대전제 위에서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듯이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물이나 공기나 흙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운동 목표인데 그렇게 하려는 방법이 합리주의적인 방법으로 가능할까요?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오염된 환경은 오염된 인간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공감합니다. 자연이 오염된 것을 보고 자연에 대해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안타깝게 여겨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파괴된 환경을 회복하는 것은 내가 바로 서고 내 정신, 가치관, 마음이 깨끗해질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환경운동을 할 때 우리가 불편하게 살지 않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 물어 보면,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불편하게 살아야 환경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불편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삶의 이점은 두 가지 면에 있다고 봅니다. 첫째 소비를 줄인다는 것이며 절제 청빈하게 사는 것이기에  이것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환경 오염을 시키게 되는 자원의 소비를 줄이고 그로 인한 오염을 줄이기 때문에 우선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제가 가설로 가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삶이란 우리의 영성을 고양시키지 않나 생각합니다. 생태적 삶 생태적 영성을 고양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저는 일단 단순한 삶이 영성을 고양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생각해 봅니다. 저는 기독교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성프란치스코의 삶을 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그 분은 다른 종교의 성인들처럼 부자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으로 또 구걸(탁발)을 해서 수도를 하고 옷을 두 벌을 갖지 아니하고 그렇게 단순하게 살았는데 이를테면 먹는 것도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단순의 극치는 단식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그분은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이런 것에 있어서 대단히 단순한 생활을 했고 또 그 외의 많은 정신적 지도자의 삶이 그러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영성이 뛰어나니까 그렇게 산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단순한 삶 그것은 천천히 사는 삶, 의식주를 줄이는 삶 등 여러 가지로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심포지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한 삶이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과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제 저녁의 말씀 중에 자기가 행복하게 살아야 다른 사람도 따라할 마음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사회로 퍼져나가지 않을까 라고 말씀하셨는데 단순한 삶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구체적으로 단순한 삶을 본격적으로 실천해 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살자면 시골로 가서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논밭에서 기른 것으로 먹고 자기가 눈 배설물로 거름을 삼고 그렇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단순한 삶이란 자기가 기뻐서 행복해서 그것이 옳다고 확신해서 사는 삶이라고 보고 그렇게 살 때 아마도 옆의 사람에게 부러움을 사게 되고 또 이 우주의 기운과 맞으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나올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  회 : 다음으로 단체 내 실무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생태적 삶을 살아내도록 하고 있으며, 또 오늘 이 행사가 있기까지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의 유정길 사무국장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행사 진행으로 바쁘실 터인데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유정길 : 저는 환경 문제가 단순하게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복원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에제도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동안 우리가 살아 왔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시스템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 그리고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보고, 모든 게 양적으로만 평가하고, 물질적 가치만 중시하고, 무한한 자원을 먼저 경쟁적으로 쟁취하려고 합니다. 환경문제는 이러한 사회시스템, 즉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환경문제란 강하게 말씀드리면,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회시스템에 따른 삶을 폐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저는 개인적으로 불교 쪽에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에는 환경문제를 예수님, 부처님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 깨달았을지 모릅니다만 이제는 한꺼번에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예전 7,80년대에 사회운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만히 스스로를 생각해 보니까 과학적 사고를 하는 게 아니라 편협한 종교적 사고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이 표피적이고 관념적이고, 깨달음이나 영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유물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틴야칸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종이 한 장을 보니까 구름과 나무가 보이고 비가 보이고 태양이 보이고 무수한 산 속의 곤충들과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무꾼의 땀방울도 보이고 나무꾼을 먹이게 했던 부인과 아이들도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이나 마차도 보이고 제재소와 공장도 보여서 결국 인류와 생명들의 노력들이 종이 안에 뭉쳐 있는 것이고 수평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연관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어쩌면 우주의 역사가 그 종이 속에 깃들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종이 자체가 종이로 보이는 것과 우주의 에너지가 집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절약하고 아끼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러한 것을 통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물건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태어난 본분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쩌면 과거에는 종이 한 장에 구름이 있고 뭐가 있고 이런 말들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적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과학적 사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환경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성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면 추상적인 이슬 먹고 구름 똥 싸는 이야기라고 하실 지 모르지만 환경운동의 궁극이 결국 개인이 깨닫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도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환경문제는 개인이 결국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이고, 만약 개인이 풍요, 이익, 편리 등을 추구하고 도모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환경을 파괴시켜 온 경제과 이해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환경문제는 네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나아가 자연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나 자신을 살리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내 아내나 내 마음속의 계층 상승의 욕구, 이해관계를 도모한다거나 승리하고 이기려고 하는 관념을 내려놓아야 통합적 지식이 생깁니다. 저는 영성이나 깨달음을 통합적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모든 것들은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에서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을 보면 자기 분야의 전문성만 가지고 있지 통합적 통찰은 없었다고 봅니다. 어쩌면 나눌 수 없는 것을 쪼개어 전문가 중심으로 자기 분야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통합적 안목과 관점도 없고 그것이 환경문제를 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누어졌던 것을 통합하고 조화를 갖게 만드는 과정이 소위 생명 운동이 가지고 있는 과제 또는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에 스위스나 미국의 쓰레기 재활용하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인도 비하르주에서 학교 병원 일을 하고 있는데 제가 작년에 갔을 때 문화충격을 겪었습니다. 캘커타 공항은 거의 간이역 수준인데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옷을 당기며 도와 달라고 달려들었습니다. 게다가 하우라 역이라는 큰 역이 있었는데 그 역이 서울역의 3,4배는 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다 누워 있고 기차 레일을 보니까 똥,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느꼈던 것은 소가 어마한 공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시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개들도 눈치를 보며 도망가고 이러는데 소 돼지는 잡혀 먹일 가능성이 없으니까 유유자적하고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더 들어가서 인도에서는 소의 똥을 짚과 이어 벽에 붙여 짜기도 하도 끓여 먹고 난방도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스위스나 미국 같은 경우에, 잘 살면서 분리 수거도 잘하고 환경운동을 잘한다고 볼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환경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말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도의 경우를 보면 환경의 '환'자도 모르지만 어쩌면 전세계 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 미국에서 소비하는 화석연료 수준이 32% 가량 되고 전세계의 잘 살고 있는 20% 국가가 83%를 소비하고 그것 때문에 지구 온난화의 위기가 초래되는데, 만약 인도와 중국의 인구가 미국처럼 산다면 끝장날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 그들이 못나게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환경문제는 어떤 삶이 정말 나에게 행복일 거냐라는 정직한 자기 물음 그리고 주변의 반환경적인 요소를 거둬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자기 스스로가 친환경적인 삶에 대한 선택에 대해 정직하게 묻지 않으면 환경운동이 가지는 이중적인 자기 고통 때문에 괴로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환경운동은 궁극적으로 작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 운동가들 가운데도 의외로 활동비의 적고 많음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단체에서는 활동비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30만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20만원 이상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도에 비하면 못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잘사는 사람들의 넘치는 물질적 혜택을 받고 살거든요. 그래서 환경문제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기 밖을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환경적인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직한 자기 물음에 대한 해답을 갖고 그런 식의 삶을 찾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  회 : 생태적 삶에 대한 환경운동가로서의 정직한 자기물음. 이번 집중마당과 활동가웍샵을 통해서 해답을 찾고 각자 현장으로 돌아가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원불교도로서 천지보전회의 공동대표로 있는 박영석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박영석 : 원불교는 85년 전 전남 영광에서 만들어진 민족종교입니다. 박중빈이라고 하는 분이 창시하신 종교입니다. 일제시대와 6.25시절을 거치면서 꾸준히 한국사의 질곡 속에서 나름대로 교리적인 힘을 쌓아서 성장해 왔습니다.오늘날의 생태파괴와 순환구조의 단절은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와 물질적인 삶에 이끌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업입니다. 원불교는 바로 이처럼 뒤바뀐 정신과 물질의 가치를 제대로 바로 세우고 모든 유정 무정의 존재물들이 함께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전일적이고 생태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은 잘못된 물신숭배로부터 올바른 진리 신앙으로 잘못 길들여진 삶의 방식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사실적인 수행으로 그 길을 찾도록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불교의 존재 의의는 잘못된 문명구조를 참 진리에 바탕한 올바른 문명으로 나아가도록 함에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이를 위해 소태산(박중빈의 호)은 그 핵심 키워드로 은혜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와 세계의 관계는 은혜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은혜를 주고받으면서 존재의 기반이 되어주고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본다면 과연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은혜는 네 가지 은혜가 있는데 나라고 하는 존재는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의 네 가지 은혜를 통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천지는 우리에게 호흡할 수 있고 형체를 그 바탕 위에 의지하고 살 수 있게 해주며 그 밝음으로 모든 존재를 분별할 수 있게 해 주며 만물이 풍운의 혜택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산물로서 우리가 살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천지는 나고 죽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만물이 이를 따라 무한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이 몸을 주셨고 사람으로 자력을 얻을 때까지 키워 주셨으며 사람의 의무와 책임을 가르쳐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도하여 주심에 그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동포는 사농공상으로서 나에게 베풀어줌으로써 생활에 편리를 주고 또 나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금수초목들에 이로움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법률은 때를 따라 성자들이 출현하여 종교와 도덕을 세워 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시고 우리의 생활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방면에 걸쳐 온전한 규칙으로 보호하여 주고 우리를 징계하고 정의를 세워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여 모두가 평안히 살게 해 준다고 합니다.이 사은(四恩)에 대해 그 은혜 입은 바를 정확하게 알고 보은행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신앙의 생활이며 생명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만물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입니다. 즉 원불교의 사은은 진리에 대한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를 존재케 하는 네 가지의 은혜를 믿고 그에 보은하는 것이 진실된 신앙생활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불교에서는 곳곳이 부처님이요 일마다 불공 즉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표어로서 사은 신앙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희 천지보은회라는 명칭도 이러한 의미로서 지어진 것입니다.현대 문명의 위기는 이제 막다른 곳으로 올 때까지 왔습니다. 현재의 잘못된 문명 구조를 적당히 개조해서 버텨보겠다든가 계속적으로 발달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이 위기를 돌파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만 합니다. 이미 그 불길한 전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목격하고 몸으로 겪고 있으면서도 둔감해져버린 이 육신과 정신은 더 이상 아픔에 대해서 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파해야 할 신경조차 죽어버린 판에 썩은 발가락 하나 떨어져 나간들 뭐 대수겠습니까. 전일적인 영육간의 조화와 균형이 깨어져 버린 몸뚱이는 끊임없이 먹고 또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귀처럼 더 자극적인 것 더 맛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원불교는 이처럼 생태적인 위기는 우리 몸과 마음의 깨어진 조화를 되찾는 데서 출발해야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이를 위해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라고 하는 세 가지의 배움 즉 삼학(三學)을 그 수행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바쁜 물질 문명 속에서 마음의 수양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욕심에 집착하여 우주의 대소 유무와 인간사의 시비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욱이 이에 대한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삼학으로서 자기의 묵은 습관을 떼어내고 생활을 변화시킴으로서만이 전일적이고 온전한 정신을 가진 참 나로서 밝은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원불교에서는 더 구체적인 방법을 훈련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토론이나 강연 명상 등을 포함하여 모두 열 한 가지의 항시 훈련법이 있고 일정한 기간마다 법을 배울 수 있는 정기 훈련법이 있습니다. 이 훈련법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삼학을 균형있게 익힐 수 있도록 지도되어지며 일기법과 유문형대조법이라는 공부법으로 일상생활에서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바른 사리 분멸을 하고 정의로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시선 무처선이라고 하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다 라는 표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원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로 여기는 사은신앙과 삼학수행을 짧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각 종교에서 보는 생태적 삶을 논하는 자리라고 알고 왔습니다. 각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앙 수행의 방법이 어쩌면 근본적으로 우리가 당면한 환경운동의 출발점이자 기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과 짧은 일정으로 원불교의 모든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서로 종교라는 울을 넘어서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이처럼 각 종교에서 주장하는 생태적 삶의 대안과 실천방법들을 지속적으로 같이 모색해 보는 것이야말로 어떤 환경운동의 지식보다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종교마다 교리적 차이는 있겠지만 그리고 환경운동에 대한 저마다의 인식의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나와 세계는 하나의 생명이며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관의 한계를 넘어서는 깊은 정신적 가치를 세워서 모든 인류가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라 생각합니다.요즘은 누구나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세계관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이미 옛날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현만 다를 뿐 과거 부처님이 세우신 세계관이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세계관이나 모두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수행하며 참된 생태적인 삶을 모색해 가는 연대적인 삶 이것이야 말로 어떤 외연적 환경 운동의 가치에 우선하는 것이며 그 출발이자 우리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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