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회 : 제가 종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 종교들에 담겨있는 생명사상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생태적 삶 내지는 환경운동의 기본이 되는 이념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생명사상들을 제대로 살아냈다면 세상이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서강대 수도자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는 문영석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가톨릭에서 보는 생태적 삶에 대해 듣겠습니다.

문영석 : 환경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요즘은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의 치유는 환경공학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환경공학이 많이 발전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환경파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환경공학의 발전속도가 산술급수적이라면 환경파괴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입니다.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염된 다음에 그것을 정화하려고 하기보다는 극도로 향락과 소비를 충동하는 문화적 행태를 교정하고 그런 문제에 경종을 가함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치유를 도모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나 태도를 바꾸지 않고 계속 지구를 오염시킨 다음에 이것을 치유하려고 하면 고통스럽고 돈도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환경신학은 이제 우리가 그 지구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태도를 바꿀 것인가, 우리가 그 동안 자연에 대해서 바라보던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저는 우리나라에 근본적으로 환경문제가 보다 더 가속도화 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단체들이 여기에 가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교육을 할 때 보십시오. 여러 가지 우리에게 공포심이나 그 경각심을 일으켜주는 무시무시한 데이터를 보면서 나도 좀 분리수거도 열심히 하고 덜 지구를 오염시켜야지 하는데도 그것이 실제로 행동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불편하니까 얼마 있지 않아 그 태도가 시들어 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실종되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그 태도를 항구적으로 뒷받침하고 가속도화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결부시켜 주어야 하겠습니다.요즘 환경신학에서 지구는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지구를 파괴할 때에는 하나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못박히셨지만 이런 신학적 논리를 생태계에 적용시키면 오늘날 우리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예수님을 다시 못박게 하는 것이다 라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나오는 이야기로 귀착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행동과 실천들에 종교적 의미를 결부시켜 줄 때 그 운동이 보다 더 항구적이고 실천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돈 많고 사람 많고 조직도 잘 된 곳이 종교단체입니다. 만약 종교단체들이 환경문제에 눈을 뜨면 전국의 수많은 환경단체들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금력이나 인원 조직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아직도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환경문제를 절실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세 가지 수준 즉 영적 수준, 심리적 수준, 육체적 수준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영적 수준, 심리적 수준, 육체적 수준이 한 인간 안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영적인 수준에서 볼 때 인간은 무의미한 삶은 견딜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 자기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추구합니다. 종교의 기능은 그래서 삶에 의미를 던져 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에 있어서의 의미, 거기에 종교가 영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줌으로써 우리의 삶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환경신학에서는 현대 환경의 위기는 영적인 빈곤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사회가 외경심이나 신비주의를 잊어버릴 때 우리의 삶은 진지하지 못하고 경박하고 무미건조한 삶으로 됩니다.

지난 300년 동안 서구의 사조를 이끌어 온 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신비주의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11세기부터 14세기이며 유명한 신비가들이 그때 영향력을 끼쳤던 저술들은 다 한결같이 자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생태신학자는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귀가에 스치는 바람결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아름다운 꽃에서 하나님의 영화를, 그 모든 자연 만물 아래서 하나님을 느끼도록 이끌어 갑니다. 모든 예술가들은 어떤 흔적을 남깁니다. 화가는 낙관을 하고 서양화가는 싸인을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예술가는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 또한 자신의 흔적을 온 세상 가운데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생태 영성을 추구했던 많은 신비가들은 자연 안에서의 미세한 움직임 아래서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와 더불어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그리고 우주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신비적 세계관에서 기계적 세계관으로 바뀜으로써 이전의 세계관에서는 삼라만상이 신비하게 느껴졌다면 이제는 삼라만상은 비활동적인 물질의 복합체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목적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자연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고 또 착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생각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자연이 죽으면 종교도 죽습니다 왜 서구에서 그리스도교가 망조가 들었는가? 사실 서구에 가면 교회는 아주 형편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몰락의 원인이 사실은 그들의 정신사에서 자연을 소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그때부터 종교도 그리스도교도 그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밤하늘의 찬란한 창공을 보면 광대한 우주를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신비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서울 하늘에서 밤 하늘은 보기 힘들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형광등뿐입니다. 거기서 신비감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밤 하늘을 보십시오. 이 우주 창공의 별을 볼 때 신비감을 느끼고 이것이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신비감이 사라져버리면 신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오늘 서구 유럽의 교회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심리학적 수준에서 보면,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욕구불만이라든지 불안, 적개심이 환경파괴를 야기한다고 합니다. 환경심리학은 환경파괴의 깊은 실증이 인간을 형성한 계기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환경파괴도 인간의 무의식적인 필요나 욕망의 투사, 예를 들면 불안이나 적개심에서 발생되었다고 봅니다. 아이들의 잘못된 성장과정과 교육이 환경파괴를 유발시켰다고 봅니다. 인격의 분열은 자기파괴로 이어지고 곧 환경의 파괴로 확산됩니다. 이처럼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생태계파괴는 인간성의 파괴를 불러옵니다. 오늘날 이렇게 무참히 짓밟힌 한국의 상황은 정신 상황의 현주소입니다. 바로 인간은 반드시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드러냅니다. 파괴된 자연환경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정신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EQ(감성지수)가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IQ(지능지수)가 좋아도 EQ가 낮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다음은 육체적인 수준입니다. 우리가 하루 중 제일 많이 마시는 것이 공기입니다. 두 번째는 물입니다. 적어도 하루에 1인당 2리터는 마십니다. 세 번째는 음식입니다. 이렇게 자주 먹고 마시는 것들이 건강해야 우리가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극도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신문에 "가족들 해치는 공해, 엄마가 파수꾼"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분이 서울 근교에 사시는데 주위에 숲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살충제를 살포해서 이 아주머니의 수험생 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건강한 딸애가 겨울 방학 때에는 괜찮다가 봄 여름만 되면 시름시름하다가 특히 고3 초, 봄에 심했다는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왜 새 소리가 안들리냐" 라고 물었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 시의회에 확인해 보았더니 살충제 예산이 계속 증가해서 99년에 2배 가까이 뛰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좋은데 벌레는 싫었던 겁니다. 환경전문가들에게 물었더니 반신반의 하며 이사를 권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인구의 10-15%가 환경성 질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숨결로 불어 넣으시니 생명체가 되었다 말씀으로 갈음할까 합니다. 신토불이는 적어도 3400년 전에 이야기 되었습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습니다. 흙과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성서는 이야기합니다. 시편에 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과 나를 둘러싼 지구의 건강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

사  회 :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 인간의 영적 심리적 육체적 건강함을 도모하는 것이 환경운동이라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다음은 본래 예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생태마을에 관한 집중마당에 초청되어 오셨다가 저희들의 초청에 흔쾌히 응해주셨습니다. 어쩌면 저희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생태적 영성을 가장 잘 살리며 살아가는 분들은 땅을 보듬으며 농사짓는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무주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계신 허병섭 목사님의 말씀이십니다.

허병섭 : 제 집사람과 제가 농사를 지은 지 5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집사람은 대단히 감성이 풍부합니다. 본래 서울 깍쟁이인데 저하고 시골에 처음 내려왔는데도 생태적 감성이 저보다 10배는 더 합니다. 그래서 집사람들 통해 많이 배우고 느끼게 됩니다. 저는 신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상당히 분석적이고 비판적이고 또 캐고 들어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유기농이나 기계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그대로만 하면 실패도 없고 수확도 그런대로 되어 먹고 살 만한데 저는 제 식으로 해 보곤 합니다. 그래서 실패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금년에는 4년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대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수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지금 여러분들께서 제 말을 들으시면서, 집사람이 훨씬 생태적 삶 생태적 영성에 가깝고 저는 좀 타락한 느낌이 드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뭔가를 탐구한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관찰을 통해 생각하고 명상을 합니다. 그 태도를 통해 논문을 쓰거나 토론을 하는 차원의 발견이 아니라 신비적인 그 무엇을 관찰하게 되기도 하지만 솔직히 관찰한 그것을 글로 써서 제가 직접 보았을 때 기존의 과학적 체계와 기준에서 보면 유치하기도 하고 상식 이하로 생각되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말에 연연해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저는 벼농사를 하는데 처음에는 우렁이농법, 그 다음에는 태평농법을 했는데 아주 실패를 하다가 금년에는 오리농법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벼의 생명성을 배웁니다. 그것을 나와 똑같은 생명체로 생각하고 내 형제, 친구, 스승으로까지 생각해 봅니다. 자기 훈련의 과정을 하는 것입니다. 탐구를 한다, 명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몰아넣는 과정에서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이고 농학적인 입장에서가 아닌 모든 과정들을 하나의 생명체의 움직임 내지는 활동으로 보고자 노력합니다. 모를 심었는데 다섯 포기가 나서 분열하는 과정을 생물학적 지식이 아닌 생명의 활동성으로 보고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라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신음과 고통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농사의 과정이 그런 과정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유기농을 한다, 무공해 농사를 한다, 건강한 먹거리 농사를 한다 라고 보실 수 있겠지만 사실은 생태적 영성이라든지 생태적 삶을 추구하고 탐구하기 위한 저의 노력을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농사라는 것은 모든 농작물을 생산하는 직업이 아니라 제게 있어서는 생태적 삶을 위한 노력인 것입니다. 그럴 때 명상의 다른 면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생태적 삶일 것이며 생태적 삶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생태적 삶이란 친환경적, 환경지향적 또는 친생태적이고 생태지향적으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이기에 결코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공동체로 말하면 생태공동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친환경적 공동체를 모색하고 있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목회를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가 아닌 자연 생명체를 위한 목회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목회하는 데 돌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자기를 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생명체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자연 생명체의 생명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을 저는 '노동'이라고 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 진지한 활동과 움직임이라는 복합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산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인 것입니다. 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동적인 것에서 생명력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고 싶고, 노동의 관점을 생명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노동에 참여함으로 생태계를 보존하고자 합니다. 어찌보면 제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사회의식, 가치관, 심리적인 변화와 발전 등은 서구문명의 사회질서를 그대로 체득하고 그것에 오염되어 살아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 '나'가 아닌 것입니다. 노동을 하는 그러한 삶을 살 때 생태적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그것이 저의 꿈이며 희망인 것입니다. 생태계를 생명부양계라고도 하는데, 생명의 개념을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정치, 경제, 교육, 문화에 풀어내서 그것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여기서도 가능하리라 봅니다.우리가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이 시골에 가서 산에 쳐박혀서 혼자 신비를 체험하며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태적 삶 그것을 통해 새로운 역사관, 가치관, 인생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문제를 토대로 해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아주 지협적이고 부분적인 토대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다소 불안하기도 합니다. 제가 바라보는 생태적 삶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받고 영성을 계발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자체가 생태공동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  회 : 노동을 통해 자신과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을 일구어가는 목사님의 실천이 이 사회 속에서 널리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 사무국장이며 도시생태연구소 소장이신 박병상 선생님께서 이 자리에 와 계신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학자이자 환경운동가로서 '생태적 삶'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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