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나무를 심자
장도곤 목사(나심교회  숭실대 겸임교수)

콘크리트는 돌이다

서울의 산을 올라가 보라! 사방 팔방을 둘러다 보아도 전부 콘크리이트, 콘크리이트뿐이다. 아파트, 아파트, 빌딩, 빌딩의 연속이다. 콘크리이트의 회색과 함께 하늘도 공해로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우리는 회색의 도시에 살고 있다. 아무도 내 땅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땅이 100평이면 100평 전부에다 건물을 짓기를 원한다. 내 땅이 1000평이면 1000평을 전부 건물로 채우기를 원한다.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은 건폐율 100%의 건물을 짓기를 원한다. 해당 지역마다 건폐율을 규정하는 법규가 있건만 이 법규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세상의 추세에 합류하여 건물을 짓고 있다. 콘크리이트로 가득 찬 세상 안에 교회도 또 하나의 콘크리이트를 채워 넣고 있다. 성전을 건축할 때 가장 큰 관심사는 주어진 땅 안에서 최대의 교인을 수용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때문에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에는 마당이 없다. 정원이 없다. 나무가 없다. 주차장도 없다. 내 땅에 주차장을 만드는 것이 아까워 주변의 도로에 주차하자는 계산이다. 우선 성도를 채워 넣고, 주차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발상이다. 때문에 주일이면 교회 주변에 주차전쟁이 일어나고, 교회와 주변의 주민들과 주차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본 단체에서 교회녹화사업을 실시하는 것은 자연과 삼림의 파괴로 공해와 오염이 극에 달한 한국에 매우 필요한 일이다. 이번 사업에는 시범적으로 몇 교회가 참여하며 교회의 담을 허물고, 교회의 땅에 꽃과 나무를 심고, 옥상에 정원을 만들었다. 조금 더 여유가 있는 교회는 오솔길, 자연학습장, 숲을 만들었다. 이는 공해와 오염에 찌들은 현대의 도시에 교회가 녹색의 쉼터를 제공하고자 하는 조그만 노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를 보전하고자 하는 조그만 몸짓이다. 그러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본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자신의 것을 양보하여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세상의 회사, 단체들은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므로 남의 이익보다는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므로 땅값이 비싼 도심지 안의 내 땅을 양보하여 그곳을 녹지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할 것"을 명령받았다(고전 10:33). 나무를 심는 것은 교회가 먼저 양보하는 것이다. 세상은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가 먼저 양보하며 내 땅에 나무를 심는 것은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나무를 심으며 세상에 조그만 빛을 비출 때, 세상도 변할 것이다. 교회가 나무를 심을 때, 공해와 오염에 찌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유익을 주게 된다. 지금보다 더 맑은 공기를 교회와 이웃이 공유하게 되고, 교회가 이웃에게 쉼터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이웃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나무를 심는 것은 공해와 오염의 문제가 심각한 21세기에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또한 나무를 심으며 창조를 보전하는 것은 21세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다. 나무를 심으며 하나님의 창조를 보전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자!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교회의 사회봉사를 통하여 교회의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사역이 더 효과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나무를 심는 의미는 다양하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보전의 명령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현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봉사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봉사는 효과적으로 선교의 사명을 수행토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창 2:8). 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도 있었고, 강도 있었고,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종류의 들짐승이 있었다(창 2:9-20). 에덴은 인간에게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었다. 지금도 인간의 손이 닫지 않은 주님이 지으신 세계는 우리에게 그 낙원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 기묘하고 웅장한 자연을 보며 주님의 위대함에 고개 숙이며 그를 찬양한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 해와 저녁 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 하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셨다. 맑은 물, 푸른 산을 주시고, 또 그 속에 수많은 종류의 나무와 꽃과 새와 물고기가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셨다. 물은 나무와 꽃에게 양분을 제공하고, 나무는 새의 먹이와 쉼터와 집이 되게 하고, 또 인간에게는 과실과 그늘과 자원을 제공하였다. 하나님이 설계한 생태계의 지속원리와 에너지 보존원리는 완전하며 영원한 것이다. 나무를 포함한 식물은 탄산가스와 물, 그리고 에너지를 흡수하여 엽록체에서 포도당을 합성하면서 동물과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생산한다. 인간과 동물은 식물이 생산하는 포도당 또는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부산물로 탄산가스를 내놓는다. 동물이나 식물이 죽으면 토양이나 물 속에 사는 미생물들이 이를 분해한다. 이 분해작용에 의해 물과 탄산가스가 생성된다. 이 물과 탄산가스를 흡수하고, 에너지를 이용하여 식물은 다시 포도당과 산소를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은 영원히 반복되며 생태적 균형을 이루며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원리 안에서 살면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무궁한 세월을 이 지구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이다. 타락한 인간이 생태계를 대규모로 파괴하기 전까지 모든 피조물은 이렇게 분해자, 생산자, 소비자로서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나무 없는 세상 - 죽음의 세상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빛, 궁창, 바다, 땅, 식물, 해, 달, 별, 새와 물고기, 그리고 동물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 인간이 생존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계 안에서 소비자의 정점에 있는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 소비자인 인간이 살려면 생산자인 다른 피조물과 생산자에게 원료를 제공하는 분해자가 인간과 함께 살아주어야 한다. 이는 인간은 영원토록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살기를 원하셨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시기 전에 먼저 다른 피조물에게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명령하셨다(창 1:22, 8:17).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의 생육번성을 먼저 명하시고, 그 후에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다(창 1:28, 9:1). 문제는 인간이 자신들의 생육번성권을 존중하며 최대로 누리고 있지만, 다른 생물의 생육번성권은 무시하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0년간 지구 상의 인구는 3배 이상으로 증가하는 반면, 다른 피조물은 반 이하로 줄어들고 있다. 즉 20세기초 세계의 인구는 20억이 안되던 것이 1999년 60억이 되었다. 19세기초에 약 2억종 정도 존재하던 다른 피조물은 현재 반 이상이 멸종되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다른 피조물들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멸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1년에 1000종 정도 다른 생물이 멸종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이후 매년마다 3-4만종의 생물이 멸종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에 100종의 생물이 멸종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조치가 없으면 2000년대에는 매년 더 많은 생물이 멸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면 20년 내에 현존하는 생물의 20%가 멸종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든 만물이 함께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너지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다른 피조물도 생육하고 번성해야 인간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다른 피조물을 먼저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산은 하지 못하고 소비만 하는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하나님은 생산자와 분해자를 미리 창조하신 것이다. 다른 피조물이 멸종하면 인간도 살 수 없다. 인간의 과다한 번성은 다른 생물의 멸종뿐만 아니라, 결국은 인간의 죽음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른 피조물과 함께 살아갈 결단을 내리고,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며 산과 들을 부수고 강산을 오염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한 아름답고 풍성한 숲과 강산을 파괴하며 대신 각박한 콘크리이트의 산을 채워넣고 있다. 좀더 넓은 평수에 살고, 더 편안히 살고,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산이 들이 파괴되고 거기에 사는 나무가 무참히 잘리고 있다. 나무가 제거된 도시에서는 공장과 자동차에서 배출하는 탄산가스와 유해가스가 처리가 되지 못한다. 나무의 정화능력을 초과하는 가스들은 대기에 남아있게 된다. 이것이 공해가 되어 인간뿐만 아니라, 나무와 곤충과 새와 동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고통하게 한다. 하나님이 설계한 생태계의 지속원리와 에너지 보존원리를 인간이 파괴한 결과이다. 인간이 창조의 섭리를 파괴한 결과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고통하게 한다.

이미 서울 등 대도시의 대기오염은 나무의 정화능력을 넘어섰다. 나무가 처리하지 못한 탄산가스와 유해가스, 그리고 먼지는 나무에 고통을 주고 있다. 숲과 산을 제거하고 콘크리이트의 산을 채워 넣고, 대신 심은 한 줄의 가로수나 소량의 나무 및 식물은 도시의 공해를 견디지 못한다. 특히 도시의 가로수들은 오염된 대기, 먼지 등으로 인해 성장이 안되고, 병들어 죽고 있다. 나무도 같이 많이 모여 숲이 형성돼야 현재의 극심한 도시의 대기오염을 이길 수 있다.

공해에 찌들은 병들은 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다른 생물도 살지 못한다. 현재 서울 등의 대도시에는 나비와 나방, 곤충 등을 찾아볼 수 없다. 도시에는 이들의 먹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도시에서 살 수가 없다. 나뭇잎이 이들의 먹이인데, 서울의 나무는 공해물질에 오염되어 있어 나비와 나방과 곤충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때문에 먹이를 찾아 이들은 대도시를 떠난 것이다. KBS에서 99년 방영된 환경다큐멘타리는 이러한 대기오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이 방송은 나방의 애벌레를 소재로 실험을 보여주었다. 병 속에 나방 애벌레를 넣고, 먹이로 서울의 가로수에서 딴 나뭇잎을 병 속에 넣주었다. 애벌레가 나뭇잎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일분도 되지 않아 갑자기 몸을 심히 꿈틀대며 발작에 가까운 요동을 쳤다. 괴로워하던 이 애벌레는 급기야 파란 물을 물총을 쏘는 것처럼 토해 냈다. 이 애벌레는 삼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먹이가 없으니까 서울에 나비와 곤충이 살수가 없는 것이다. 공해에 찌들은 서울의 나뭇잎은 이들의 먹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대도시에 나비와 곤충만 없는가? 새도 없다. 나무가 없는 곳에는 새도 살지 못한다. 대도시의 공해 속에서는 새도 살지를 못한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서울의 중심지 주택가에서 새가 아침마다 노래를 했다. 나비도 있었고, 풍뎅이, 장수하늘소 등의 곤충도 잘 살고 있었다. 더 이상 먹이를 찾을 수 없는 새들은 이미 대도시를 떠났다. 대도시에 다른 피조물이 못산다는 것은, 대도시의 시민들도 이미 이런 나쁜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취학 전 아동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생 중에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공해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공해로 인하여 기관지와 호흡기가 약한 아동들이 먼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70년대의 일본처럼 도심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일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녹화, 만물의 찬양 회복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를 원하신다(시 96, 98편).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시 96:11-12). 하나님은 모든 호흡있는 자의 찬양을 원한다(시 150편). 즉 하나님은 하늘, 땅, 바다, 물, 나무, 나비, 새 등 모든 만물의 찬양을 원한다. 그러나 지금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다. 점점 더 하늘, 땅, 바다, 물, 나무, 나비, 새들의 찬양이 없어지고 있다.

공해로 찌들은 하늘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우리의 하늘은 방사능, 황사, 산성비, 오존, 자동차 배기가스, 공장 매연으로 찌들어 고통하고 있다. 시편 19편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노래하나, 공해로 찌들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가로수는 병들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산 위의 나무보다 서울 시내의 가로수가 더 빨리 단풍이 든다고 한다. 온도가 낮은 높은 산 위의 나무가 먼저 단풍이 드는 게 정상이다. 공해에 찌들은 서울의 가로수는 조로하여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그 잎을 먼저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공해, 오염, 먼지로 나무가 찌들은 서울은 이미 나비와 새들의 찬양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하늘, 땅, 바다, 물, 나무, 나비, 새 등 모든 만물의 찬양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찬양을 원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듣는 깨어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보호하며 보전할 때 모든 만물이 다함께 드리는 찬양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은 인간을 영적으로 죽게 만들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과학문명의 우상, 핵무기의 우상, 돈의 우상, 더 좋은 차, 더 큰집의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더 많이, 더 편하게"라는 우상은 하나님의 창조를 마구 파괴하게 한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인데, 나 개인의 행복과 편함을 위해 마구 파괴한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가 나무를 심는 것은 이웃에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창조를 보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설계한 생태계의 지속원리와 에너지 보존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나무를 심는 것은 모든 만물의 찬양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회여, 나무를 심자!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며, 나무, 나비, 새, 숲, 물고기, 강과 바다가 인간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자!

나무 심기는 생명 살림이다

이번 녹화사업의 중점은 교회의 땅에 꽃과 나무를 심는 것이다. 즉 교회가 교회의 땅에 시행하는 녹화사업이다. 이는 세상에 빛을 비추며 교회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확대되어 더 많은 교회가 참여하고, 더 많은 단체가 참여하면 한국의 환경이 달라질 것이다. 한국의 공기가 달라질 것이다. 한국의 도시에 나비, 곤충, 새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더 발전하여 교회와 단체의 전국적인 나무심기운동으로 발전하면 더 적극적인 환경보전, 적극적인 창조보전이 이루어 질 것이다.

나무는 하나님이 이 지구에 주신 보물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능력있는 생산자이다. 많은 피조물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산소의 생산자이다. 나무의 가장 큰 기여는 공기를 정화하는 기능이라고 본다. 나무는 대기의 불순물인 유해가스를 흡입하여 동물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산소를 생성해준다. 이는 인간과 다른 생물에 삶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대기중의 이러한 유해가스를 나무가 처리해주지 않는다면 인간과 동물은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 도시에 대기가 정화되지 못하여 공해가 심해지면 노약자부터 호흡기 질환에 걸리게 된다. 이것이 심해지면 인간과 동물은 질병을 겪으며 죽어가게 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공해는 사람들에게 육체적 질병과 함께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공해로 인해 두통과 호흡기 질환으로 시달리는 사람은 정신적 여유가 없어지게 된다. 게다가 도시사람들은 자동차 가스, 공장 매연, 교통난, 주차 전쟁, 넘치는 인구로 인해 스트레스와 공해로 시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사람들의 인심은 각박해진다. 만성적인 공해와 높은 인구밀도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대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도시주변에 삼림욕장이 제공되기도 한다. 나무가 있는 숲 속에 들어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신에 쌓인 찌꺼기를 닦아내고 깨끗한 심신을 만들자는 것이다. 피로할 때, 삶에 지칠 때, 골치가 아플 때 숲으로 들어가 맑은 공기를 마시면 심신이 새로워짐을 느낄 수 있다. 실지로 편백 등의 소나무에서는 방향성 물질인 테레핀이 나온다. 테레핀은 향기있는 휘발성 기름인데, 자율신경을 자극하여 체내분비를 촉진한다. 그러니까 감각계통이 활성화되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대도시의 주민이 삼림욕장까지 왔다 갔다하는 동안 교통난으로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더구나 대도시 주변의 휴양지와 오락시설에 근접하는 길의 교통의 정체는 더 많은 자동차 배기가스를 배출하게 되어 공해의 요인이 된다. 때문에 도시의 공해문제를 해결하며, 주민에게 쾌적한 삶을 제공하려면 도시 내에 공간을 확보하여 나무를 심고, 공원을 만들고, 가능한 한 많은 숲을 조성해야 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육체과 정신의 건강증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나무는 많은 피조물의 에너지원인 포도당을 제공한다. 즉 수많은 초식동물들의 먹이가 되어 준다. 또한 쉼터와 집이 되어 준다. 놀라운 것은 가뭄 때에 나무는 저장했던 물을 내주어 마른 시내에 물이 흐르게 한다. 이 덕분에 냇물에 사는 송사리와 기타 다른 생물들이 가뭄 때에도 상당한 기간을 생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무는 미생물, 곤충, 나비, 새 등의 생물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더 잘 살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가 많이 올 때 나무는 홍수를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나뭇잎과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여 물이 한꺼번에 많이 내려가는 것을 막아준다. 1996년 이래로 북한이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산의 나무를 잘라 연료로 쓸 뿐만 아니라, 식량의 증산을 위해 나무를 자르고 산을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는 산은 많은 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흐르는 물은 표토뿐만 아니라 깊게 흙을 깎아내려 전국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심토가 농지를 뒤엎게 되었다. 때문에 북한의 많은 농지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불모지가 표토를 가진 기름진 농지가 되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된다. 나무를 마구 자른 북한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중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해준다. 나무가 있는 풍경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며, 이는 인간의 정서 함양에 영향을 미친다. 꽃이 만발한 나무와 열매가 풍성한 나무는 인간에게 풍성한 삶을 제공해준다. 고속도로에 늘어선 나무와 숲은 운전자의 눈의 피로를 줄여 교통사고를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나무는 방풍의 효과를 제공한다. 나무는 자신의 키의 50배 거리까지 바람을 막아주며 약화시키는 기능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나무는 방음효과도 제공한다. 특히 침엽수림은 외국에서는 방음을 위해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국토가 좁은 한국에서는 방음수를 심을 공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부분의 큰 도로 옆에는 방음벽이 흉하게 자리잡고 있다. 요즈음 고속도로 방음벽에 담쟁이 등의 넝쿨성의 식물을 식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일단 보기에 좋고, 방음효과도 증가되고, 공기도 정화되니까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는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나무는 그늘을 제공하며 인간의 쉼터가 되어주며 인간에게 안식을 제공한다. 도시의 보도에 길쪽과 안쪽에 나무를 심는다면 뜨거운 여름에 그늘을 제공하여 보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그 중간, 중간에 공간을 확보하여 벤치를 놓으면 도시의 주민에게 좋은 쉼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요즈음 한국의 신도시에 부분적으로 보도의 양쪽에 나무를 심어 오솔길을 만들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또한 나무는 인간에게 필요한 용재가 된다. 죽어서도 인간에게 생활용품, 가구, 집이 되어 봉사하는 것이 나무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간과 모든 만물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것이 나무이다.

좁은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느냐고 한국의 자연은 점점 파괴되고, 콘크리이트가 도시를 채우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풍부해져도, 도시인의 삶은 점점 더 각박해진다고 한다. 환경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도록 창조하셨는데, 하루에 흙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인공구조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은 공허를 느낄 것이다. 나비와 새를 잃은 서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밖힌 외로움에 고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인공구조물로 채워진 현대의 문명 속에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점점 더 공격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좁은 땅에 사는 현대의 도시인들은 이웃과 주차문제 때문에 싸움을 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주차문제로 싸우다가 상대방에게 총을 쏜 사람이 있었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서울시민은 서로 부딪히며 싸우기도 하고, 서로 자리에 앉으려고 심심치않게 싸움을 하기도 한다. 실험에 의하면 쥐를 좁은 공간에 많이 넣어 놓으면 서로 물고 뜯고 싸움을 한다고 한다. 삭막한 환경이 우리의 감성에 영향을 미쳐, 서로 싸우는 각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이럴 때일수록 도시에 나무를 심고, 인간의 삶에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나무를 심으면 나비, 곤충, 새 등의 다른 피조물이 다시 대도시로 돌아올 것이다. 식물, 동물, 물고기, 새 등의 모든 만물은 인간과 함께 살라고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것이다. 대도시에서 이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대도시 주민의 온전한 인성의 형성에 필요한 요소가 제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의 충족에 필요한 그 무엇이 결여되는 것이다. 황폐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정서적 불안정을 겪게 된다. 나무를 심어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인성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나무가 인간에게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나머지 모든 피조물이 합쳐진 자연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

기독교의 정체성은 생명살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도시의 녹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내가 나무 한 그루 심는다고 한국이 변할까 하는 기우를 버리자. 내가 변하면 내 이웃이 변하고, 내가 변하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변한다는 진리를 믿자! 백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 한 번의 실천이 더 효과가 있다. 교회가 나무를 심으면 자동적으로 차세대에게 환경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이는 또한 다른 교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모범이 된다. 교회가 모범을 보이자! 교회의 건폐율을 낮추고 그 공간에 나무를 심자! 이웃 사랑을 먼 데서 찾지 말자. 나의 이웃에 부족한 것을 교회가 솔선하여 채워주면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교회의 정원에 의자 놓고, 테이블 놓고 이웃이 쉴 장소를 제공하면 금상첨화이다. 도시교회의 땅에 나무를 심고 녹지공간을 만드는 것은 비싼 땅을 사회에 헌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것이 발전하면 주변의 빈터에 나무를 심고 관리하는 일도 교회가 할 수 있다. 이것이 더 발전하면 한국의 나무에 관한 법을 강화시키는 데에도 교회가 참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땅을 개발하여 단지를 조성할 때 기존 숲과 기존 식생을 보전하는 좋은 문화를 형성하는데 교회가 앞장 설 수도 있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은 단지를 조성할 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기존 숲과 기존의 좋은 나무를 보존한다. 이와 반대로 한국은 우선 개발 지역의 모든 나무와 숲을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공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공사가 끝날 무렵 조그만 묘목을 사다가 건물 주위에 심는다.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공사비가 싸게 들기 때문이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발상이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지금 돈 벌면 좋아요"라는 발상이다. 이럴 때 한국에는 미래가 없다. 욕심과 이기주의가 팽배한 곳에는 싸움과 공멸만이 있을 뿐이다.  

오아시스에서 샘물을 관리하며 살던 사람이 있었다. 여행자들이 물을 이용하고 감사의 표시로 주는 돈을 통해 이 사람은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에게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샘물을 비싼 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돈이 많이 벌렸다. 덕분에 이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면서 이 사람에게 걱정이 생겼다. 혹시 돈을 안내고 가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과 샘물이 줄어들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밤낮으로 샘물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이 사람은 샘물 곁의 야자수에 잎마다 물방울이 흠뻑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야자수가 그의 샘의 물을 엄청나게 축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모든 야자수를 잘라 버렸다. 야자수가 없으니 샘물은 뜨거운 햇볕과 사막의 강한 바람에 노출이 되었다. 샘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나무가 없어지자 샘물은 결국 다 말라버리고 말았다. 나무의 그늘이 없어지자 여행자들의 발길도 끊겼다. 욕심으로 더 많이 취하려던 이 사람은 결국 샘물도 잃고 방문자도 잃었다. 목마름과 외로움만 남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교회가 법으로 정해진 건폐율 이하로 건물을 짓고, 나의 땅의 일부를 할애하여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교회의 땅을 통하여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콘크리이트 담장을 허물고 나무를 심으면 보기에도 시원한 푸른색의 녹음을 이웃에게 제공하게 된다. 교회의 땅에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 이웃에게 개방하면, 이웃에게 좋은 공기와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게 된다. 또 우리의 이웃에게 나비, 곤충, 새들을 다시 찾아주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각박한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에게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주는 기여를 하게 된다. 교회가 담을 허물고 나무를 심는 것은, 현재 한국의 교회와 사회사이의 불신을 제거하고 막혀있는 담을 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며, 선교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교회가 담을 허물고 대신 나무를 심어 교회를 개방하는 것은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분열된 세상에서 하나가 되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현재 한국의 도시의 삶은 아파트의 철문으로 나를 철폐하고 이웃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있다. 점점 더 세상의 사람들은 분리되어 가고 있다. 나를 보호하고, 나의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담을 높이 쌓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이럴 때 교회가 담을 허물고, 교회의 땅에 정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으며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는 것은,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웃을 향한 화해의 미소와 손짓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더 많은 성도의 수용만을 생각하며 무작정 크게 건물을 지으며 주변의 주민과 주차문제로 시비와 분쟁을 일으킬 때, 교회가 이웃의 원망과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교회가 이웃과 담을 쌓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을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 생각하며 최고의 선교국가로 부상을 꿈꾸는 한국교회는 나의 이웃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겠다. 말로만 이웃사랑을 하지 말자! 교회의 담을 허물고 이웃을 위하여 내 땅을 제공하는 것은 실지로 내 이웃을 형제자매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21세기의 교회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이럴 때 교회는 이웃과의 자연스런 대화와 화해를 통하여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의 사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나무를 심는 것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담을 허무는 일도 된다. 이는 공해와 오염으로 쫓겨나갔던 다른 피조물에게 도시 속에서 인간과 함께 살자고 초청하는 것이다. 콘크리이트로 가득찬 도시에서는 다른 피조물이 살 수가 없다. 교회가 땅을 양보하여 나무를 심으며 도시에 숲을 형성하는 것은 나비와 곤충, 새와 다람쥐 등의 다른 피조물들이 살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분리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 교회의 뜰에 나비가 춤추고, 매미와 새가 노래를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모든 만물의 찬양을 드리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로부터 찬양을 받기를 원하신다. 교회가 나무를 심을 때, 현대의 교회가 드리는 인간만의 쓸쓸한 찬양이 모든 만물이 함께 드리는 풍성한 찬양으로 변화될 수 있다. 교회여 나무를 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