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당/ 생태학적 신학자들 - 18 생태학적 성서학자,
'생태학과 성서'의 저자 이정배 / 부설연구소 소장, 감신대 교수 많은 성서학자들이 있지만 생태학을 주제로 성서를 연구한 학자들은 드물다. 특히 신약학자들은 신약성서가 구약보다 기록시간이 짧고 더욱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였던 관계로 생태학적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는 이런 통념을 깨고 신약학자로서 신구약을 생태학적 주제로 풀어내는 기막힌 저술을 집필하였다. 그리 두껍지 않은 '생태학과 신학( kologie und Bibel)'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본문을 생태학적 관점을 갖고 주석하고 해석하였다. 그런 분석을 토대로 교회의 윤리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기에 대단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지금 독일교회 내에서 환경목사로서 일하고 있으며 독일 내 많은 신학대학에서 생태학과 관계된 성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의 책은 현재 '생태학과 신학(종로서적, 1992)'에 번역 수록되어 읽히고 있는 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의 생태계 위기를 인간과 하느님 간의 관계성의 변화, 곧 죄와 타락의 관점으로 읽어낸다. 본래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 형상을 부여하시고 당신이 지은 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는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통치위력을 잘못 이해한 탓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온 땅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창 1:29-30) 이렇듯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의 죄악으로 깨어진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7-18) 이는 농약에 찌든 농산물, 유전자조작식품, 환경호르몬을 양산하고 인스턴트식품들이 삶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는 원형적 사건이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죄가 자연이 인간에게 풍부한 밥상을 차려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하느님 보시기 좋았던 자연은 급속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예언서들에는 전 우주적 재앙에 대한 경고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너희에게 비를 내리지 않게 했던 그였다. … 두 개, 세 개의 도시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다른 도시에로 비틀거리며 갔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암 4:7) "들판은 망그러지고 밭은 메말랐다. 곡식은 다 떨어지고 포도주는 바닥이 드러났으며 올리브 기름은 말라버렸다. 기가 차느냐, 농부들아? 포도원을 가꾸던 자들아, 울어라."(욜 1:10) 결국 이 본문은 하느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창조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 전체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을 지키시기 원하시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죄인들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라."(시 104편 35)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만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을 떠났던 인간이 다시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게 될 때 타락된 자연도 다시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며 풍성한 식탁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대머리 산에서 개울물이 흐르고 평지에서 샘물이 터지리라, 마른 땅에서 물이 솟아 나와 사막을 늪으로 만들리라."(사 41:18)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키고 따른다면 땅이 소출을 내고 들의 나무가 다시 제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레 26:3).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종말의 때에 이르러서야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축복은 오로지 야훼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태학적 성서학자로서 프리드리히가 오늘의 교회와 문명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의 자연 환경을 이대로 방치해 인간과 자연이 함께 멸망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하느님 형상을 새롭게 자각함으로 이 땅을 하느님의 공동 창조자로 만들어 놓을 것인가? 신약성서학자인 프리드리히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죄인의 칭의사건이 우주론적 결과를 갖는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핵심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바울의 인간학이 신약성서의 우주론과 동반론의 심층 차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처음 하늘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은 겉옷처럼 부식할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하느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요 1:3)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인간을 전혀 다른 인간으로, 그리스도 안의 새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여전히 생태학적 위기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