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영성 이정배 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이며,(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소제목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말할 때 하느님을 올바르게 체험하는 일을 일컫는다. 말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신학은 자신의 언술이 추상적 소산이 되지 않기 위하여 누구보다 체험을 요청받는다. 하느님 체험에 근거한 신학은 이 점에서 영성 그 자체와 무관하지 않다(Theology as Spirituality). 그러나 하느님 체험 및 그에 대한 사색은 언제든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발생하며 그래서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루되고 있다. 중세의 목적론적 세계상에서 이해되던 하느님과 근대 이후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언표된 하느님 이해가 다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신학에 적용하여 재구성했던 한스 큉에 따르면 희랍 교부들의 하느님, 로만 가톨릭의 하느님,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론에 근거한 중세의 목적론적 신학, 플라톤주의, 독일신비주의 그리고 기계론적 세계상과 조우하여 이룩된 종교개혁신학, 神의 절대 초월성을 강조한 20세기 신정통주의 신학사조등은 저마다 다를 뿐 어느 것도 오류로 지적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듯 신학의 패러다임(모형)을 결정짓는 핵심 동기는 '자연관' 즉 자연에 대한 상이한 이해방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하느님의 자기 표현 공간이자, 인간 생존의 토대로서의 자연은 매시대마다 변별력 있게 해석되어 왔으며 그 다른 해석(세계관)의 옷을 입고 기독교는 자신의 진리를 표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서술하는 일은 하느님 체험과 그에 대한 사색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본 논문을 통해 소개하려는 두 책 자연적 은총, 'Natural Grace : dialogues on creation, darkness, and the soul in spirituality and science'와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자연 이해를 소개하며 그에 근거한 신학적 진술을 제공하고 있다. 다시말해 하느님 체험의 새로운 지평, 영성의 새 차원을 기독교인들에게 열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의 신학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데카르트 뉴우튼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성립되었던 것에 반하여 불확정성 원리, 카오스 이론, 형태공명 등 물리학, 생물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발견물들은 자연의 이해를 변화시켰고 이전 신학과는 다른 神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된 신체험, 영성으로서의 신학은 교회의 역할, 교회의 목회적, 교육적 기능에 대해 깊이 재고 할 것을 요청한다. 신과학적 세계관에 근거된 새로운 종교적 성찰은 인간 이해 및 인간의 가치 물음에 대한 전향적 사고를 지향하기에 종래와 같은 교리 중심, 역사 중심, 축복 중심, 물질 중심의 교회적 가르침으로서는 새 술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것을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 알 듯이 영성은 전 자연과 관계된 일상의 삶 속에서 체현되고 맺어지는 구체적 열매 속에서 그 본질을 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고는 신과학적 세계관, 자연 이해의 새 관점에 근거하여 신앙을 인간학적으로 제한된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영의 활동 공간으로서 전 자연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며 인간 영혼 및 영성의 의미 지평을 확대시켜 이해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첫째 자연 이해(세계관)와 신학간의 상호 관계 및 신과학 출현 의미를 서술하고 둘째, 카프라의 '신과학(물리학)과 영성의 시대'의 내용을 약술하고, 세째 루퍼드 쉘드레이크의 '자연적 은총'에 나타나는 생물학적 자연 이해 및 그에 근거한 종교의 새 지평을 정리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과학 사조와 기독교 영성의 관계를 총괄적으로 문제삼는 일련의 순서를 갖게 될 것이다. 자연이해(세계관)와 신학의 상호성 - 신과학 사조의 출현 의미 신학자 몰트만은 현대신학이 감당해야
될 향후 세가지 과제를 다음처럼 제시한다. 첫째는 각 교파 중심의 기독교
시대에서 에큐메니칼 한 기독교로의 이행, 둘째 유럽중심에서 세계 공동체
중심으로의 전환 그리고 세째는 기계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적 사고
모형으로부터 유기체적 사고 모형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에서 본 논문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부분은 세 번째 항목이다. 무엇보다 기계론적인
근대 세계관은 모든 변화의 근거를 강제적이며 외부적인 힘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 받고 있다. 이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견해 즉
자연계는 기계론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신은 그러한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초적 원인자라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관의 토대 위에 세워진 유신론은 모든 운동의 근거 혹은 원천으로서의
신의 초월적 전능성을 그 속성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의 초월적
전능성이 강조될수록 자연 세계의 수동성과 죽어있음(비활성적 특성)이
철저하게 부각되어진다. 다시말해 하느님은 전적으로 외적인 창조자로서
자신의 힘을 통해서 세계를 지배하고 인도하는 존재로 형상화된 것이다.
근대 세계관에 토대를 둔 이러한 유신론적 신학의 메시지는 힘이며 이것이
종교적인 근본 모티베이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힘을 모든
사물의 근본 토대로서 이해하도록 하였고 따라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
가족들, 동물들 다른 종교들 그리고 타 민족 모두를 힘의 논리하에 상정되도록
하였다. 즉 근대성으로부터 생겨난 힘의 관점이 세계 내의 모든 관계
속에서 비관용적 태도를 가져왔으며 이로부터 전능한 하느님 신앙은
인간의 지적 성실성과 사랑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되는
神에 대한 복종만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이다. 18-19세기에 접어들면서 생겨난 서구적
무신론 역시 이러한 힘의 관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윈의
진화론 속에서 정점을 이룬 무신론 사조는 경험과 이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에 종교 및 계시를 배격하고 과학적 방법만이 최고의 법정이라고
여겼다. 경험과 이성의 관점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이외의 것은 거짓이고
원시적이며, 비계몽적이고 비진화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막스 베버나 헤겔같은 사상가들은 동양종교를 마술화된 자연종교 내지는
원시종교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근대과학은 앞선 유신론적 배타성 만큼이나 무신론적 배타성을
낳게 하는 동인이 된 것이다. 17세기 이래로 근대 세계관이 낳은 서구적
사고방식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유신론에서 무신론으로 경과해 왔지만
이들 모두는 힘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맹종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자연에
대한 본성이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신에 대한
물음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근대의 종교성이 자연을 물질적으로
보고 그에 대한 지배를 자신의 종교적 충동으로 이해했지만 오늘의 종교성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주기, 자연의 조화, 자연의 내적 목적을
따라 인간이 조화롭게 사는 길을 생각하는 새로운 사유 패턴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神은 중세의 목적론적 하느님도, 사유의 전능성과
힘의 논리에 근거된 근대의 하느님도 아니며 사물들의 내적 본성과 깊이
관계맺는 거룩한 실재(holy reality)로써 명명될 수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에 제기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과 달리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근거하여 신과학의 패러다임을 전일적, 생태론적(유기체),
시스템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카프라는 과학의 본성을 다음 5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전환,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으로의 전환, 건물에서 그물로 전환하는 지식의 체계,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전환. 여기에서 처음 두 명제는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 그 자체를 뜻하며 나머지 세개는 그에 따른 인식론적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신학도 이러한 신과학의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다르게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카프라 첫째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 지금껏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전체란 부분의 합으로만 정의되었다. 그러나
신과학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오히려 부분의 특성은 전체의 역동성을
이해함으로써만 밝혀질 수 있다고 봄으로써 기존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역전 시켜낸다. 자연의 본성이 대상화된 물질로서가 아니라 유기체적,
생태론적 상호관계성으로 이해되면서 어떤 대상도 그 자체로 독자적인
속성을 지닐 수 없으며, 일체의 속성은 그 사물이 맺고 있는 제반 관계성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관계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욱 고양된 생명일수록 더 많은 다양한 관계들이
모여 한 전체로서 조화롭게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신과학은 이러한
자연의 활동을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내지는 '스스로 짜
짖기'의 원리로 명명한다.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통해 자연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며 진화의 방향을 더듬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상 만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神은 스스로 창조하는 힘, 곧 우주 차원의
생명 원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말해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전
우주를 조직화해 나가는 창조의 과정 그 자체를 신과학은 하느님의 창조성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과 같이 자연에 대한 변화된 관점을
서술하는 신과학적 패러다임은 이제 신학의 모형변이를 추구하며 신학이
자연(실재)의 본성에 맞는 영성을 지닐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우주
실재(관계성) 앞에서 어느 누구도 동떨어진 관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따라서
객관적 관점은 모두 허구라고 하는 사실, 내가 곧 우주에 속해 있다는
부분에서 전체로의 패러다임, 가치의 다차원성을 말하는 그물 구조의
이야기 등은 인간존재가 우주 자연과 함께 숨쉬고 움직이는 동반자임을
자각하게 하며, 신학에 대한 재구성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이다.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모형 변이는 교리,
신조 중심의 하느님 인식을 부정하고 하느님 존재를 직접 대면하고 관계
맺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해 준다. 교리, 신조보다는 체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본래 성령이란 하느님 초월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써 그 초월적
특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에 하느님을 거룩한 영, 곧 성령이라 하는
것인데, 오늘날을 성령의 시대로 부르는 것은 지금껏 직접적 체험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하고, 더욱이 이제까지
주목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대상과 존재가 주목받고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경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예측불가능한 다음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으로의
전환은 관찰자의 인식 과정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으로서 주체의 직관,
감성, 그리고 신비 체험을 중요한 신학적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귀납적,
경험적 방법을 신학이 선호, 채택하게 되었음을 지시한다. 다시말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은 하느님을 몸소 체험한 내용뿐이기에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각자의 체험만큼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서란 인간이 하느님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며 신학은 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완제품으로 보내어진
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 애쓰는 노력 속에서
인간은 구원을 얻고 깨우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계시도 과정
속에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진리란 현실의 실제 상황 속에 있는 것이며 어느 신학도 표현하는 과정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교리가 아니라 진리의 신비적 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현실 상황은 언제든지 교리에 정확히 부합하는게 아니며 교리를 통해 완벽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교리는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교리는 더욱 사실 적합한 내용을 담기 위하여 개선되고 수정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하겠다. 기존의 신학이 모든 진리가 다 언표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은 끊임없는 하느님 탐구를 지시하게 된다. 신학적 명제, 곧 교리는 진실이지만 시공간적인 제한된 표현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신앙인 모두는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궁극적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영성에 이르는 지름길인바, 종교(도그마)없는 영성은 가능하지만 영성없는 종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