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와
영성 현 한신대
구약학 교수로서 신학 대학원장직을 맡고 있다.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출애굽기 신학', '창세기', '고향이
다른 사람들' 등의 저서가 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Vor Gott, Ohne Gott) 그러나 사실 우리는 한 분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인데 가끔 놓칩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속 세계,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영성의 삶을 산다라고하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때 삶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영성'이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모성적 하나님(maternal God) 포착하기 어려운 하나님 고대 언어 - 바빌론 언어, 앗수르 언어 - 를 분석하고 비교해보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것은 우상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만든 종교 - 사람이 종교성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종교 - 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게 아니예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까지 하나님 이름을 말한 곳이 '야훼' 란 이름 하나예요. 그래서 제가 이 '야훼' 라는 이름을 밝히려고 그럽니다. 정말 이름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종교가 시작된 후 그 이름이 됐어요. 불가피하게 이름이 됐지만 그들은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full name으로 부른 바가 없어요. 그래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부르는 지 모르게 됐죠. '야'로 시작하는 것은 확실해요. 그래서 그들이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할 때는 하나님의 initial을 써서 "야를 찬양하라", "할렐루야"처럼 '야'를 썼어요. 그러나 '야' 다음에는 안 썼죠. 그러니까 읽지를 못 해요. 랍비들보고 읽으라고 하면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히브리말 성서를 읽을 때 이 이름자가 나오면 '아도나이'로 읽으면서 지시를 하기 위해서 국문학자들이 점으로 된 모음기호를 찍었어요. 그런데 그런 문맥을 모르는 한국 사람, 미국 사람, 독일 사람들이 그대로 읽어버리니까 '여호와'라고 읽게 됐어요. 하여간 훼,'야'로 시작하는 그 이름이 어떻게 그들에게 고요한 신앙과 찬양, 기도의 대상으로써 쓰여져 왔을까요? 그들이 만났던 그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요. 그것을 체험해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체험한 사람들이 있다 이겁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시니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럼 어떻게 나타나셨나?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사건으로서 나타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본 바가 없어요.
또 볼 수도 없구요.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이
기독교 성서의 영성이예요. 그래서 제가 신앙 생활하면서 성서보고,
공부하고,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면서,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야훼라는 이름이 구약 성서에 현존하고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손댈 수 없는 거룩한 네
개의 자음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하는 이 글자 - 으로 된, 이스라엘이
처음 하나님을 체험했을 때 이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한 그분, 그분이 누군가, 그분이 어떤 분이길래 이 네 개의 자음으로
표시할 수 있나? 이것은 무한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야'
라고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유대인들은
그 글자를 알고는 있지만 부르지는 않죠. 성서적으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그것이
처음 표현됐다고 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타지 않는 불꽃떨기를 보았을
때 그게 너무도 놀라움입니다, 불은 붙었는데 가시가 타지 않는다고
하는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도대체 저 신비가 뭘까. 그래서 가까이 가니까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모세가 신학적인
리비도가 충동해서 물었어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실재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무언가, 그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모세가 알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모세 이전에 이스라엘의 대표적 선조인 야곱도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구약 성서에 매우
철학적인 '나는 자존자다'라는 뜻이 있다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은 맞지
않은 해석입니다. 그렇게 번역한 것은 상당히 철학적인 냄새가 납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희랍 사람들에 의해 희랍말로 번역된 구약 성서가
그런 냄새를 풍겼습니다. 스스로 있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스스로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끊임없이 고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더불어 구원의 행위, 또는 구원의 사건을
보여주신 분이죠. 'God who acts', 끊임없이 행동하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목동 모세가 감히 용기를 내어 애굽으로 갑니다. 세계 초강대국 에집트
제국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볼모로 잡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그 속에
뛰어들어, 그 손아귀에서 민족을 건져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에 의한 기적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마수에서 해방되는 사건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건져주셨다,
해방시켜주셨다'는 체험입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체험한 것인데, 하나님을 만난 것인데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빌려서 말을 했는데 그것이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스라엘 백성을 감싸서,
홍해를 마른 땅처럼 지나가게 했다. 놀라운 경험이죠. 역사적으로 재건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겪은 것,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는 확신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간증할 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이면서 간증해보신 분 계세요? 하나님 만난 경험 아무도 그렇게 못
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여기서 만나십시오. 여기 이외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하나님의 모양을 그리려고 하면 다 우상이 됩니다. 우상에
빠지면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지금의 거품 경제와 거품
신앙이 바로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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