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와 영성
  
   (The Spirituality in the Old Testament)

김이곤

현 한신대 구약학 교수로서 신학 대학원장직을 맡고 있다.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출애굽기 신학', '창세기', '고향이 다른 사람들' 등의 저서가 있다.
소제목
1."하나님 이름이 없어요"
2.하나님의 속성 "어머니의 자궁(matemal womb)"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Vor Gott, Ohne Gott)

'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고 씁니다. 희랍어로는 이것을 '프뉴마' 라고 합니다. 저는 '영'을 '루아흐'와 '프뉴마' 라는 어떤 실체로 이해하기보다 '영적이다' 라는 그런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또 '영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사람이 안 보는 데서는 하나님이 안 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산다는데 그것이 어디서 사는 것입니까?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살면서 때때로 "아유, 더러운 세상" 이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세계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거죠.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세속 세계'라 합니다. 두 개로 나누어진 세계를 왔다갔다하는 긴장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한 분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인데 가끔 놓칩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속 세계,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영성의 삶을 산다라고하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때 삶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영성'이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모성적 하나님(maternal God)
우리는 세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아버지, 아들, 영이라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면서, 또 아들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영의 활동 영역 안에서 살면서 우리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늘 만나는데 그 분은 아들function을 가지고서 일하십니다. 아들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의 은혜, 대속적인 은혜라고 하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의 표상을 끌어올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경험밖에는 모르니까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라는 표상을 가져왔지만 사실 더 성서적인 표현은 어머니라고 저는 봅니다. paternal한 분이 아니라 maternal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상을 우리는 가부장제의 전통 아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찾지만 사실, 성서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에 들어가 막 헤매다보면 어머니의 이미지만 만납니다. 끝도 없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끔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본질만은 maternal, maternity이에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면, 특히 이사야 40장 이후 부분을 볼 때 어머니를 만난 것 같습니다.

포착하기 어려운 하나님
 제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 손에 포착된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서 영성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Elusive Presence'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외치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네 앞으로 지나가마." 하고 지나가셨는데 아마 광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지나가셨을 겁니다. 포착이 안되도록 빠르게 지나가셔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어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까지 그들이 줄기차게 말한 신앙의 세계 속에서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을 보면 죽어요. 구약에서 신약까지 계속되는 가르침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의 고대 신앙세계에서는 가나안 종교나 헷 종교, 앗수르, 시리아, 바빌론, 에집트, 소아시아, 희랍, 로마 등 모든 종교들이 하나님, 신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치, 사회 등 모든 것이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철저히 종교적인 고대 중동 세계 속에서 모든 종교가 신을 가시화, 형상화하고 그래야 그 신의 권위가 인정받는다고 했던 그러한 종교 세계 속에서 오직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이스라엘 민족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형상화해서는 안돼는 분이라는 출발을 하고 있어요.

고대 언어 - 바빌론 언어, 앗수르 언어 - 를 분석하고 비교해보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것은 우상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만든 종교 - 사람이 종교성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종교 - 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게 아니예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까지 하나님 이름을 말한 곳이 '야훼' 란 이름 하나예요. 그래서 제가 이 '야훼' 라는 이름을 밝히려고 그럽니다. 정말 이름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종교가 시작된 후 그 이름이 됐어요. 불가피하게 이름이 됐지만 그들은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full name으로 부른 바가 없어요. 그래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부르는 지 모르게 됐죠. '야'로 시작하는 것은 확실해요. 그래서 그들이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할 때는 하나님의 initial을 써서 "야를 찬양하라", "할렐루야"처럼 '야'를 썼어요. 그러나 '야' 다음에는 안 썼죠. 그러니까 읽지를 못 해요. 랍비들보고 읽으라고 하면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히브리말 성서를 읽을 때 이 이름자가 나오면 '아도나이'로 읽으면서 지시를 하기 위해서 국문학자들이 점으로 된 모음기호를 찍었어요. 그런데 그런 문맥을 모르는 한국 사람, 미국 사람, 독일 사람들이 그대로 읽어버리니까 '여호와'라고 읽게 됐어요. 하여간 훼,'야'로 시작하는 그 이름이 어떻게 그들에게 고요한 신앙과 찬양, 기도의 대상으로써 쓰여져 왔을까요?

그들이 만났던 그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요. 그것을 체험해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체험한 사람들이 있다 이겁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시니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럼 어떻게 나타나셨나?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사건으로서 나타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본 바가 없어요. 또 볼 수도 없구요.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이 기독교 성서의 영성이예요. 그래서 제가 신앙 생활하면서 성서보고, 공부하고,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면서,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야훼라는 이름이 구약 성서에 현존하고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손댈 수 없는 거룩한 네 개의 자음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하는 이 글자 - 으로 된, 이스라엘이 처음 하나님을 체험했을 때 이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한 그분, 그분이 누군가, 그분이 어떤 분이길래 이 네 개의 자음으로 표시할 수 있나? 이것은 무한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야' 라고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유대인들은 그 글자를 알고는 있지만 부르지는 않죠.

성서적으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그것이 처음 표현됐다고 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타지 않는 불꽃떨기를 보았을 때 그게 너무도 놀라움입니다, 불은 붙었는데 가시가 타지 않는다고 하는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도대체 저 신비가 뭘까. 그래서 가까이 가니까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모세가 신학적인 리비도가 충동해서 물었어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실재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무언가, 그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모세가 알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모세 이전에 이스라엘의 대표적 선조인 야곱도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주여,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왜 내 이름을 물어?" 하고 끝냈단 말이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대답을 안 했어요. 또 좀 후대인 사사시대에 가면 삼손의 아버지가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 때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는 비밀이다." 그랬어요. 개역 성경에는 '나는 기묘다.', 공동번역에는 '나는 비밀이다.' 그랬어요. 대답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기 3장 13절에서 불꽃떨기 앞에서 물은 것까지 포함해서 구약에서 딱 세 번이거든요.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는 엄청난 일로 지금 보냄을 받아야 할 판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갈 수 있나요. 적어도 보내신 분이 누구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권위를 가지고 말해야 합니까? 보내신 분을 누구라고 해야 합니까?
아주 굉장히 중요한 찬스를 이용해서 모세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런 충동이 성서에서 모세의 입을 통해서 제기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이 지금 여기서 수수께끼 같고 미스테리같은 부분입니다. 제대로 번역된 성서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나다."라는 번역이 가장 본문 자체에 근접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개역 성경은 그렇게 번역 안하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구약 성서에 매우 철학적인 '나는 자존자다'라는 뜻이 있다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은 맞지 않은 해석입니다. 그렇게 번역한 것은 상당히 철학적인 냄새가 납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희랍 사람들에 의해 희랍말로 번역된 구약 성서가 그런 냄새를 풍겼습니다. 스스로 있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끊임없이 고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더불어 구원의 행위, 또는 구원의 사건을 보여주신 분이죠. 'God who acts', 끊임없이 행동하는 분입니다.
그냥 'God who is'가 아닙니다. 시편 121편에 나오듯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 아니하도록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바이거든요. '스스로 존재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의 매우 철학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이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할까, 그 분을 설명할 수 있는, 그분을 묘사할 수 있는 단정적이고 아주 집약적인 표현이 '야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 성서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거의 상식화되어 있지만 - 동사입니다, 문장입니다. 이름이 동사고 문장이라는 거죠. '그가 무엇 무엇을 하신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그가 ∼이다' 가 아니라 '그가 ∼있게 한다' 이런 개념입니다. '그가 있게 한다' '있게 한다' 는 것이 뭘까, 없는 것을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이 말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야훼'란 말이 창조라는 말을 갖고 있다는 학설이 물론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이 분야를 계속해서 연구하고 고고학적인 자료를 대비하면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시는 분,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있게 하시는 분, 창조하시는 분, 쉬지 않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창조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처음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다, 창조주시다, 이것이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역사적인 행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때 가장 집약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매우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십니다. 태초에 한 번 천지를 창조하고 가만히 쉬면서 부채 부치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셨어요.

출애굽기 3장 14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목동 모세가 감히 용기를 내어 애굽으로 갑니다. 세계 초강대국 에집트 제국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볼모로 잡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그 속에 뛰어들어, 그 손아귀에서 민족을 건져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에 의한 기적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마수에서 해방되는 사건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건져주셨다, 해방시켜주셨다'는 체험입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체험한 것인데, 하나님을 만난 것인데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빌려서 말을 했는데 그것이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스라엘 백성을 감싸서, 홍해를 마른 땅처럼 지나가게 했다. 놀라운 경험이죠. 역사적으로 재건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겪은 것,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는 확신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간증할 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이면서 간증해보신 분 계세요? 하나님 만난 경험 아무도 그렇게 못 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여기서 만나십시오. 여기 이외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하나님의 모양을 그리려고 하면 다 우상이 됩니다. 우상에 빠지면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지금의 거품 경제와 거품 신앙이 바로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발전
하는 것이 아니라 망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공룡을 만들어 놓았더니 공룡한테 잡아먹히는, '쥬라기 공원' 은 현대 문명을 풍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비대해집니다. 비대해지는 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크다, 하나님은 힘이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 나온다. 그런 식으로 막 몰고 갔습니다. 성서가 뭐라 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막 몰고 갔어요. 그래서 막 일으켜 놓았습니다. 이게 거품이죠. 성서로 돌아와야 되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과제는 정말 거듭나서  모두가 성서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서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문자화된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여기서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명기 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 속에서 나타나시고 화염 속에서 나타나시지만 하나님을 아무도 본 바가 없다. 정말 두렵건대, 조심하라, 하나님을 얼굴로 보지 마라. 하나님은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만난다. 이것입니다.

다음장: 하나님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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