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의 대화

                              이현주

감수성 회복이라고 하는 제목을 걸으셨네요. 저 제목이 암시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감수성을 잃어버렸던지, 아니면 멀리 떠났던지… 그렇다는 고백이지요. '다시 돌아가자' 또는 '감수성을 다시 찾자'는 그런 얘기란 생각이 드는데, 동감하십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는데,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감수성이 무뎌지고, 합리성을 따라 따지고 분석하고 … 느끼는 것보다는 머리로 인식하는 그런 기능이 많이 발달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몇 년 전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일출을 바라보게 되었어요. 마침 저녁 때였지요. 해가 지는데, 차창 너머로 붉은 해가 보이는 겁니다. 황혼의 해는 더 크지 않습니까? 그게 바알갛게 떠있는데, 정말이지 "야~!" 그랬습니다. 제가 '와'하고 감탄을 하니까 제 앞에 있던 사람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뭔가 하고 전부 창 밖을 쳐다봤어요. 제가 아마 너무 크게 "와" 했나 봐요. 전부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가지고, '뭐 아무 것도 없잖아' 이런 표정으로 저를 쳐다 보더라구요. '별 이상한 인간 다 봤다'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저런 광경을 보고, 왜 감탄사가 안 나올까? 맨날 봐서 그런가?' 사실 우리가 맨날 본다는 것도 인식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냥 첨보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사실 첨 뵙는 것이거든요. '저 사람 내가 많이 전부터 관계해서 알지' 이 생각 때문에 진하게 못 만나요.

촌놈이 한번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갔는데, 비행길 타면 저는 지금도 창가에 앉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그 자리가 잘 안 나와요. 그 날은 어떻게 재수 좋게 창 바로 옆 자리는 아니지만 그 다음자리에 제가 앉게 됐어요. 옆엔 누가 탔구요. 그런데 비행기 창은 작지 않습니까? 그 기술로 창문 크게 못 만드나. ^-^ 그래서 그 감질나는 창문 밖을 내다 보는데… 아, 이 양반이 뭐 그렇게 볼 게 많은지 신문 16면을 이렇게 해서(높이 올려서) 낯낯이 보는 거예요. 그냥 좀 내리고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신문에 가려 가지고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도 빈틈을 찾아 가지고 보는데, 그날 따라 재수가 좋았어요.

구름이 굉장히 많이 끼어 있었거든요. 아마 밑에서 올려다 봤으면 그냥 흐린 날이었을 거예요. 구름이 꽉 꼈으니 … 근데 위에서 보니까, 구름 위에서 보니까 그 구름이 하얀 목화송이 같은 거 있죠. 밑에서 봤으면 하얀 그 구름이 어두컴컴하게 보였겠지만. 위에서 햇빛과 함께 보니까 아주 황홀해요. '제가 언제 또 저런 걸 보랴' 하고 열심히 보는데 … 아, 이 아저씨가 계속 신문을 보고 있더라고요. 저는 구름이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엄청난 것인지 그 때 처음 봤어요.

구름 위에서 구름을 본 것은 그게 처음이었죠. 맨날 구름 밑에서만 보다가. 위에서 보니까 아~ 뭐라 말로 형용이 안되요. 우리는 그걸 자꾸 말로 하려니까 '감'이 자꾸 죽어요.

여러분도 혹시 산에 가시거나 그런 아름다운 광경을 보시게 되면은 그냥 '허~' 그러면 됩니다. 입 딱 벌리고 그냥 보시면 되지요.

전, 아주 놀라운 광경을 봤어요. 어찌어찌 하다 주변을 둘러 보았는데, 'Oh, my God', 한 사람도 안 봐요. 창 밖을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 무슨 신문인지 거기에 코를 틀어박고 있거나 자고 있었죠. 놀라웠어요. '야~ 대단한 인간들이구나. 왜 이렇게 됐을까?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데, 눈을 감고 있다니. 어쩜 이토록 무감각해져 있을까?'

사람이 머리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머리가 하는 일과 가슴이 하는 일은 종류가 다르죠. 그런데 우리는 가슴으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으면서,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아이 때부터 머리로 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해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머리를 많이 쓰니까 좋아지는지 모르지만, 가슴은 아주 빈약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 이런 것을 공감하시는 분들이 '감수성을 회복하자'는 이런 생각을 기특하게도(?) 한 것이겠죠. 물론 그것도 머리가 생각했겠지만요? 머리도 참 쓸만합니다. 머리를 제외시키면 안되죠. 사실 여기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광고를 보시고 머리로 동감하여 오신 분들이잖아요.

아이가 학교에 결석을 했는데, 그 다음날 선생님이 "너 왜 결석했냐?" 그랬어요. 이 순간 어디가 아프다든가 하는, 소위 합리적인 - 납득이 갈만한 이유를 대면 통과하는 거예요. 근데 이 아이 대답이 "오기 싫더라구요." 괜히, 오기 싫었다. 그러면 죽어나는 거죠.

"너 왜 그랬니?" "글쎄, 나도 모르는데 하기 싫어요." 이런 변명이나 이런 이유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사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drdo Boff)라고 하는 해방신학 하신 분이 계셔요. 그 분이 쓰신 책 중에 우리말로 '정 그리고 힘'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있습니다. 해방신학자의 눈으로 본 성 프랜치스코의 생각과 삶이 담겨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랜치스코는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보프는 가슴에서 하는 것을 '파토스'(pathos), '정'이라 보았고, 머리로 하는 것을 '로고스'(logos)라 보았어요.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삶을 이끌어나가는 두 개의 큰 힘이 있는데, 로고스와 파토스가 그것입니다. 로고스가 결정하는 것을 파토스가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파토스가 주이고 인식 기능이 보좌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먼저 생각하고, '이렇게 해야 돼' 하는 것을 몸뚱이가 따라가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요. 그게 잘 안 되어서,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내 몸뚱이가 따르지 않아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프랜치스코는 가슴이 주가 되었던 분이었습니다. 가슴에 거하는 힘은 불입니다. 심장이 있어서 덥지요. '머리는 차게, 가슴은 뜨겁게' 그러지 않습니까? 심장이 있고, 허파가 있고. 우리 안에 바람이 들어가서 산소를 마시게 되는 것은 산소가 없으면 불이 안타지 않습니까? 우리가 계속 불을 때야 합니다. 근데 이 불이라고 하는 놈은 내버려두면 저도 망하고 나도 망하는 것이에요. 열정이라는 것을 적당하게 절제하지 않으면 타버리기 쉽상이죠. 아궁이의 불은 인간이 볼 때 좋은 것이지만 산불은 곤란하잖아요.

인간 속에 있는 감정의 불도 적당한 제어 기능이 마비되면, 저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그런 이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프랜치스코는 아주 적절하게 로고스와 파토스를 견제하고 조절한 사람이다 이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하고는 좀 다르죠. 우리는 판단이 먼저입니다. 옳다. 그르다. 그래서 그 판단에 의해서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지요. 그런데 느끼는 것, '그것은 그런 것이다' 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 가슴으로 느끼는 것에 의해서 삶을 산다 하고 상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된다면 좀 혼란스러워질 거에요.

"너, 왜 그렇게 옷을 입었니?"

"그냥, 이렇게 입고 싶어서."

그냥, 우리는 '그냥'이라고 하면 잘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 동안 우리는 머리가 이끌어 가는 문명을 만들고 그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슴의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거예요.

오늘 저에게 주신 제목이 사물과의 대화, 그렇죠? 이제 거기에 대해서 제 경험이랄까 이런 것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질문해주시면, 또 말씀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 채워보겠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턴 그런 전통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으면 관뚜껑에다가 대체적으로 이렇게 적지요. '학생(學生). 이현주 관(棺)'.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목사보다 학생이 더 좋으니까. '학생 이현주'의 관이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학생이라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에요. 숨질 때까지 배운다. 참으로 아주 존중해서 부르는 말이에요. 대학까지 12년, 대학원까지 20년 가까이 배웠으면 됐지 뭘 또 배우냐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배운다고 함은 자기가 미완성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거에요.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이런 생각으로 산 사람이에요. 학생으로 살았다. 그래 제가 학생이에요. 저는 가끔 기도할 때 예수님께 '선생님!' 하고 여쭙습니다. 그러면 참 마음이 편해요. 내 그 분 보고 선생님 그러면 나는 저절로 학생이 되는 거에요. 내 맘대로 내가 그냥 학생이된 거에요. 그 분이 나를 학생으로 보든 안보든 그것은 이제 나하고는 관계없고, 그것은 그 분 사정이고 … ^-^

학생에게는 몇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몰라야 돼요. 모르는 놈이 학생이 될 수 있지, 아는 놈은 학생이 못돼요. 아무리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님이 오셔도요. 못 가르칠 종자가 있습니다. 뭘 가르치려 하면 다 알고 있어요. 그런 사람에겐 가르칠 게 없지요. 학생은 모른다, 모르는 것이 하나의 자본이에요. 모르는 것이 자랑까지 할 건 아니지만 그것이 있어야 돼요.

또 하나는 잘못해야 돼요. 잘못할 권리가 있고, 잘못할 의무가 있어요. 넘어져야 돼요. 학생이 선생님처럼 반듯하게 걸어가면, 선생님은 실직하지요. 자꾸만 뭘 잘못하고 실수하고 그럴 때 선생이 신난단 말이에요. 할 일이 있잖아요. 또 실수했네? 또 잘못했네? 그런 다음에 하는 말이, "학생이니까. 괜찮아."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특권입니다.

학생이 잘못하는 게 없으면 선생님이 할 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잘못하고 실수하고 이런 것들이 다 '학생'이라는 단어 속에서 보장된다는 것 아닌가요. 얼마나 편해요? 그래서 저는 가끔 예수님을 '선생님' 그렇게 부르면서 살아요.

근데, 어떨 때  선생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어요. 나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 있다.

'노자'란 책을 읽다 보니까 거기 힌트가 있어요. 뭐라고 그러냐 하면, 인법지(人法地)하고 지법천(地法天)하고 천법도(天法道)하고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인법지(人法地). 법은 동사가 되면은 본받는다는 뜻이니까 '인법지'(人法地)하면 사람은 땅한테서 배운다,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땅이 사람한테 선생이되는 거에요. 왜 그런고 하니, 땅은 사람을 낳았다는 거에요. 사람이 있기 전에 땅이 먼저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땅으로 사람을 만들었잖아요. 땅은 사람의 어머니다. 그렇죠? 자식이 어머니한테 배우는 건 기정사실 아닙니까? 어떨 때 학부모님 모임에 가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것에 관심들이 많아요. 그러면 제가 웃으면서 그래요. 아이들을 잘 기르려고 하는 그 정열과 시간의 50%만 양심적으로 잘라 가지고 본인들이나 좀 잘 사시오. 내가 아이들 앞에서 윤동주의 말처럼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그런 인격자로서 그렇게 살면 애들이 어디 갈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법지(人法地) 하는 건 사람이 땅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근데, 땅이 사람한테 정말 좋은 선생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 있어요. 땅은 도무지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아요. 워낙 인간들이 영재양성을 잘 하고 있으니까 그런 건지. ^-^ 제가 암만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요. 그저 제 할 일만 해요. 땅이 하는 걸 잘 보면 그저 뭐든지 받아 들여요. 개가 똥을 누어도, 사람이 침 뱉어도, 오줌을 깔겨도, 오염물을 떨어뜨려도 그거 다 받아들이지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쓰레기가 다 어디로 갑니까? 기가 막히지 않아요? 그러고도 풀은 또 새파란 싹을 키워내요. 그러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지나가면, '이 놈아, 나 좀 본받아라!' 이런 말 안해요. 그러니까 그 부모가 아이를 잘 기르겠다는 생각 접어두고 "넌, 니 멋대로 커." 그래 놓고 정말 내가 하늘 아래 열심히 살면 저절로 그 아이는 엄마하고 똑같은 그런 종자가 되지 않을까요. 전 그런 얘기를 가끔 합니다.

100% 하면 좋겠지만, 타협을 해 가지고 50%만이라도 자기를 좀 바꿨으면 하는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애를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빨리 빨리 … 그런 생각만 하지 말고, 내가 좀 부끄럽지 않게 살아 보자구요.

애들한테는 "야, 절대 거짓말하는 거 아니다." 그래 놓고 전화가 막 오니까 "엄마 없다고 그래!" 해봐요. 아이들이 헷갈려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는 말보다는 행동을 따라요. 아,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말은 말이고, 행동은 달라도 되는구나, 혹은 달라야 되는 거구나 하게 되죠.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사실 그러고 보면 부모가 된다는 게 아주 어렵고도 아주 쉬운 거에요. 제일 쉬운 거고 제일 어려운 거죠.

다음은 지법천(地法天)입니다. 땅은 하늘을 배운다. 왜냐하면 땅은 하늘에서 왔다 이거에요. 그래서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는 거죠. 천법도(天法道)다.

그리고 도(道)는 어디에서 본받느냐 하면 마지막으로 자연(自然)이에요.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스승으로 여깁니다. 자연은 도를 가르치고, 도는 하늘을 가르치고, 하늘은 땅을 가르치고, 땅은 사람을 가르치고. 이렇게 순서가 되지요. 결국 뭐냐 하면 사람은 땅과 하늘과 도와 자연한테서 배우는데, 최고의 선생님은 자연이다 하는 거죠. 선생님도 격이 있을 것 아니에요.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내 그릇에 따라서 선생님이 결정이 되는 겁니다. 유치원 때는 그에 맞는 선생님을 만나고, 중학교 때는 그 수준에 맞는 선생님을 만나고, 대학교 때는 그 수준에 맞는 선생을 만나야 잘 되겠죠? 내 그릇에 따라서 선생님의 격이 달라지지만, 최고의 선생님은 여전히 자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선생님 하면 사람을 떠올리지요. 사람만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사람은 사람한테 배우는 게 사실은 참 편해요. 돈이 좀 들어서 그렇지. 그 외에는 참 쉽습니다. 왜냐하면 자상하게 일러주거든요. 뭐든지. 요건 요것이다. 못 알아들으면 때리기도 하고. 그러니까 잘 배우지요.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이 큽니다. 제가 보기엔 잘못 배우기 쉽기 때문에 그래요. 왜 그럴까 생각하니까. 사실 사람은 사람인지라 선생님들에게 아집이 있어요. '요놈을 가르쳐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못 버려요. 그게 화근이 되죠. 자기 말 잘 듣고 자기 것 잘 받아들이는 놈은 '이 놈, 기특한 놈' 하고, 삐딱하게 하고 자꾸만 엉뚱한 소리나 하는 녀석은 '이 놈, 싸가지 없어' 하죠. 이것이 인간들한테 배우면 쉬우면서도 위험한 이유죠. 이처럼 사람한테 배우는 것은 쉽긴 하지만 잘못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큽니다. 선생도 한계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모를 수 있으니까요.

그럼, 자연한테 배우면 어떻게 될까요? 절대자연(絶對自然)한테서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늘 훈련을 하고 해버릇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4살, 5살 때부터 학교에 처넣고 가르치려고 해요. 배운다는 건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만을 말하곤 하지요.

"너 공부 좀 계속해야지." 그러면 "아니요, 전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요." 그런다구요. "내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꼭 아카데미 같은데 가서 배워야 배우는 거냐? 어딘가 아침에 가서 밤 늦게 와야 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게 무슨 공부입니까? 꼭 어딜 가서 학비를 내고 어떤 선생 밑에 가서 해야 공부다 하는 그런 의식이 꽉 차 있지요.

물론 자연한테 배우는 게 그렇게 용이한 건 아닙니다. 사실은 쉬운 것인데, 어렵게 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한테 배우면 이득(advantage)이 있어요. 첫째 학자금을 안내도 되요. 돈 한푼도 없는 놈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자연한테 배우면 말이죠. 그리고 아무 데를 가나 다 있어요. 선생 만나러 꼭 버스 타고 어디를 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눈만 뜨면 거기 있는 게 자연이니까. 언제나 배울 수 있는데다, 언제든 공짜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속을 염려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 자연한테서만 배운다면 속을 일이 없습니다. 물론 내가 자연을 설정해놓고 이게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그 놈한테 배우면 100번 속겠지만, 내가 만든 자연이 아니라 그것과 내가 만나서 배울 수만 있다면 속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연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신약 성경에 그렇게 나오죠? 전, 그 대목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겠구나. 그 분은 나를 향해서 사랑하는 것밖에 못하는구나. 참 병신이다. 다른 것은 못하니까. 사랑이니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연이란 것은 그것이 자연(自然)이기에 거짓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어요. 더구나 믿음직스러운 것은, 인간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욱 믿음직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살고자 해요. 자연이 주는 가르침은 학교나 집, 사회에서도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맨날 예수님에 대해서만 말하지, 예수님이 앉아계셨던 그 자연, 거기까지는 눈이 잘 안가나 봐요. 예수님이 걸어다니시던 길은 어떨까? 그렇죠? 나는 성경책을 읽다가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 '왜, 예수님이 변소가신 얘기는 없을까? 분명히 하루에 한번씩은 가셨을텐데….' 괜히 어렸을 땐 그런 게 궁금했어요. 사실 안 써도 되니까 안썼겠지만서도요. ^-^

눈은 언제나 사람과 그 사람이 한 말에 가 있어요. 신약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서 있는 땅. 주님이 저한테 그러시는 거에요. 나보다도 큰 선생님이 있다. 그 분은 자연이라 할 수도 있고, 네가 알아들을 말로 하면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도 내 맘대로 한 이야기는 없다. 전부 그 분한테 듣고 들은 대로 내가 얘기하는 거지. 내가 내 얘기한 거 없다. 요한복음에 누누이 얘기하시잖아요. 나를 보내신 이를 달리 부를 수가 없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나서부터는 사물(事物)이라는 건 사람의 손이 가서 만들어 꾸며놓지 않은 것, 하나의 자연이라 생각했죠. 그렇다면 그것,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을 통해서 들을 수는 없을까?

그래서 가끔 사물을 통해서 사물이 얘기해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이런 것을 보게 되었지요. 이런 것들이란 '사물과의 대화'라는 책에 적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언젠가 한번 배가 고파서 김밥을 다 먹고나서는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렸어요. 대체로 다 먹고나면 그러잖아요. 저도 모르게 남들이 부러뜨리니까 부러뜨리는 습관이 있었어요. 아마, 다시 못쓰게 하려고 그러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딱 부러뜨렸는데, 잘 안 부러져요. 그 순간 젓가락이 '왜, 부러뜨리려고 그러냐?' 하는 거예요. 착각이죠 '나를 왜 부러뜨리려고 그러냐?' 그러니까 나한테는 합당한 그 어떤 이유가 없잖아요. 멈칫할 수밖에. 쉽게 부러뜨렸으면 그런 생각이 안들었겠죠. 이게 잘 안 부러지니까 나무젓가락이 그렇게 얘기한다는 그런 착각을 할 수가 있었겠지요.

그 다음 얘기를 들어보세요.

'네가 날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왜 널 못 부러뜨리냐?'

'내가 누군지 알아?'

'너, 나무젓가락이지.'

'그건 네 생각이지. 나는 나무야.' 자기가 나무래요.

'네가 나무를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촌놈이 …'

어떻게 나무를 부러뜨릴 수가 있어요. 나무는 이데아, 관념이라고요. 이건 눈에 안보여요. 나무는 안보여요. 참나무는 보이고, 소나무는 보이지만 나무라는 것은 안보여요. 이런 것을 일컬어, 노자는 상(像)없는 상(像), 형체(形體) 없는 형체(形體)라고 얘기를 하지요. 있다고 그러면 안 보이고 만질 수도 없어요. 하지만 없다고 그래도 말이 안되잖아요. 나무가 있지 왜 없어요. 자기가 나무래요. 맞지요. 그거 '쇠' 아니잖아요. 그건 나무에요. 이렇게 해서 얘기를 하다가 사람도 그렇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나요.

또 어떨 땐 이런 적도 있습니다. 제가 어느 수녀원에 갔다가 밤에 모임을 마치고 숙소로 가는데 수녀원이라는 데가 가난해서 그런지 숙소로 가는 길에 가로등도 안켜 놓고 깜깜한 거예요. 더듬 더듬 숙소를 찾아갔죠. 돌계단 있는 데를 가는데, 대충 짐작으로 가는 거죠. 근데 그날 따라 어찌나 소변이 마려운지, 빨리 가서 용변을 봐야 겠는데 더듬더듬하니까 마음이 더 급했어요. 근데 어렴풋하게 현관 있는 데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얼마나 오지게 넘어졌는지요! 내가 돌을 하나 밟았거든요. 동글동글한 돌인데, 길 복판에 있었어요. 발이 탁 미끄러지면서 돌이 홱 돌아가 넘어졌지요.

한쪽 허벅지가 다른 돌에 찍혔나 봐요. 어둑어둑해서 방에 들어들가 보니까 바지가 찟어질 정도로 넘어졌더라구요. 허벅지 있는 데에서 피가 나왔어요. 밤에 자는데 계속 아팠어요. 약이 올라 그 다음날 해뜰 무렵 일어나서 '도대체 어떤 놈이냐?' 하는 마음으로 범인을 찾아 나섰죠. 그 돌을 찾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심문을 해야할 것 아닙니까? '너 땜에 꽝 넘어져서 밤새도록 내가 아팠다. 뭐라 할 말 있으면 좀 해봐라.'

돌맹이가 말을 합니까? 이때, 자연한테 배우려면 성급해서는 안돼요. 성급하면 못 배웁니다. 사람들은요, 그저 누굴 가르치고 싶어 안달을 내요. 그러니까 누가 묻자마자 대답을 하죠. 어떤 경우는 묻지도 않았는데 막 얘기하기도 해요. 근데, 자연은 안 그래요. 될 수 있으면 안 가르쳐 줘요. 될 수 있으면 말 안 하려고 해요. 침묵하죠. 그 리듬을 깨기가 힘들어요. 아주 얘기 안해요. 될 수 있으면 감추려 하죠. 그러니까 그 친구가 하는 얘기를 들으려면 느긋해야 해요. 제가 볼 땐 그렇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려면 지긋하게 앉아 있어야 돼요. 서 있던지. 물론 자꾸만 하면 나중엔 이제 자연도 '한번 물어놓고는 그냥 가는 놈이 아니다' 하겠죠. 그러면 좀 속도감있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곳에 와서도 질문을 받게 되면, 제 경험으론 한 1분만 기다리면 대개 질문이 나옵니다. 3분까지 기다리면 100%질문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근데 사회보시는 분들은 대개 한 10초를 못 참아요. 어느 정도 있다가 가만히 있으면 '없습니까? 없으면 끝냅시다.' 그래요. 그런데 기다리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한국사람들은 원래 군불 때는 민족이라 조금만 기다리면 질문이 나오는 경험을 하곤 하지요.

'뭐라 할 말 있으면 해봐. 그래 미안하지도 않냐? 그렇게 사람을 놀래켜 놓고.' 한참 있으니까 '엊저녁에 뭔 일이 있었냐?' 하는 거예요.

'내가 너 밟아 가지고 넘어졌잖아. 꽝 하고.'

'어, 그래. 어제 어떤 놈이 날 밟았지. 근데 내가 밟으라 그랬냐? 난 들 어떡하냐. 내가 돌맹인데. 어떤 놈이 밟으니 안밟힐 재간이 있냐? 내가 생긴 게 이렇게 생겨 가지고 한쪽을 밟아 놓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냐. 근데 그게 너였구나. 하지만 내가 너한테 미안해할 이유가 뭐 있냐.'

 보통 아이를 기르는 엄마들을 보면, 애가 아장아장 걸어가다가 걸려 가지고 꽝 넘어지면 엄마가 가서 책상을 탁 치면서 "땠지! 요놈 나쁜 놈! 왜 우리 애기 넘어지게 해" 이런다고요. 평평한 데 가다가 넘어지면 땅을 딱 치면서 그래요. 아이들은 아직 거기까지 머리가 안 갔어요. 그러니까 '저놈 나쁜 놈이구나' 무의식 중에 그렇게 해요.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을 벌써 굉장히 빠르게 누군가에게 넘겨요. 그게 이 '땠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라구요.  

어떨 땐 기찻간에서 애기가 막 우는 거에요. 난 옆에 앉아있는데, 애기 엄마가 "저 옆에 할아버지가 에헴 해. 이놈 해." 하는 거예요. 한 번은 괜찮은데, 그 사람이 계속 나를 나쁜 놈 만드는 거에요. 애가 우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말은 잘 안되고 하니까 표시하는 거에요. '불편하다'라든가, '뭐 이렇게 오래 가냐', '빨리 내리자'라든가. 뭐 그런 것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는 걸텐데 '이놈' 한다며 그 여자가 자꾸만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참다 못해, "나 이놈 안 한다." 그랬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저도 모르게 뭔 일이 생기면 무의식 중에 '어떤 놈이' 하는 거에요. 나라가 어지럽다 그러면 '어떤 놈이', 국정이 파행으로 간다 그래도 '어떤 놈이' 하죠. 지가 하면서 지가 파행으로 이끌어 가면서 왜 저는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놈이' 하며 본능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요.

'네가 나를 밟고 스스로 굴러서 그렇게 된 것이지 않아. 그렇다고 네 잘못도 아니야.'

자연은요. 아주 묘해요. 제 잘못도 아니래요.

'그렇지 않냐? 깜깜한데, 네가 날 봤으면 밟았겠냐?'

'그럼, 깜깜한 건 누구 잘못이냐?'

'그거야, 밤인데 깜깜하지'

내가 돌을 밟고 넘어졌지만 내 잘못도 아니라니, 도대체 누굴 탓할 대상이 없는 거에요. 그 돌이 저한테 얘기하는 거에요. 돌이 아주 유식해요. 중용에 보면, 군자는 상불원천(上不怨天) 하고 하불인(下不人)하는지라. 군자는 위로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늘 아래로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느니라. 소인배는 뭔 일이 잘못되면, 위로 하늘을 탓하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을 원망한다는 거죠. 너는 소인배가 될래 군자가 될래? 내 잘못도 아니고, 돌맹이 잘못도 아니라. 그러니까 이 사건에 대해서 무엇, 뭣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말은 헛말이다.

굳이 네가, 무엇 뭣 때문에란 말을 꼭 하고 싶다면 이렇게는 해봐라. 네가 어제 날 밟고 넘어진 것에, 굳이 '때문에'란 말을 붙이고 싶다면 '아직도 네가 안 죽고 살아있기 때문이다'고 말해봐라. 죽은 놈은 돌맹일 밟고 못 넘어져요. '네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밤길을 가다가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죠? 아직도 네가 살아있다는 얘기고, 네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거구나. 너 때문에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구나. 고맙다.

"아, 이놈아, 말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나를 넘어지게 해놓고 네가 할 말이 없냐?' 이것은 네가 할 말이 아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짧은 시간에 오고갑니다. 그러니까 그 날은 제가 돌을 통해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다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이런 게 이제 사물과의 대화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해요.

이 마이크도 어느 날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해요.

'왜 사람들이 나 같은 물건을 만들었냐?'

'연설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듣게 하기 위해서지.'

'마이크가 없으면 연설을 못하냐?'

'그건 아니야. 옛날 세네카폰만 있을 그 때도 연설은 했지.'

기타 등등.

컵도 이런 얘길 해요.

'넌 누구냐?' 내가 물었어요.

컵은 두 가지 종류로 얘기할 수가 있어요. 하나는 물이 담겨져 있는 컵이다. 그렇죠? 그러나 이 컵은 나한테 어느 날 그래요. 맞다. 그러나 정말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다. 네가 들어야 할 나의 대답은, 나는 컵에 담겨있는 물이다.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어느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냐. 정말 우리가 봐야할 건 뭐냐. 컵에 담겨져 있는 물이다. 물 때문에 컵이 있는 것이지. 컵 때문에 물이 있는 건 아니다. 이거에요. 여기서 나는 '물이 담긴 컵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이 물건의 본질이라 생각해요. 이 물건의 정체를 훨씬 더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지요. '물이 담긴 컵이다' 하고 '나는 컵에 담겨있는 물이다' 하고, 어느 대답이 자기 정체를 정확하게 말한 것인가요? '나는 하나님의 영을 모신 사람이다' 하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영이다' 하고 말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생각을 변화시키면 '나는 하나님이야.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하나님이야.' 라고 말할 수 있고 제가 보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되는 거죠.

어느 날 제가 서울에서 전철을 탔는데, 낮 12시쯤 됐어요. 대낮이니까 전철이 붐비지 않으리라 생각했죠. 그래도 자리는 꽉 찼어요. 보통한 의자에 7명이 앉잖아요. 물론 좁혀 앉으면 여덟 명까지 앉을 수 있죠. 제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 일곱 분이 앉아 있었어요. 근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몇 사람 들어오는 거에요. 그들 중에 40대 중반쯤 된 사람이 있었어요. 남잔데, 낮술을 먹었는지 이렇게 취해 있었죠. 이리 저리 둘러보며 앉을 자리를 찾는 거 있죠.

근데 마침 제 앞 자리에 아주 잘 차려입은 여자 분이 앉아 있는데 그 분 옆 사람과 엉덩이 사이가 한 이만큼 비어 있었던 거에요. 이 취객이 가더니 그 사이에다가 엉덩이를 이렇게 넣고 앉았죠. 그러니까 양쪽에 있던 사람이 '앗 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피해 줘야죠. 어떡해요.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아주 안색이 안 좋아요. 그래도 그렇게 하고 앉아 가는데, 가만히 가는 게 아니라 술 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흔드는 거야. 눈 딱 감고 말이죠.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참다 못해서 일어났어요. 눈을 흘기며 싸악 쳐다보면서요. 그러고는 저쪽에 가서 탁 섰어요. 그래 갑자기 자리가 넓어지니까 아주 편안하게 앉아 가지고 가는 겁니다. 자리 하나 약탈한 거죠. 참으로 안 볼 수 없어 보긴 했지만 재밌잖아요? 웃기기도 하고.

그 사람이 눈을 질끈 감았는데, 얼굴 모양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어요. 난 인간의 얼굴 근육이 그 정도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봤어요. 얼마나 자유롭던지 난 흉내낼 수조차 없어요.마치 맥주 깡통이 구겨지는 듯했어요. 자유자재로 자기 얼굴을 가지고 온갖 표정을 다 만드는 거에요. 눈을 감은채.

그래서 저는 넋을 잃고 봤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는구나.' 근데 이 친구가 갑자기 눈을 딱 뜨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하고 눈이 딱 마주쳤죠. 딱 쳐다보는 거에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미안합니까. 지금까지 제가 저를 보고 있었으니 들켰잖아요. 나도 모르게 차악 눈을 내리 깔았죠. 조금 있다가 눈을 뜨고 보니까 다시 눈감고 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순간 그 얼굴이 저한테 말했습니다. 이것도 사물과의 대화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인간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뚱이가 저한테 말을 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뚱아리만큼 완벽한 자연이 없어요. 이 몸도 인간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이 몸도 아주 완벽한 자연이랍니다. 어딜 가나 내 몸이 있다는 사실은 완벽한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는 거에요. 사람들이 몸한테서만 제대로 배워도 절대로 잘못 살 수가 없습니다. 어쨌거나 그 얼굴이 저한테 얘기하는 거에요.

'재밌냐?'

'재밌지.'

그러곤 뭐라고 하느냐.

'난 말이야.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별의 별 인간의 얼굴을 다 만들 수 있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나한테 눈 흘겨뜨고 간 저 것도 내가 만든 얼굴이여. 네가 점잔 빼고 아주 도사처럼 날 쳐다보고 있는데, 네 낯짝도 내가 만든 거야.'

그렇게 얘기한 게 바로 사람이라는 거에요. 사람은 약 60억 개의 얼굴, 별 별 사람의 얼굴을 다 만든대요. 저는 그 날 사람의 말을 들었죠. 재밌지 않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왜 너 혼자 그렇게 모노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냐?'

'노는 거여.'

'왜 노냐?'

'애들은 놀면서 큰대.'

'그럼 왜 싸우냐?'

'애들은 싸우면서 큰대.'

'그래서 부시하고 라덴이 싸운데냐?'

왜 싸우냐니까, 크느라고 싸운다잖아요.

'꼭 싸워야 크냐?"

'아니야. 놀면서도 얼마든지 커. 그러나 싸우면서도 큰다.'

'애들은 싸우면서도 크는데, 왜 어른은 싸우면서도 못 크냐? 안타깝다.'

뭐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 받았어요. 어떤 모양의 사람을 보더라도 저건 나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면 그 사람이 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얘기들을 나누죠.

모든 것들을 통하여 얘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 노자가 얘기한 '자연', 그 분의 말과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배운 대로 우리가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제 얘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하시고, 고단하시면 일찍 돌아가시고 …. ^-^

[발제자 소개]
이현주님은 동화작가이자 목사이다. '사물과이 대화', '길가에서 주운 생각', '사람의 길, 예수의 길',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이름값을 하면서 살고 싶다' 등을 썼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짧은 생애' 등을 번역하였다. 최근에는 이 아무개란 이름으로 '금강경읽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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