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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 아무 것이나 좋아요. 여기 있는 안경도 좋고 뭐든지 하나를 정해야해요. 막연하게는 만날 수 없으니까요. 여기서 조심해야 될 건 관념의 게임에 농락당하면 안돼요. 다시 말해 생각에 속으면 안돼요. 이럴 때 중요한 건 머리를 쉬는 겁니다. 판단을 멈추는 것이죠. 이런 게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연습(practice)하면 되요. 전 인생을 연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훈련을 안했기 때문이에요. 지금부터라도 하면 돼요. 우선 주머니에 손 넣어 볼펜이 나오면 꺼내놓고 '아, 이거 볼펜이구나.' 하면서 시도해 보는 거에요. 그렇게 밖에 말씀드릴 게 없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요. 먼저 얘기를 걸어오지는 않습니다. 어떨 땐 그렇게 하는대요. 사실은 그러할 때도 언젠가 내가 질문을 해놨기 때문에 어느 날 문득 내가 물었다는 생각이 없는데, 대답을 하는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초보자의 경우에는 겸손하게 내가 나를 열고,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안경을 보고 이런 질문을 했어요. '관용'이라는 단어가 딱 떠올라요. '관용이 무엇인가요?' 하고 안경한테 물어 봤지요. 대답 안 하지요, 이놈이. 기다려야죠. 근데, 이때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내가 안경이 되어 가지고 대답하면 안 되죠. 사실 하나님 하고 기도한다고 해놓고서 자신이 자기하고 얘기하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지요. '생각을 비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자꾸만 시행착오도 해보고 잘못도 해보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진짜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고무적인 것은 결코 자연은, 사물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절대로. 누구한테는 말해주고 누구한테는 말하지 않고 그러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희망이죠. 열쇠는 우리한테 있죠. <답변 2> 미리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겁먹고 안 한다. 우습잖아요. 여기 오기 전 터미널에서 어떤 분을 만나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100% 이루어지는 기도가 있다고. 그게 뭔지 알아요. 그건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에요. 그것은 100%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하긴 하면서도 하는 순간 철회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다가 '너 오늘 이리로 와라. 너 그거 나한테 바쳐' 그럴까봐 그러지요. 그래, 여러 가지 상황을 미리 설정해 놓고 겁나니까.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구 그리고선 자기 뜻대로 해달라고 새로 기도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까 봐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육신의 아비도 자식이 뭘 달라 하면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줄줄 아는데, 하물며 아버지께서 너한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 오죽하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그러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뭐 그런 얘기를 하면서 왔습니다만은. 말은 쉽지만 잘 안되요. 자동차 하고도 얘기하다가 '쓸 데 없으니까 버려.' 그럴까봐. 얘기 안 하려고 한다. ^-^ 그러면 평생 못 해요. 겁내지 마시고 시작하십시오. 네가 쓸 데 없으니까 날 버리라고 하지만 난 아직 준비 안 됐어. 미안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제자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이것을 고맙게 여겨요. 겁낼 것 없어요. 전 질문에 겁을 안 냅니다. 겁낼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제일 신나는 날이 시험 보는 날이었어요. 일찍 끝나고, 극장 구경도 가고, 공부 안 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시험 자체는 참 쉬운 거에요. 모르는 건 모르겠다. 까 먹었다. 쓰는 거에요. 아는 것만 쓰는 건데 뭐가 어렵습니까.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공자님도 하도 답답하니까, '아는 건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그래. 그게 아는 거야' 라고 하셨죠. 왜 내가 모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요? 왜 내가 다 알아야 됩니까?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난 학생이에요. 그러니 내가 자연스럽게 차로부터 자유로워질 날을 기다리면 되요. 그러다보면 '이거 아무 것도 아니네' 하고 버리게 될 날이 오겠죠? 물론 와도 되고 안 와도 상관없어요. 성경에서도 할 수 있는 것만 하라고 했어요. 내가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안 됐어. 그거 너무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 왜 자기를 그렇게 닥달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했으면 됐지요. 부시와 라덴이 자꾸만 머릿 속에 떠올라서, '아휴, 이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는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 네 생각엔 어떻게 해야 되겠냐?' '이거 미국이 보복하면 안 돼는데요.' '그렇지? 나도 동감이야. 부시가 감리교인인데, 한번만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얘기하겠는데, 안 물어 본다야." 미국 대통령이지만은 감리교 신자 아니야. 대통령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지가 한 번 하나님을 믿는다니까. 아버지 때부터 믿었잖아요. 참아라~! 내가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니. 오른뺨 맞으면 왼뺨 돌려대라. 그랬으면 좋겠는데, 안 그런다. 묻지도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거 어떻게 하냐? 내버려둬야지.' '이걸 내버려 둡니까?' '네가 내버려 두는거냐?' '그럼, 어떻게 합니까?' '고래 싸움을 새우가 말릴 수 있겠냐?' 나보고 그래요. '아,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니까 문제죠?' '왜 성질을 내고 야단이냐? 터지면 터지라고 그래. 터진다 해서 새우씨 안 말러. 임마. 네가 할 일을 찾아봐.' 그래 제가 할 일을 찾아보니까요. 있더라고요. 첫째 아무리 마누라가 억울한 소리를 해도 절대로 나는 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나한테 누명을 씌우면 깨끗하게 내가 쓴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억울한 짓을 해도 절대 나는 보복하지 않는다. 또 보복하는 사람 편에도 서지 않겠다. 기타 등등. 쌔고 쌨어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편해지는 거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거에요. 내가 할 수 없는 걸 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조금씩 조금씩 따라가는 거에요. <답변 3> 아까 얘기한 대로 가슴이 앞서야 하지만, 또 가슴이 독주하면 안됩니다. 항상 이성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거에요. 자동차 부품 중에도 가장 중요한 게 브레이크에요.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아무리 비싼 차라도 소용이 없죠. 그런 것을 내가 스스로 제어 못할 때는 열심히 기도한다든가 해서라도 ….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밥에다 재를 뿌려 먹었다고 하죠. 그게 일종의 자기 브레이크에요.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균형이에요. 사람이 건강한 것은 밸런스가 맞아야 되요. 머리와 가슴이 다 균형이 맞아야 하고, 손과 발도 가슴하고 균형이 맞아야 되요. 이런 식이죠. <답변 4> 참, 잘 말씀하셨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 쓴 것은 좀 조작의 냄새가 나지요. 시라고 하는 건 굳이 구분을 한다면 두뇌의 언어가 아니라 가슴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저는 참된 시인이라면 시를 쓴다고 하기보다 받아 적는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받아 적는 거지, 쓰는 게 아니에요. 귀를 열고 마음을 열면 들려요. 들리는 것을 받아 적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이 시가 되지 않을까요. 시에 대한 제 생각은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곳의 환경은 계룡산 골짜기인데요. 앞과 옆과 뒤에 다 절이에요. 새벽에는 목탁 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또 조금 내려가면, 굿당이 많습니다. 징 소리가 자주 들려요.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있습니다. 그게 제가 살고 있는 곳의 환경이에요. 그러니까 저도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제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거기 무슨 연고가 있어서 간 것도 아니고, 좋다고 생각해서 간 것도 아니고, 정말 갈 곳이 없는 제게 누가 소개해 주어 살고 있는데, 살다보니 정말 참 좋아요. 제 집에서 뒷산으로 올라가면 작은 고개, 큰 고개를 넘어 동학사를 거쳐 내려오게 되는 코스가 있는데, 천천히 걸으면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 걸립니다.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저는 새벽마다 갑니다. 참 행복해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복이 많죠. 그럼요. 저희 집사람도 아주 만족해 합니다. 저하고 취향이 비슷하거든요. 시골을 좋아하고요. 그러니까 그렇죠. 그 사람이 어떻게든 서울에 산다고 하면 저는 서울서 삽니다. 왜냐하면 거주를 결정하는 권한은 집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 왔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요. 요새 책(금강경 읽기)을 냈더니 기자들이 찾아와 질문을 하는데, 보편적으로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언제 어떤 계기로 이런 데 관심을 갖게 됐느냐는 거에요. 기자들마다 이것을 빼놓지 않고 물어요. 그런데 몇 년도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면 받아 적기 좋을텐데, 가만 생각해보아도 양심적으로 대답할 게 없어요. 기억나는 계기가 없어요. '글쎄요. 살다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할 뿐이지요. 거기서 살다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아주 참 좋습니다. 여러분께 산책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도시에 사는는 분이라 하더라도 맘만 먹으면, 매일은 못 하더라도 1주일에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거에요. 대학캠퍼스도 좋잖아요. 가끔 비원이나 창경궁에 가 보면 참 좋은데 사람들이 별로 안 와요. 맨 할머니들이나 할아버지만 있지요. 생각을 비우고, 그런 곳에 몸을 푹 적셨다 나온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해서 산책을 하시면 심신에 아주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산책을 하지 않는 시인은 가짜 시인이라 봐요. 죄송합니다. 산책하시지요? 산책하지 않는 철학자도 사이비입니다. 칸트같은 사람도 그렇게 산책했다고 그러대요. 그렇기에 그 사람은 믿을 만합니다. <답변 5> 저를 '도인'이라 부른다구요.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부르시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구요. '목사'라는 타이틀에 대한 제 소견을 먼저 말씀드릴께요. 그것을 질문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대답하겠습니다. 제 친구 목사 중 하나는 목사증을 반납했어요. 교단에서는 반납받았구요.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 목사 안 하지요. 그땐 부럽더라구요. 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 목사라는 타이틀이 참 무겁게 느껴졌거든요. 근데,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은 무겁지도 않고, 별로 억압으로 다가오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땐 그랬어요. 나도 좀 사표를 낼까? 근데, 끝내 못한 이유는 자꾸만 드는 생각이 이거는 준 사람에게 반환해야 하는데, 교단이 나한테 목사라는 타이틀을 주지 않았더라구요. 교단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한테 준 거잖아요. 그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서 하나님한테 반납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잖아요? 목사라고 꼭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면 되지요. 어떤 사람은 저한테 "왜 목사인데 목회 안 하십니까?" 그래요. 그러면 저는 웃습니다. "하는 사람 보고 안 한다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럽니다. 그러면 "어디 목회, 아니 교회가 있습니까?" 그래요. "도둑놈이 뭘 하면 다 도둑질이지요. 목사가 뭘 하면 그것이 다 목회이에요." '도사'라는 얘기는 … 참, 저 수염을 잘랐습니다. 꽤 길렀을 때는 저한테 이렇게 합장하고 절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역시 불교신자들은 달라요. 어느 암자에 계시냐고 묻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 제가 도인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 1978년입니다. 꽤 오래 됐지요. 그땐 수염도 안 기르고 넥타이 딱 매고 다닐 때였어요. 목사되고 난 다음 해, 즉 77년에 목사가 됐으니까 78년에 원주에 계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에게서에요. "자네 이름이 뭔가?" "이자 현자 주자입니다." 그 때 제 옆 사람이 "자네도 이제 글자 하나 받아보지." 그러는 거에요. 얼마 뒤 갔더니 지금도 기억나요. '직지심경'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유수십견'(唯樹 見)이라는 넉자를 써서 주시는 거에요. 이는 '오직 보는 걸 세워라' 하는 것이지요.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하는 것이 탈이 나니까, 있는 그대로 봐라 하는 거지요. 그런 의미래요. 그때 제가 꽤 아는 척하고 까불었던가 봐요. 좀 쉬어라 하신 거죠. 근데 문제는 누가 누구에게 준다고 써놓는 데가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이현주 도인 시상'라 써놓은 거에요. 난 목사니까 당연히 이현주 목사 시상 그럴 줄 알았죠. 거기다가 목사는 없애두고 도인 그래요. 집에와 보니까 그렇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만났을 때 이게 자꾸 걸려요. 내가 무슨 도사냔 말이지. 그래서 여쭤 봤죠. "지난번에 도인 시상 그러셨는데, 제가 무슨 도사입니까? 그것 때문에 못 걸어 놓겠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웃으면서 "자네는 길가는 인간 아닌가? 자네는 길가는 놈 아니야?" 길가는 사람 아니냐는 거에요. "그게 그런 뜻인가요?" "그럼 도인이란 길 도(道)자에 사람 인(人)자 길 가는 놈이지." "아, 그게 그런 뜻이군요." "아, 이 세상에 도인 아닌 인간 있어요?" 그 다음부터 도인이라는 말이 편하게 느껴졌지요. 사람들도 도인(道人) 도인 그러면, 가부좌 틀고 있는 것만 자꾸 연상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산에 가서 도 닦는다고 하는데, 산에 가서 닦는 게 뭡니까? 자기 몸과 마음이지요. 내가 집에서 자기 몸과 마음을 닦으면 거기가 산이에요. 여기서도 내가 이런 얘기하면서 나 자신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성찰한다면 저는 지금 여기서 도를 닦고 있는 거에요. 결론은 그래서 '모든 인간은 수도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요. 사람들이 전부다, 국회의원이 국정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을 통해서 자기를 닦아나간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요.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기를 계속 수도(修道)하고 자기를 수신(修身)한다면 교육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요. 농사꾼은 농사를 짓는 것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운전으로, 그걸 자기 수신의 도구로 삼는다면 수도자 아닌 인간이 없을 겁니다. <답변6> 우리를 자꾸 괴롭히는 건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걸 설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지요. 거기 못 따라가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이에요. 사실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생각은 내가 만드는 거에요. 아니면 사회가 만들던가. 그래서 파도가 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사건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거에요. 나한테 날마다 파도를 탈 줄 아는 기술만 조금 있으면 되지요. 그건 어디에서 올까요. 하루 아침에 시작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수영을 하는 것만 하나 봐도 일단 물 속에 들어가서 물도 먹고, 빠지기도 하고,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때 파도를 타는 기술이 내 몸에 습득이 되는 것이지요. 선생님은 학교에서 아이들하고 부딪치고 상황을 부딪치고 하는 중에 일단 파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기서 내가 어떻게 이 파도를 잘 타고 계속해서 가고 싶은 곳으로 잘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익히게 되지요.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것은 '가랑잎'입니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은 가랑잎과 같아지는 것이에요. '매'라고 하는 놈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도 직각으로 갈 수 있어요. 이것은 매가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가랑잎은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지요. 바람을 탈 줄 알아야 되요. 기류를요. 가랑잎 같은 존재도 있지만, 반면 바람이 아무데서 불어오더라도 타고 갈 수 있는 존재도 있지요. 그러면 참으로 즐거운 인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성자(聖子)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랍니다. 모든 경험과 모든 상황을 스승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지요. 아이들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보고, '저건 나의 선생이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지요. 지금 고개를 끄덕이시는 걸 보니까 동의가 되는 것 같아요. 그쵸?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에요.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연습(practice)이거든요. 연습이 없을 땐 공염불이 되고, 사상누각이 될 수 있지요. <답변 7> 전처럼 지금도 책을 많이 갖고 있느냐구요? 한참 어려울 때였던 걸로 기억납니다. 이사하려는데 이사 비용도 없었죠. 그 때 장로님께서 당신이 영업하시던 1톤 짜리 우유 배달차로 음성에서 서울, 경기도를 두 번이나 왕복해주셨지요. 얼마나 짐이 많던지요. 차는 세대였는데, 하나가 왔다 갔다 했죠. 기억에 그래요. 아휴, 그 때 기름 값이라도 드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늘 빚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주셔도 돼요) 지금 줘도 된다고 말씀하셨나요? 알았습니다. 근데, 그 때 책을 많이 보셨기 때문에 질문을 하시는 것 같은데 …. 이삿짐 세 트럭이 거의 책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그 땐 얼마나 책 욕심이 많았는지. 근데, 지금은 다 없어졌어요. 지금은 약 70~80권만 남았다고 봅니다. 어떤 것을 남길까 하고 봤더니, 주로 경(經)자 붙은 것이 남더라구요. 그리고는 사전이지요. 그 외에는 제가 밑줄까지 쳐가면서 본 책들이었구요. 그리고 고맙게도 후배들이 와서 가져가 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별로 없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내가 제일 좋아하지요. 저도 참 좋습니다. 그 책이 없는데도 조금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아마 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아마 그걸 서둘러서 버렸더라면 되게 후회했을 거에요. '이래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을 해야 해요. 또 책이 없지만 책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요. 언제나 제 손엔 책이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 생각이 나는데요. "선생님, 저는요. 밑줄도 긋고 하지만 뒷장을 딱 덮고 나면 하나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진짜로 생각나는 게 없어요. 나는 헛 읽은 것 아닙니까?" 그랬어요. "이제 자네가 좀 책 읽을 줄 아네. 나는 한 페이지 넘기면 그게 생각이 안나." 그러시는 거에요. 저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갔습니다만은. 그건 먹고 금방 소화가 된 것이지요. 에너지를 흡수한 거랄까. 그리고 내가 먹는 동안에 즐거웠으면 된 거 아닌가요? 뭐 하러 찌꺼기를 잔뜩 머리에 넣고 다녀요. 그래 보았자 유식한 척밖에 더 하겠습니까? 아무개 교수가 뭔 얘기를 했고 등등. 전 '저 사람이 많이 아는구나' 하는 게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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