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며 생 각 하 며

바이칼 오리의 꿈

유영초/ 본회 집행위원, 숲 해설가

하늘을 나는 새 가운데 가장 멋지고 훌륭한 새는 아마도 붕(鵬)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저 북방호수 바이칼의 깊고 푸른 심연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 지 알 수 없는 곤(鯤)이라는 대어가 변하여 새가 된다는 이름하여 대붕(大鵬)이 그것이다. 등의 넓이가 몇 천리에 이르는 이 새가 힘차게 하늘로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을 뒤덮는 구름이 되고, 그 날개 짓으로 남쪽으로 날아갈 때 삼천리의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창공으로 구만리를 비상한다. 이렇게 여섯 달 동안을 날고서야 비로소 날개를 쉰다.

필드스코프

늦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기러기며, 두루미며, 가창오리며, 개리며, 고니들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 철새들을 보기 위해 필드스코프며 쌍안경이며, 디지털 카메라며 갖은 장비를 챙겨들고 쫒아 다니기 시작한다. 겨울은 월동을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로 수천㎞의 머나먼 여정을 비행하며 이동하는 철새들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철새들 사이에 대붕이 남모르게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붕은 아무리 배율 좋고 성능 좋은 필드스코프로도 잡히지 않는 상상의 새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생태적 상상력과, 그것을 통해서 보는 마음의 눈이 없다면 볼 수가 없다. 이미 자연과 점점 멀어진 도시의 콘크리트숲에 둥지를 튼 인간들은, 한 몸의 우주와 자연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생태적 문맹(Ecological Illiteracy)은 점점 많아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도 '하늘을 나는 고니도 철을 알고 산비둘기나 제비나 두루미도 철따라 돌아오는데, 이 백성 가운데는 내가 세운 법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구나.'며 탄식하고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뜻과 그 법을 아는 것은 생태신학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쩌면 허공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이 '새들의 길'을 탐하는 것은 당찮은 욕심일지 모른다. 다만, 8배율 쌍안경과 30배율 필드스코프로 잃어가는 생태적 시각을 교정하는 렌즈가 되어 준다면 족할 일이다.

황새와 두루미

사실 사람들은 필드스코프가 아니더라도, 육안으로 보고도 알 수 있는 새들조차 잘 모르고 지내고 산다. 주변에 물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500원 동전의 새가 황새인지, 백로인지, 학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성서에서조차 황새(Stork)를 고니로, 두루미로, 학으로 각 번역마다 달리 쓰고 있지만, 이것은 어쩌면 히브리어와 영어 그리고 우리말로 옮겨져 오면서 나온 일이거니와, 성경의 이해방식이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의미(Meaning)이어야 한다면 그런대로 용서 못할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황새와 두루미는 겨울 철새이고, 백로와 왜가리는 여름 철새이다. 때문에 혹시 무리에서 떨어져 남아, 머무는 길을 잃은 새가 있다 하더라도, 대개는 계절만으로도 너무나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황새와 두루미는 꽁지가 검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자세하게 보면 황새는 두루미와 달리 머리에 붉은 점이 없고, 목 주위가 검지 않고 부리가 두루미보다 굵다. 또 덩치도 두루미보다 작다. 두루미는 머리꼭대기에 있는 붉은 반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목이 새끼는 갈색, 어미는 검은 색이다. '학'이라는 말은 두루미의 한자식 표기인데, 십장생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두루미들이 사랑을 나누는 행동을 춤으로 꾸민 것을 '학춤'이라 하여 우리의 민속춤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단아하며 사뿐사뿐하고 맵시 있는 춤이다. 두루미는 역사와 일상에 가장 친숙한 존재이다. 두루미를 잃는 것은 단순히 동전속의 새 한 마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삶을 잃는 것이다.

기러기 아빠

얼마 전 기러기 아빠가 자살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자녀를 유학 보내면서 아내도 그 뒷바라지로 함께 해외에 나가 있어서, 혼자서 돈을 벌어 송금하는 처지를 기러기 아빠라고 부르는 듯하다. 가을 찬바람이 불면 기러기가 날아든다. 아마도 가을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는 계절, 달빛 교교한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보고 기러기를 쓸쓸한 외로움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르지만, 기러기는 원래 짝을 잃고서는 못사는 새이다. 때문에 혼례를 치를 때는 기러기를 반드시 등장시키는 것이다. 물론 기러기가 혼례의 폐백에 쓰이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이유들이 있다. 음양이나, 신의, 예의, 절개 같은 기러기의 상징적인 덕목 때문이다. 우선 기러기는 음양의 이치에 맞게 왕래한다는 것이다. 기러기는 가을에 잎이 지면 남으로 날아오고, 봄에 얼음이 녹으면 북으로 가는 데 이것이 음양의 이치이자 때를 지키는 신의라고 의미를 두었다.  모든 철새들이 제 때를 잘 알 듯 기러기는 특히 계절감이 풍부해서 기후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린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기러기가 오지 않으면 먼 곳에서 모반이 일어날 징조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오고 가는 기러기의 이동을 통해 옛 사람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 없는 기상이변이나 그에 따른 작황,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민심의 이반과 모반의 가능성 등을 짐작했을 것이다.

가창오리의 군무

서산에 걸린 붉은 해가 떨어지고, 간월호수의 물빛이 어둠 속에 침잠해 갈 즈음, 천수만의 드넓은 논배미 위로 어슴푸레 일단의 새 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새들은 어둑한 창공을 사방으로 가르며 순식간에 삼켰다가 토해내며 사위는 온통 날개 짓 소리폭풍에 침몰한다. 간월호수에 백년 묵은 이무기가 펄떡이듯, 바이칼 호수 깊은 심연의 곤이 삼천년 날개 얻어 꿈틀대듯, 태평양 먼 바다의 검은 고래 뛰어 놀 듯, 새떼들이 한 몸이 되어 연출하는 황홀한 군무, 그 춤사위에 무대는 허물어지고 관객들은 넋이 나간다. 두루미의 고고하고 우아한 춤사위와는 달리, 애써 파닥거리는 어설퍼 보이는 가창오리 특유의 날개 짓들이 한데 모여, 추수가 끝난 쓸쓸하고 허허로운 벌판과 퀭한 산들을 단숨에 생명의 기쁨과 행복의 공간으로 반전시키는 이 엄청난 연출력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때문에 겨울 철새 중에서 재두루미나, 고니, 개리, 노랑부리저어새와 같은 천연기념물도 있지만 가장 주목 받고 압도적으로 사랑받는 철새중의 하나가 기러기목 오리 과의 가창오리일 것이다. 가창오리는 영어이름이 바이칼 오리(Baikal teal)이다. 저 멀리 '시베리아의 푸른 눈',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고, 눈이 시리게 푸른 담수호 바이칼(Baikal)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이다.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북방민족의 자궁, 바이칼 호수를 배달민족의 시원의 호수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가창오리는 국조와도 같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연이 깊을 듯하다. '바이칼'의 가창오리는 뺨에 태극문양의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있어 태극오리라고도 부른다. 가창오리가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번식을 하고 대부분이 우리 한반도로 월동을 위해 찾아든다. 드넓은 간척지 평야의 논농사로 인한 낙곡과 수초, 곤충이나 민물고기들, 쉬기 좋은 담수호와 갈대밭 등 천혜의 월동조건들이 철새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바이칼 오리의 꿈

바이칼의 오리가 대붕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나는 가창오리들의 군무에서 발자국도 없이 하늘을 걷는 거대한 대붕을 본다. 대붕의 뜻을 참새가 모르듯, 저녁노을을 삼키며 어둠으로 침잠해가는 가창오리 떼의 짧은 군무의 메시지를 모두 읽어낼 수는 없지만, 바이칼 오리들의 꿈은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꿈을 지켜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사람이 지구를 지키는 청지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간을 지탱하는 생물종이 4만종에 달하며, 적어도 새 한 종이 사라지면 젖먹이 짐승 2분의 1종, 어류 2종, 35개의 초목 종, 90개의 곤충 종이 멸종했을 거라는 추론을 할 정도로, 먹이사슬과 생명의 그물을 충분히 이해하리만큼 지혜롭다면, 어쩌면 그 도리를 다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