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깨달음, 마음의 생태학

사    회 : 유미호 /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획실장
주제발표 : 보  수 / 정토수련원 상임법사, 깨달음의 장 안내자

내가 숨쉬는 데 일체 의도도 하지도 말고, 내 생각에 일체 의도도 하지 말고 그냥 호흡이 들어가면 들어가는 데로 나가면 나가는 데로 명상해 보겠습니다. (명상) 예, 잘 됩니까? 명상하시면서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에 외에 딴 생각 안 하신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없으십니까? 밖에 박수소리도 나고 그랬는데, 물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못했습니까? 물소리 들으신 분 손들어보세요. 시끄러웠죠? 요번에도 물소리도 안 듣도록 호흡에 집중한 번 다시 해보겠습니다. 따른 사람이 떠드는 건 물론이고, 밖에서 나는 물소리도 안 듣도록 해보겠습니다(명상).

요번에는 밖에 더 시끄러웠습니까? 물소리도 안 들리게 잘하셨어요? 물소리 들으신 분 손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들으신 분. 안 들렸던 물소리가 들렸던 분 있습니까? 듣지 말라는데 왜 들으셨습니까? 들어라 하면 잘 안 들리고 듣지 말라하면 듣게 되는 마음이 있죠? 그건 내 뜻대로 잘 안됩니다. 우리가 내 마음 내 마음 그러는데 내 마음 니 마음 내꺼 니꺼 구분한다는 것은, '내'라는 것은 어쨌든 내 뜻대로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너 나를 좋아해야 해 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거 아니잖습니까? 그쵸? 왜. 내 마음이니까! 우리는 이렇게 내 마음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 마음이라는 것도 내 뜻대로 될 때가 많습니까? 안될 때가 많습니까? 안될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왜 내 마음이라고 그럴까요? 참배하죠(?). 지 뜻대로 안될 때가 더 많은데, 내 마음 대로라고 그럽니다.

오늘의 주제가 영성, 깨달음, 마음의 생태학 저한테 주셨는데. 솔직히 말하면 영성도 깨달음도  마음도 생태학도 솔직히 잘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어떠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주관을 전제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다 생각이 들어요. 요즘 영성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계신데, 제가 이렇게 얘기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기에는 조금 후에 토론할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만 영과 혼 중에서 영혼에서 혼은 인간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이익 중심적이고 또 사회에 의해서 길들여지는 것 저는 그것을 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은 그것과 관계없이 주변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주님의 뜻에 따라서 자기 아집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영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어요. 나중에 틀렸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라고요. 그래서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대나 어떤 특정한 사회나 특정한 계급이나 또는 특정한 이익집단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영성이라 한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영성을 지켜 나갈 때 개인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또는 대립적이고 상호 공급적인 이 사회가 바뀌어 나갈 수 있지 않겠나 이렇게 저는 생각하고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저를 볼 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보입니까? 제가 아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특별한 상태나 경우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연동진씨 이분 이대로 보는 것. 유미호씨는 유미호씨대로 보게 만드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남자다 여자다 직업이 어떻다 외모가 어떻다 재산이 어떻다 이렇게 사람을 볼 때에 그 사회에서 길들여지고 습관 되어진 고정관념으로 많이 본다고 하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있는 그대로 본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다른 사람과의 이견이 있겠습니다만 영성과 다르지 않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이란 것은 우리가 좀 전에 봤듯이 생각은 어떻습니까? 생각은 교육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 하면 이론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을 들으면 생각은 금방 바뀝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2시간 동안 제 얘기를 듣고 나면 특히 전하고 어떻겠습니까? 무엇인가 바뀌겠죠. 아 참 좋은 소리 들었다. 이렇게 논리가 바뀌거나 쓸데없는 소리 들었어 이렇거나 이렇게 생각은 금방 바뀝니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도 바뀌기는 하겠지만 논리적이고 옳고 그른 것과 별로 관계가 없다. 우리의 생각은 보통 일반적인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중심으로 추구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옳게 하려고, 그렇지 않나 생각해요. 그렇게 되기 위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은 두 번째 문제고, 현재 우리 나라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나. 여기 계신 분들은 더욱 그럴테구요. 특히, 운동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자기 체계를 가지고 있죠. 가치관이 일반적인 다른 분보다 명확하죠.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에 별로 관계하지 않아요. 이것은 주로 자기가 좋고 싫은 것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습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감성이라고도 얘기하는데, 감성은 마음의 한 부분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 중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을 할까말까 고민하잖아요? 고민한다는 것은 무엇과 무엇이 부딪친다는 겁니까? 내 생각은 어때요? 해야죠 당연히~! 특히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안 하면 어떡해! 딴 사람 아내도 나는 해야지 하는 옳은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한쪽에서는 어떻습니까? 꼭 그래야만 하나. 내가 아니어도 하는 사람 있는 거 같은데! 또는 한 시절 열광적으로 했던 어떤 선배들이 후회하고 힘들어하는 꼴 보면은 꼭 옳은 것만 아닌 거 같은데 하는 한쪽의 유혹이 있다 .그것을 뭐 한쪽을 천사표와 한쪽을 사단표로 분리하기도 합니다만 우리 의식을 가만히 보면 이것은 뭐예요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보통 얘기하죠.

감성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러한 흐름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논리적으로 올바른 것 때문에 올바로 산다고 하면은 누가 가장 올바로 사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대학교수 일거란 말이에요! 또 종교인들이 있겠죠. 그런데 사실은 종교인들 중에서도 그렇게 사신 분들도 있고 그렇게 사시지 않은 분들도 있겠죠. 자기 아집이나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자기 종교를 팔아먹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교수들도 마찬가지이겠죠. 그러나 무지몽매하다고 얘기하는 학벌이 낮은 사람이나 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 그렇게 바르게 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의 생각과 논리체계도 일하다 보면은 효율적인 일을 위해서 필요하지만은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마음의 구조를 잡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저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영성과 깨달음 그리고 마음의 생태학이라고 얘기했던 것은 우리 마음이 생태학적으로 굴러갈 때 그것이 영성을 구할 수 있고 깨달음을 구할 수 있지 않나 저는 이해했고 그런 취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시간쯤 말씀을 드리고요 의문이 있거나 다른 의견을 있으면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표출되지 않는 내면, 보이지도 않지 않습니까? 누가 끌어내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내가 움직이려고 해도 마음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마음인데 생태라는 개념은 요즘에 인간들만이 아니라 생명들만이 아니라 지구전체 더 나아가서 우주전체의 모습을 대상으로 쓰는 얘기인데 그것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구조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생태적이라는 것이 특별하게 어떤 이 세계에 있는 것과 다른 어떤 모습이 아니라 서로 조화로운 모습이 아니냐! 서로 상생한다고 하지요? 서로를 살릴 수 있는 그렇게 서로가 자기 역할을 맡아서 마치 우리가 지렁이나 구더기나 이런 모든 것들도 전체 생태계속에서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조화로운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가장 개인에게 깊은 지극히 개인적인, 둘이 있어도 마음은 다른데 생각은 비슷할 수가 있어도 마음은 다른데, 개인에게도 표출되지 않은 지극히 깊숙한 것과 전 우주를 통으로 하는 개념이 함께 되어 있을까! 저는 그것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마음의 생태학이라는 문제는 내 마음이 조화로울 때 생태적일 때 나와 전체 생태가 서로 무리 없이 조화롭게 이룰 수 있고 이렇게 해 나갈 때 그것이 영성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길이 아닌가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여기 밑에 써있는 명상과 달라요. 여기 있는 명상과. 명상은 보통은 현실을 떠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

주로 인간의 심성을 추구하는 것이 더 많이 들어가는데 현대사회 속에서는 크게 인간의 물질적인 이익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회구조가 있고 또 인간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구하는 그러한 구조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정치, 경제, 이러한 이익사회이고. 정신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꼭 종교만 있겠습니까만은 많은 경우에 종교적이기 위해서는 현실에 관여를 좀 덜해야 된다는 생각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알게 모르게. 불교도 그렇고 카톨릭 신부님들도 보다 집중적인 명상을 하시는 것을 알고 있는데. 현실과 종교는 좀 분리된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많이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명상도 그런 의미에서 현실적인 삶에서 잠시 물러나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명상이라고 하고 있지 않나 저는 봤어요. 그런데, 소위 명상이라는 것이 각 종교마다 각 수행방법마다 각 문화체계마다 다르긴 하겠습니다만은 제가 알고있는 명상이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 그런 상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명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돈이 있으면 견물생심이라 해서 욕심이 일어나는 것 그때 돈에 흔들리지 않는 삶. 또는 외부인 타인에게 흔들리지않는 상태.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얘기를 많이 합니다. 또는 주장하기도 하지요.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 위해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관하고자 많이 하지요. 내가 받을 고통을 전가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죠. 돈줄 테니 해! 또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권력의 힘으로 해! 이렇게 시키죠. 이렇게 우린 남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도 하고 내가 아껴 쓸려고 하고 또, 꼭 당연히 해야 할 것만 알 것이 아니라 내가볼 때 상대방에 문제가 있다. 바꿔라! 이렇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너 이렇게 바꿔야돼! 안 그러면 안돼! 이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그 사람을 지배한 거 같지만. 그 순간 나의 삶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왜, 넌 이렇게 해야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돼! 하는 순간 그가 내 뜻대로 하면 내가 즐겁고 그가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괴로워지겠죠. 우린 소유관계에 대한 것을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괜찮다가 연애할 때 그런 거 많이 하잖아요 넌 내꺼야! 이런단 말이에요. 내꺼야 하는 순간 이 사람의 삶은 내 소유가 되는 거 같지만 오히려 나의 삶은 이 사람에 의해서 좌우된다. 전에는 이 사람이 미니스커트를 입던 바지를 입던 머리를 길게 하든 짧게 하든 관심이 없었는데, 내 꺼야! 하는 순간부터는 내 뜻과 다를 경우에는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상황에 흔들립니다. 내 행복을 주변상황에 갖다 놨죠. 내가 소유하고 바라는 게 많아지면 마치 무엇과 같냐면 이런 예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낚싯줄을 내 코에 탁 끼어서 이 사람에게 갖다 주고 너 살살 움직여 알았지? 너 앞으로 걸을 때 조심히 걸어야돼. 이렇게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 모르는데 내가 탁 끼어놓고 너는 앞으로 조심해서 걸을 꺼야 하구 뒷주머니에 껴놓습니다. 이 사람은 모르고. 그 다음부터는 나는 어때요. 이 사람이 뛰면 나는 마치 노예처럼 끌려 다닙니다. 이렇게 주변 조건에 의해서 내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이 좌우되지 않는 것을 저는 명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주변 조건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안되잖아요. 남보다 더 안되죠. 남은 두들기고 총을 갖다되면 하는데. 내 마음은 마음대로 안 된단 말이에요. 주변상황에 좌우됨에 따라서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지 않는 것. 더 깊이는 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난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데, 난 이런 마음먹어야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거기에 좌우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 그것을 저는 명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나갈 때 영성과 깨달음과 가까이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의 생태학이라는 것은 주변의 나와 다른 사람의 움직임 거기에 내 행복이 흔들리지 않는 것. 또 내 이성적인 뜻과 다르게 움직이는 내 맘의 움직임에 내가 불안해하지 않고 담담해 할 수 있는 삶. 그것이 마음의 생태학이 아닌가. 이렇게 나갈 때 영성과 깨달음과 가까워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주제가 워낙 커 가지고 제가 구체화된 이야기보다도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제 나름대로의 결론이 나온 거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생태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에게도 그렇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 즉, 객관적인 사회, 정치, 경제, 사회문화구조를 바꾸겠다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다. 띠별로 아까 소개를 하니까 정말 가축 적인 분위기더라구요. 과거에 많이 운동을 하고 목숨 바쳐서 몸에 분신을 마다하지 않는 수많은 분들이 계셨는데 지금은 그분들이 많이 그만두셨다. 그게 왜 그럴까? 저는 그 움직임의 동력을 외부에서 찾았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외부에서 외부의 조건이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 내 삶의 동력을 찾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그분들의 삶은 더 이상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할 수 없이 맑고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또 한 편 가슴이 아픈 것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 분들이 지금은 어떤 분은 자책을 하는 분도 계시고 후회를 하시는 분도 계시도.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렇게 된 근본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운동을 해 나가는 삶의 동력이 마음의 생태학에 두지 않고 대상이 바뀌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 이론적인 체계 속에서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운동을 해 나가면서 항상 대가를 바란다. 대가라는 것은 객관조건이 바뀌는 것이 첫 번째로 있고. 두 번째는 너 참 괜찮은 일을 한다. 니가 있으니까 세상이 밝아져. 이런 위로를 받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면 명예욕구이다. 그것이 정치하는 사람이나 다른 명예인들과는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마음속은 같다. 그래서, 운동을 하면서 참는다 참어. 현재는 힘들어 이리 사는 것은 힘들지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멋지게 산다.

그래서, 야! 같이 살자. 이러면 난 그렇게 못혀. 왜! 괴롭잖아! 저는 소위 80년대에 운동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60,70,80 연대에 90년대 초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진실을 주장하고 투쟁하고 그러면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일깨우는 것을 중심으로 했지요. 정보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습니까? 웬만한 정보는 다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문화가 바뀌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주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산다. 모범적으로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온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저는 그런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전에는 이일을 하면은 감방 가겠지만, 그거 뭐 하지. 이렇게 나서서 함으로 인해서, 의기소침한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보였다. 지금도 자기 삶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는 사람을 보고 모범적으로 느껴서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근본은 뭐가 달라야 하나. 전에는 그 삶을 참았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사회가 이러니까 역사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대중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 이렇게 참았다. 근데, 그 때 정말 누가 좋아서 그 일을 했나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린 그때 일하시던 많은 분들이 이론적으로는 머리 속에 있지만 마음으로 부담이 있고 힘들지만 참는다. 정말은 누가 좋아서 그런 일들을 했나. 지가 좋아서 했다. 누구도 시키는 사람도 없었고. 의무감 있으니까 해야돼, 간혹 선배가 그러긴 하지만, 정말은 내가 좋아서 이일을 했다. 좋다는 게 까르르 웃고 좋은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 개인의 이익을 챙기고 사는 것의 장점 그것의 강점, 또 내가 이렇게 남들이 볼 때 어렵게 사는 삶을 살 때의 장점, 또 단점 다 보고 결국 선택하지 않습니까? 저는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한다. 근데 그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으로 종교인의 사명을 갖고 어쩔 수 없이 한 것으로 역사의 지시이기 때문에 한 것으로 생각을 하지요.

난 이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 시대에 어떻게 하는 것이 생태학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정말 이일을 내가 좋아서 하는 마음이 필요한가. 싫은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가 흔들림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름대로는 다 계산해서 기쁜 마음으로 할 때에, '야! 너 힘들지, 아니 재미있어 얼마나 재미있다고!' 말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쁨으로 사는 자기의 삶이 보일 때 함께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누구도 '야! 힘들고 부담가지만 참자!' 이렇게는 안 된다. 저는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있어도 오래 못 간다. 그것은 운동을 많이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기 삶의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개인적인 삶이 아니라 전체적인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그것을 나는 생태적인 삶이라 생각하고 사회에서의 소비문화에 이끌리지 않고 가능하면 필요한 만큼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고 남는 건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갖는 삶. 이 삶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삶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삶의 자세가 저는 명상이라 생각을 하고 그래야 갈등이 없을 거다. 그것이 마음의 생태학에서 사회만 생태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상의 구조도 문화도 그렇게 조화로운 그리고, 정말 내가 했던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그것이 영성을 찾는 길이고 깨달은 길이 아닌가 저는 생각을 합니다.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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