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 은총'속에 나타난 자연 이해의 새 모형과 신학의 재구성

생물학 영역에서 신과학적 사유를 발전시켜 온 루퍼트 쉘드레이크 역시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하느님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사고가 달라진다고 본다. 그 역시 오늘날은 생명없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부터 자연을 유기체적이고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패러다임의 전환 시대라고 하였다. 실상 루퍼트는 전 역사에 걸쳐 많은 기간 동안 인류는 자연을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주장한다. 헬라인은 전 우주를 몸, 혼, 영을 가진 거대한 동물과 같은 살아있는 유기체로 생각하였고 중세 유럽 역시 애니미즘이 공인되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북유럽에서는 애니니즘적 요소를 이교적 유산이라고 배척, 억압하게 되었고 이런 변화가 자연 세계를 탈신성화(기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루퍼트는 지적하고 있다. 이로부터 기독교는 인간과 신의 상호작용, 곧 타락과 구속의 드라마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자연 정복과 착취에 대한 종교적 제약(한계인식)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주지하듯이 17세기 과학혁명을 주도한 기계론적 자연관 역시 기계라는 중심 이미지에 기초한 것이다. 세계와 동식물과 인간의 몸 모두는 기계이고 과학의 일은 그 기계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계론적 우주에는 생명이 없고 내적 목적도 없으며 목표를 향해 움직여가는 방향성도 없다. 지구 전체가 죽은 물질로 구성된 바위덩어리일 뿐이다. 전 자연은 예측 가능한 법칙에 따라 결정론적으로만 운동(관성의 법칙)할 뿐이다. 여기에서는 계속된 창조 곧 이 세계를 동반하는(concursus) 神의 개념이 자리할 여지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 와중에서 과학자는
자신을 자연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외부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비참여적인 관찰자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폭스와 루퍼트는 17세기 개신교 신관이 바로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에 근거되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당시 개신교 신학자들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당연시 하였고 신학 전통(자연신학) 전체를 기계론적 세계관에 넘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퍼트에 의하면 최근 과학(생물학)에서 주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는 카프라가 말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내용적인 상세함을 더하여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음 도표가 신학의 본성 자체를 재구성하도록 하는 변화된 자연관을 일목 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메커니즘 세계

살아있는 우주

① 기계
② 무생물
③ 무목적적
④ 불활성 원자들
⑤ 죽은 지구
⑥ 결정론적
⑦ 인식 가능
⑧ 탈신체화된 지식
⑨ 비창조적
⑩ 영원한 법칙

 

① 성장하는 유기체
② 장(Fields)
③ 유인자(attractors)
④ 활동 구조들
⑤ 가이아(Gaia)
⑥ 비결정론적, 카오스적
⑦ 어두운 물질(dark matter)
⑧ 참여적 인식 행위
⑨ 창조적 진화
⑩ 습성(habits)

 

무엇보다 먼저 기계적 세계는 성장하는 유기체 우주라는 관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보았다. 1966년 이후 빅뱅(Big Bang) 이론에 영향을 받아 우주는 거듭 성장하며 새로운 구조와 형태들을 산출해내는 생명체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연의 무생명성이 자연이 장(Field)들에 의해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상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애니미즘적 영혼관이 보이지 않은 유기체 조직화 원리 즉 생명 스스로 짜집기 원리라는 Field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지시한다. 세째로 살아있는 유기체의 영혼은 유인자에 의해  성장 동기를 부여받는다는 아르스토텔레스
의 논지가 최근 유인자(attractors) 개념에 의해 과학에 복귀되어지고 본다. 이 개념은 현대 동역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유인자는 목표지점의 견지에서 형태들이 이루어져 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 체계내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유산이 부재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로부터 짐작되는 신학의 모형변이 정도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불활성의 고정된 물질로서의 원자라는 개념으로부터 역동적 에너지로 구성된 활동성 구조로서의 원자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또한 죽은 지구라는 관념이 살아있는 유기체 지구라는 가이아 이론으로 전환됨으로써 옛 신화가 과학의 이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정론은 양자이론에 의해 난파되어졌고 최근에는 우주내의 카오스(혼동) 역할이 인정됨으로써 극미의 세계뿐 아니라 날씨나 두뇌 활동 등 대부분의 자연 체계 내에서 비결정론적 자연관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17세기 이래로 지난 3세기 동안 과학은 자연 세계의 예측 가능성이란 관념에 주술걸려 있었으나 비결정론과 카오스 이론은 우리에게 자연의 자유와 자발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식 가능한 자연계라는 생각도 어두운 물질(dark matter)의 발견으로 지지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우주의 90-99%의 물질이 아직까지 전혀 인식되지 못하고 있음이 판명되었고 우주의 구조와 운명을 결정짓는 이 물질이 무엇인지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카프라도 지적했듯이 신체에서 분리된 과학적 인식이란 관념이 참여적 과학이라는 의식으로 대체되면서 관찰 방식과 실험자의 기대가 관찰 내용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 주체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비창조적 자연 역시 창조적 진화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라 하겠다. 다윈 진화론은 자연 자체가 생물계에 새로운 생명 형태를 생기게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빅뱅이론 역시 성장하는 우주의 진화적 창조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진화하는 세계에서는 불변하는 영원한 법칙이 전혀 의미가 없게 판명되고 있다. 루퍼트 쉘드레이크는 '성(habits)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이란 개념을 선호하는바, 자연은 외부적 법칙에 의해 지배당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내재적 기억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이론(형태공명)이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상과 같은 자연이해의 변화들이 함께 결속되어지면 세계관은 엄청난 변화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변이는 이전의 애니미즘과 같은 이미 성숙된 유기체로서의 자연에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달리 창조성으로 가득찬 계속 성장하는 유기적 세계관을 생각하게 되며 그를 토대로 신학의 재구성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루퍼트는 말하고 있다. 쉘드레이크와 대화하며 본 책을 엮어가고 있는 신학자  폭스 역시 지난 3세기 동안 서구 신학과 예배가 도표의 좌측에 있는 과오들에 의해 지배당해왔다면 이제 神이 죽고 예배가 죽고 인간의 영들이 한없이 쪼그라들은 현 시점에서 도표 우측의 세계관은 영적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의 인용문도 참고해 볼 만한다.
"하느님이 땅, 물, 나무, 동물 그러니까 자연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철도와 아스팔트 길, 비행기와 방송국을 창조했다. 그때부터 인간은 아스팔트 길과 비행기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경험은 성서에 나오는 인간 경험과 확연히 다르다. 인간의 세계 속에서 즉 그의 '창조' 세계 속에서 조물주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상의 이유로 매튜 폭스는 종교개혁과 개신교 신학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인쇄술의 발달과 맞물려 있는 문자의 재발견시기에 일어난 예언 운동인바, 강점이 곧 약점이 되어 예언 운동이 텍스트에 얽매이는 문자적 신학으로 고착되었다고 지적한다. 진리는 문자(logos) 곧 머리에서 이해된다는 가부장적 생각이 성서와 자연이라는 계시의 두 원천에서 자연을 배제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가 과도하게 구속사 중심의 예수지향적인 신학에 기울어져 왔다고 염려한다. 편재한 영의 신학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모든 생명 속에 현존하는 창조주 하느님을 방치해 놓았으며 성화 및 神化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가의 여부만을 문제 삼는 근본주의적 태도는 이런 사태의 귀결이다. 구속자 예수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모든 피조물과 전 우주에 스며있는 우주적 지혜로서 우주적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쉘드레이크의 도표 우측 세계관에서 표상되는 우주적 그리스도, 곧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이 모든 것 안에 있으며 신은 모든 것을 통해서 활동한다는 범재신론에로의 전이는 유신론적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회심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이 점에서 우주적 그리스도의 한 표현이며 신성은 피조물 안에 있게 된다. 따라서 피조물이 억압당할 때 그리스도는 다시금 죽게 되는 것이다. 계몽기 이후 신학이 모든 것을 역사적 예수에로 환원시키려 하였으나 지금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전통을 회복시키고 예언자 예수를 신비주의 그리스도로 균형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러한 신비주의 전통 곧 우주적 그리스도를 회복하여 가르칠 수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생태계 위기 및 영혼을 상실하고 있는 인간 위기에 답을 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폭스는 루퍼트가 사용한 장(Field)의 이미지를 가지고 의미를 상실해가는 영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주 운행을 가능케 했던 고대의 우주 영혼(Anima Mundi) 개념이 모든 것을 포함하되 보이지 않는 조직화 원리로서의 중력장으로 대체되었고, 자석의 영혼은 자기장으로 식물의 아니마는 성장 유기체를 형성시키는 형태 발생장과 상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영혼이 인간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장) 속에 몸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 우주와의 연결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열대우림의 파괴, 낙태, 인간 감수성의 상실
등은 바로 인간 영혼 감각이 쪼그라들어 세계의 기쁨과 고통과의 연결성, 그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일탈된 현존 모습들인 것이다. 믿음의 근본주의적 양태들, 인간중심주의는 바로 우주 및 우주 영혼과의 연결을 거부하는 위선과 편협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큰 것이다. 신비주의와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과학 사조와 기독교(신학)의 영성

우리는 곧잘 새로운 밀레니움시대, 곧 제 3000년 시대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그것이 멀리 있지 않고 단지 몇백일 앞으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새로운 밀레니움 시대는 또는 신학적으로 성령의 시대로서 불리워지기도 하는바,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첫째는 미래에 대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그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불고 싶은 대로 향하는 성령의 임의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둘째로 이제까지 성부 및 성자의 시대에 주목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대상과 존재들이 주목받고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주지하듯 성령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지시적, 도구적 역할로서만 강조되었고 성령운동을 주창한 그룹들이 제도화된 교회들에 의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죄목으로 이단 판명을 받아왔고(몬타니즘), 또 성령론의 불일치로 인해 교회 역사상 수없이 많은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는 이유등으로 성령 그 자체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가치절하되어 왔었다. 바로 경시되어온 성령 자체를 재평가하겠다는 것은 지금껏 인정받지 못했고 간과되었던 대상 및 주제들 즉 인간에 대한 자연, 남성에 대한 여성, 기독교와 서구중심주의, 교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있었던 모든 것들
그리고 교리에 대한 체험, 형이상학적 사변 대신에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 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임의성, 비종결성과 함께 카프라와 쉘드레이크 같은 신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사유 및 세계관의 전환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절대치에서 근사치(확률)로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 전체와 과정을 부분과 구조(이론)보다 강조하는 탈인간중심적, 체험중심적 사고의 전환 - 그리고 전 자연의 카오스적 비결정적 특성과 자연 자체의 법칙성 대신에 그의 습성을 통한 창조성의 강조라는 전 우주 자연속에서 영의 현존에 놀라며 그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신과학 사조들은 바로 오늘날 성령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구체적 양상을 보여주는 지표라 하겠다.
이러한 성령의 시대에 우리는 몸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며 영혼(전 우주)속에 인간 몸(개체)이 있다는 중세 신비가 에카르트의 말이 지시하듯, 영성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도처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직접적'이란 것은 객관적 교리 중심에서 개인적 체험의 중시를 의미하며 '도처에서'라는 말도 교회제도를 넘어 전 우주를 神의 몸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지평확장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회는 영성(The Spirituality)이라는 용어보다는 성령(The Holy Spirit)의 용어를 강조하고 그 구별에 큰 의미를 둔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받은 영은 거룩한 영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배타적으로 구별하려는 기독론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본래 예수가 세례요한의 세례후에 받은 영도 '성령'이 아닌 "그 영"(The Spirit,)이었기 때문에 우리말 성서 개역과 표준새번역에서 성령이라고 한 것은 오역이라는 최근 마가복음서 연구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준다. 바로 여기에서 성령의 시대는 영성의 시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카프라의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는 종교없는 영성은 가능하지만 영성없는 종교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이론 없이도 종교는 가능하나 종교적 영성 없이는 제대로 된 신학이 나올 수 없다는 말도 진리로 인식될 수 있다. 종교를 말하고 신학을 말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재(Reality, 하느님) 체험을 통해 느끼는 영성, 신비로움과의 대면 즉 우주 전체와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귀속감(소속성)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묶는다(연결, 결합)란 뜻을 지닌 종교는 이러한 영성 체험을 제도화시킨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즉 교회 제도란 영성에 대한 원초적 체험이 종교적인 것으로 변모하면서 나타난 결과인데 원초적인 체험이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되고 그 뜻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종교적 역동성이 윤곽을 갖추어 가는 바, 거기서 지성적인 차원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을 토대로 공동체(제도)의 삶과 행동지침이 생겨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영성은 일회적인 종교 체험, 신비로움과 황홀한 만남과 더불어 등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종교적 체험이 행동으로 터져나오는 것, 일상 생활을 통해 종교적인 체험
이 묻어져 나올 때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밥을 먹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모든 일에까지 종교적인 체험이 스며들도록 하는 일, 즉 일상의 삶으로 젖어드는 종교 체험의 존재 양식이 바로 영성이라는 설명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과 관계 맺으신 분으로 인격이기에 그 인격에 대한 체험은 곧 깊은 귀속감(절대의존감정)은 바로 일상의 삶, 공동체적 실천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점차 지적 승인의 차원으로 전락되고 있는 믿음이란 것은 자신의 본성이 깨어나고 자신의 귀속감을 되찾는 영성의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역시 이러한 귀속감, 상호의존성,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더불어 관계맺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감정 표현으로서 영성의 또 다른 본질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성의 증거이자 판단기준은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과 치유의 역사 속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이는 바람이 부는 것을 나뭇가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성을 통해 우리는 종래의 구원중심의 신학과 창조중심의 신학을 상호 연결시킬 수 있는 단초를 얻는다. 즉 기독교의 구원은 본질상 해방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을 온전히 인간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창조 영성으로서의 치유는 하느님의 창조질서(귀속감)를 존중하는 재활용적 삶,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의 숨결, 곧 온전한 생명력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영성이란 응축된 생명력이자 옴살스런 것으로서 안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밖으로 터져나오는 것인바 이로써 내면적인 치유와 외면적인 해방은 동전의 양면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해방과 치유(살림)의 영성을 교육 활동을 통해서 지속성이 담지되도록 해야만 한다. 단 한 번 살리는 영처럼 보이게 할 수 있고 해방하는 힘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지속력을 가지고 살게 하는 힘은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속력은 새로운 영성을 성령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실천적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또한 영성이란 앞서 말했듯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내는 통합성을 가져야 하는 바 이것 역시 교회 교육의 몫이다. 우리의 존재를 이룸에 있어서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지성과 감성도 포함되어 우리의 영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합성으로 증명된 영성이야말로 기독교적 영성의 또 다른 판단기준이 된다. 이 일을 위해 교회 공동체의 교육적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세속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교만해져 있고, 물질에 대한 사용가치에 길들여져 있고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물질적 욕망이 커지며 상대적 박탈감만 더욱 키워가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예식(제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제의 없이는 건전한 교육을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의 제의란 만연되고 있는 자본주의 이념보다 더 크고 위대한 창조 이야기, 위대한 신화들에 자신의 삶을 동화시키는 일을 일컫는다. 예배 및 제의는 놀라움과 경외감을 회복시키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우주론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호기심, 경외, 놀람)을 통해 윤리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실제적으로 만족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을 그칠 수 있는 경험을 갖도록 마음을 훈련하고 인간 마음이 사랑의 행위에 있어 무한하다는 사실, 세상 만물을 치유할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의 고양이 교회 공동체 및 교회교육 고유의 모형으로 자리잡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설교, 예배, 교육 행위는 지나치게 제도화 되고 화석화 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영의 새로운 능력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고 싶은 대로 부는 영은 우리가 원하고 멈추고 싶어하는 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주는 단행본을 참고하십시오)

환경신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