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영성
신과학 시대의 기독교적 영성

이정배

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이며,(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소제목
1.새 술은 새 부대에...
2.살아있는 우주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말할 때 하느님을 올바르게 체험하는 일을 일컫는다. 말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신학은 자신의 언술이 추상적 소산이 되지 않기 위하여 누구보다 체험을 요청받는다. 하느님 체험에 근거한 신학은 이 점에서 영성 그 자체와 무관하지 않다(Theology as Spirituality). 그러나 하느님 체험 및 그에 대한 사색은 언제든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발생하며 그래서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루되고 있다. 중세의 목적론적 세계상에서 이해되던 하느님과 근대 이후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언표된 하느님 이해가 다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신학에 적용하여 재구성했던 한스 큉에 따르면 희랍 교부들의 하느님, 로만 가톨릭의 하느님,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론에 근거한 중세의 목적론적 신학, 플라톤주의, 독일신비주의 그리고 기계론적 세계상과 조우하여 이룩된 종교개혁신학, 神의 절대 초월성을 강조한 20세기 신정통주의 신학사조등은 저마다 다를 뿐 어느 것도 오류로 지적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듯 신학의 패러다임(모형)을 결정짓는 핵심 동기는 '자연관' 즉 자연에 대한 상이한 이해방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하느님의 자기 표현 공간이자, 인간 생존의 토대로서의 자연은 매시대마다 변별력 있게 해석되어 왔으며 그 다른 해석(세계관)의 옷을 입고 기독교는 자신의 진리를 표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서술하는 일은 하느님 체험과 그에 대한 사색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본 논문을 통해 소개하려는 두 책 자연적 은총, 'Natural Grace : dialogues on creation, darkness, and the soul in spirituality and science'와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자연 이해를 소개하며 그에 근거한 신학적 진술을 제공하고 있다. 다시말해 하느님 체험의 새로운 지평, 영성의 새 차원을 기독교인들에게 열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의 신학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데카르트 뉴우튼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성립되었던 것에 반하여 불확정성 원리, 카오스 이론, 형태공명 등 물리학, 생물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발견물들은 자연의 이해를 변화시켰고 이전 신학과는 다른 神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된 신체험, 영성으로서의 신학은 교회의 역할, 교회의 목회적, 교육적 기능에 대해 깊이 재고 할 것을 요청한다. 신과학적 세계관에 근거된 새로운 종교적 성찰은 인간 이해 및 인간의 가치 물음에 대한 전향적 사고를 지향하기에 종래와 같은 교리 중심, 역사 중심, 축복 중심, 물질 중심의 교회적 가르침으로서는 새 술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것을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 알 듯이 영성은 전 자연과 관계된 일상의 삶 속에서 체현되고 맺어지는 구체적 열매 속에서 그 본질을 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고는 신과학적 세계관, 자연 이해의 새 관점에 근거하여 신앙을 인간학적으로 제한된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영의 활동 공간으로서 전 자연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며 인간 영혼 및 영성의 의미 지평을 확대시켜 이해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첫째 자연 이해(세계관)와 신학간의 상호 관계 및 신과학 출현 의미를 서술하고 둘째, 카프라의 '신과학(물리학)과 영성의 시대'의 내용을 약술하고, 세째 루퍼드 쉘드레이크의 '자연적 은총'에 나타나는 생물학적 자연 이해 및 그에 근거한 종교의 새 지평을 정리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과학 사조와 기독교 영성의 관계를 총괄적으로 문제삼는 일련의 순서를 갖게 될 것이다.

자연이해(세계관)와 신학의 상호성 - 신과학 사조의 출현 의미

신학자 몰트만은 현대신학이 감당해야 될 향후 세가지 과제를 다음처럼 제시한다. 첫째는 각 교파 중심의 기독교 시대에서 에큐메니칼 한 기독교로의 이행, 둘째 유럽중심에서 세계 공동체 중심으로의 전환 그리고 세째는 기계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적 사고 모형으로부터 유기체적 사고 모형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에서 본 논문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부분은 세 번째 항목이다. 무엇보다 기계론적인 근대 세계관은 모든 변화의 근거를 강제적이며 외부적인 힘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 받고 있다. 이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견해 즉 자연계는 기계론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신은 그러한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초적 원인자라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관의 토대 위에 세워진 유신론은 모든 운동의 근거 혹은 원천으로서의 신의 초월적 전능성을 그 속성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의 초월적 전능성이 강조될수록 자연 세계의 수동성과 죽어있음(비활성적 특성)이 철저하게 부각되어진다. 다시말해 하느님은 전적으로 외적인 창조자로서 자신의 힘을 통해서 세계를 지배하고 인도하는 존재로 형상화된 것이다. 근대 세계관에 토대를 둔 이러한 유신론적 신학의 메시지는 힘이며 이것이 종교적인 근본 모티베이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힘을 모든 사물의 근본 토대로서 이해하도록 하였고 따라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 가족들, 동물들 다른 종교들 그리고 타 민족 모두를 힘의 논리하에 상정되도록 하였다. 즉 근대성으로부터 생겨난 힘의 관점이 세계 내의 모든 관계 속에서 비관용적 태도를 가져왔으며 이로부터 전능한 하느님 신앙은 인간의 지적 성실성과 사랑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되는 神에 대한 복종만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이다.

18-19세기에 접어들면서 생겨난 서구적 무신론 역시 이러한 힘의 관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윈의 진화론 속에서 정점을 이룬 무신론 사조는 경험과 이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에 종교 및 계시를 배격하고 과학적 방법만이 최고의 법정이라고 여겼다. 경험과 이성의 관점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이외의 것은 거짓이고 원시적이며, 비계몽적이고 비진화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막스 베버나 헤겔같은 사상가들은 동양종교를 마술화된 자연종교 내지는 원시종교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근대과학은 앞선 유신론적 배타성 만큼이나 무신론적 배타성을 낳게 하는 동인이 된 것이다. 17세기 이래로 근대 세계관이 낳은 서구적 사고방식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유신론에서 무신론으로 경과해 왔지만 이들 모두는 힘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맹종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자연에 대한 본성이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신에 대한 물음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근대의 종교성이 자연을 물질적으로 보고 그에 대한 지배를 자신의 종교적 충동으로 이해했지만 오늘의 종교성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주기, 자연의 조화, 자연의 내적 목적을 따라 인간이 조화롭게 사는 길을 생각하는 새로운 사유 패턴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神은 중세의 목적론적 하느님도, 사유의 전능성과 힘의 논리에 근거된 근대의 하느님도 아니며 사물들의 내적 본성과 깊이 관계맺는 거룩한 실재(holy reality)로써 명명될 수
밖에 없다. 이 점에서 신과학은 자연의 본성을 새롭게 밝혀주고, 그와 관계 맺은 인간 삶의 방식의 새 차원을 보여주었으며 그를 토대로 神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부언하자면 근대의 사유체계가 신의 인격성만을 이야기하고 그 인격성을 오로지 타자성으로 이해했으며 그 타자성을 신의 전능성으로 이해하던 범주를 가지고 있었다면 앞으로의 神은 사물의 본성을 안으로부터 자극하여 사물들의 내적 본성 및 그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강요가 아니라 사랑을 근본으로 하여 인격과 비인격을 통전시키는 범재신론의 표상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의는 동양철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보충되어진다. 동양의 눈으로 볼 때 지금껏 서구는 존재의 보편성, 불변성을 강조했고 자연의 법칙성을 중시하여 왔으나 실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 것도 동일하지 않으며 자연 역시 법칙에 근거 반복되는 실체가 아니라 항시 일회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성, 반복성, 불변성, 일정성을 토대로 한 세계관이 근대 및 근대적 종교를 낳았다면 비결정성, 임의성, 다양성, 반복 불가능성으로 언표되는 생명 및 자연에 대한 동양적 이해는 실재(Reality)와의 감성적 만남을 가능케 함으로써 영성의 시대를 열어놓고 있는바 바로 이것은 동양적 사유가 신과학적 세계관과 친화력을 갖는다는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변화된 실재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 곧 신과학적 세계관의 실상을 우리는 카프라와 두 명의 신학자들이 엮어낸 새로운 책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Belonging to the Universe)'와 기독교 영성가인 매튜 폭스와 루퍼드 쉘드레이크의 생각이 담긴 '자연적 은총(Natural Grace)' 등을 통하여 살펴보고 그들의 연구 및 통찰이 화석화된 기독교 신학 및 교회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에 제기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과 달리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근거하여 신과학의 패러다임을 전일적, 생태론적(유기체), 시스템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카프라는 과학의 본성을 다음 5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전환,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으로의 전환, 건물에서 그물로 전환하는 지식의 체계,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전환. 여기에서 처음 두 명제는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 그 자체를 뜻하며 나머지 세개는 그에 따른 인식론적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신학도 이러한 신과학의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다르게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카프라
를 비롯한 그와 함께 대화하고 있는 카톨릭 수사 슈타인들 라스트와 역사신학자 토마스 매터스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 항목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 대한 관점 변화에 따른 실재(Reality)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비롯한 신학의 새로운 모형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 지금껏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전체란 부분의 합으로만 정의되었다. 그러나 신과학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오히려 부분의 특성은 전체의 역동성을 이해함으로써만 밝혀질 수 있다고 봄으로써 기존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역전 시켜낸다. 자연의 본성이 대상화된 물질로서가 아니라 유기체적, 생태론적 상호관계성으로 이해되면서 어떤 대상도 그 자체로 독자적인 속성을 지닐 수 없으며, 일체의 속성은 그 사물이 맺고 있는 제반 관계성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관계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욱 고양된 생명일수록 더 많은 다양한 관계들이 모여 한 전체로서 조화롭게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신과학은 이러한 자연의 활동을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내지는 '스스로 짜 짖기'의 원리로 명명한다.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통해 자연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며 진화의 방향을 더듬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상 만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神은 스스로 창조하는 힘, 곧 우주 차원의 생명 원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말해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전 우주를 조직화해 나가는 창조의 과정 그 자체를 신과학은 하느님의 창조성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전환. 기존의 자연 이해에 따르면 자연 속에는 기본 골격(구조)이 있고 그러한 구조에 근거하여 자연과정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과정은 구조로부터 생겨나는 수동적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과학적 자연이해에 따르면 구조, 골격이란 '과정'이 능동적으로 활동을 펼치며 드러내는 한 규칙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 조직화의 원리에 의해 생명의 과정이 역동적으로 진행될 때 생명은 정해진 규칙 및 방향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이 점에서 본 책에서는 과정을 중시하는 신과학적 사
유를 불고 싶은 대로 부는 성령의 역할로서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셋째로,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에로의 전환. 고전물리학에서 자연에 대한 서술은 항시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에서 관찰자인 인간과 지식을 획득하는 인간의 인식과정 등은 항시 생략되고 만다. 그러나 신과학은 자연 현상을 묘사함에 있어서 자연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 곧 인식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보고 느끼는 세상은 객관적으로 그 곳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감각기관을 통해, 다시말해 인식과정에 의해 창조되기 때문이다(세상은 인식의 과정에서 생겨난다). 관찰자에 따라 물질 현상이 입자와 파동으로 각기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불확정성 원리는 바로 인식론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세계가 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다고 할 때 객관적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주관성이 이러한 세계 현실과 끊임없는 대화적 참여를 하게 되고 그로써 체험의 양식(Pattern)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넷째로, 건물에서 그물로 전환하는 지식의 체계. 건물로서의 지식 체계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치서열적으로 이해하는 학문 태도를 일컫는다. 그러나 신과학적 자연 이해에 따라 지식 체계는 상위, 하위의 건물 구조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 얽혀 있는 그물 구조로서 이해되고 있다. 물리적 현상이란 원래부터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사물들의 역동적 그물망으로서 사물들 자체는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가치 구조가 자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과학에 있어서 기본(기초)요소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은 과학자가 임의로 설정하는 것이지 영속적인 내용으로 주
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관계성의 다원적 측면을 통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패러다임 전환. 자연 현상과 관찰자가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을 떠난 자연 그 자체란 말이 인식론적 측면에서 인정되지 않음으로 신과학에서는 실재에 대한 근사치(확률)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다시말해 즉 현상과 현상에 대한 서술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과학자는 진리의 절대치를 알 수 없고 실재를 제한된 범위에서 근사치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과학은 상호 연결된 복잡한 관계성을 열심히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것으로서 실재를 다 이해할 수 없으며 그로써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실재 자체가 신비인 것을 부연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상과 같이 자연에 대한 변화된 관점을 서술하는 신과학적 패러다임은 이제 신학의 모형변이를 추구하며 신학이 자연(실재)의 본성에 맞는 영성을 지닐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우주 실재(관계성) 앞에서 어느 누구도 동떨어진 관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따라서 객관적 관점은 모두 허구라고 하는 사실, 내가 곧 우주에 속해 있다는 부분에서 전체로의 패러다임, 가치의 다차원성을 말하는 그물 구조의 이야기 등은 인간존재가 우주 자연과 함께 숨쉬고 움직이는 동반자임을 자각하게 하며, 신학에 대한 재구성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떠나도록 요청받는다. 지금까지 하느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궁극적 가치를 두고 인간의 자연 지배를 정당화해온 종래의 신학은 생물의 다양한 종들이 그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을 소유함으로 해서 그들에게 고등/열등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는 온 삼라만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결(창조의 영)로 채워져 있기에 인간은 순진 무구한 마음을 갖고 우주 자연을 그대로 느끼며 그들과 어우러지는 경험에 익숙해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만이 자연을 지키고 보존하는 자로 자리 매김 될 수 없고 오히려 공생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며 짜짖는 자기조직 원리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인 바, 생태계가 스스로를 지키며 돌본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책임이란 본래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는 반응성(responsiveness), 적절히 반응하는 능력인 바 올바르게 반응하는 일은 인간 외의 다른 생물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오로지  스스로를 파괴하는 능력까지 지녀버린 인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요구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주의 온갖 미물과의 관계, 세계 내 피조물 하나 하나와 맺고 있는 근본적인 관계성을 온전히 깨우치지 않으며 안된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세상 만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범재신론적 존재로서 - 세계는 하느님의 몸으로서 이해된다 -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넉넉한 인간성(인격)을 지닌 실재로 설명될 수 있다. 모든 것과의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해서 하느님은 이 세계를 초월하신 분이 되는 것이다. 어째든 관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인간성을 풍요롭게 하며 그로써 神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 영성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된다.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모형 변이는 교리, 신조 중심의 하느님 인식을 부정하고 하느님 존재를 직접 대면하고 관계 맺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해 준다. 교리, 신조보다는 체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본래 성령이란 하느님 초월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써 그 초월적 특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에 하느님을 거룩한 영, 곧 성령이라 하는 것인데, 오늘날을 성령의 시대로 부르는 것은 지금껏 직접적 체험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하고, 더욱이 이제까지 주목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대상과 존재가 주목받고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경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예측불가능한
창조성을 낳는 생명의 전 과정을 성령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본 책의 저자들은 그리스도 복음을 편협한 역사의 틀, 서구 및 인간의 틀 속에 한정시켜서는 안되며 대자연, 그리고 기독교에 앞서 타문화 속에서 역사하는 그분의 활동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며 그를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오늘의 다문화, 다종교 상황은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하는 황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으로의 전환은 관찰자의 인식 과정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으로서 주체의 직관, 감성, 그리고 신비 체험을 중요한 신학적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귀납적, 경험적 방법을 신학이 선호, 채택하게 되었음을 지시한다. 다시말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은 하느님을 몸소 체험한 내용뿐이기에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각자의 체험만큼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서란 인간이 하느님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며 신학은 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완제품으로 보내어진 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 애쓰는 노력 속에서 인간은 구원을 얻고 깨우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계시도 과정 속에 있다고 하겠다.
넷째로 건물에서 그물로 전환은 신학적 진술이 신앙인의 성향이나 종교가 발생된 문화적 풍토와 무관한 객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비록 종교 생성이후 자의적 해석으로서의 이단화를 방지하고 외적으로 분파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진리 체계를 강조, 화석화시켜 왔으나 - 유대인들의 율법이 이에 해당된다 - 정작 예수 스스로는 새로운 상상력을 지닌 혁명적 언어(비유)를 구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치서열적일 수 없는,즉 차이를 지닌 신학적 진술들은 상호간의 소통과 관계성을 추구하는 도상에서 진리에 이르는 다양성으로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신학의 다양성이야말로 상호 연관성을 기초로 하는 자연 이해, 곧 신과학적 그물 패러다임과 상응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관용을 주제로 하는 것으로서 종교들간의 가치다원성을 인정하도록 촉구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받드는 유카리스트(Eucharist)는 우리 모두가 삼라만상 모두에 함께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교 전통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와 종교 전통 모두가 하느님께 속한다는 기쁨을 나누는 잔치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교리로 대체해 버릴 때 그로부터 예수(진리)를 죽인 악마적 광기만이 나올 뿐이다.

끝으로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진리란 현실의 실제 상황 속에 있는 것이며 어느 신학도 표현하는 과정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교리가 아니라 진리의 신비적 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현실 상황은 언제든지 교리에 정확히 부합하는게 아니며 교리를 통해 완벽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교리는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교리는 더욱 사실 적합한 내용을 담기 위하여 개선되고 수정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하겠다. 기존의 신학이 모든 진리가 다 언표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은 끊임없는 하느님 탐구를 지시하게 된다. 신학적 명제, 곧 교리는 진실이지만 시공간적인 제한된 표현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신앙인 모두는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궁극적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영성에 이르는 지름길인바, 종교(도그마)없는 영성은 가능하지만 영성없는 종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장: 살아있는 우주

환경신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