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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전망에서 성서읽기 16 요 나 요나서는 이방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가능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며, 그들을 향한 선교를 부축이고 있다. 요나서는 이방인 중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있음을 말한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1:9) "그들이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1:16) 결국 요나서는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의 사람들이 요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게 되었음을 증언한다.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3:8~10) 이와같이 요나서는 이방인이 선교를 통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책이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며, 온 인류를 향한 것임을 강조한다. 요나서의 이같은 구원관은 자연을 향한 확대된 구원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요나 4:1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육축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음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육축들도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다. 그러나 이 말씀과 다르게 우리는 동물들에 대해 무자비할 때가 많다. 사냥, 낚시, 농장식 영농, 동물실험 등으로 동물은 오늘도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의 한국은 스페인의 투우, 캐나다의 새끼물개 도살과 함께, 개고기를 먹는 나라로 동물보호자들로부터 많은 지탄이 되어 왔다. 아직 우리나라는 동물보호의 문제에 있어 후진국으로, 이 분야의 입법문제에 더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요나서 3:8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3:7도 참조). 이 본문은 회개를 위해, 사람만 베옷을 입는 것이 아니며, 짐승들도 베옷을 입을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회개는 인간의 전유물만이 아니며, 짐승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한다. 우리는 가끔 기도와 예배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며, 이 자연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땅과 바다와 별 등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한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음을 시편의 여러 말씀들에서 강조한다. 인간은 그 스스로 회개할 뿐 아니라, 인간과 함께 타락한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책임을 갖는다. 오늘 우리의 선교는 인간만을 향한 선교가 아니며, 세상의 온 피조물의 회개와 돌이킴을 선포하는 선교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자로서 여러 면에서 부족한 요나의 심성을 바로 잡기 위해, 많은 피조물들이 함께 고통당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니느웨를 피해 다시스로 향하는 요나의 발걸음을 돌이키기 위해, 큰 물고기는 많은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도록 하였다. 큰 물고기는 요나를 머금고 몸서리치는 고통을 당하여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무거운 요나의 무게를 감당하며, 니느웨의 해변을 향해 질주하여야만 하였다.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없었던들, 그 물고기는 그와 같은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도 됐었다. 요나의 회개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 많은 자연물들 곧 폭풍, 바다, 물고기, 베옷, 벌레, 박 넝쿨 등을 사용한 것과 같이, 온 피조물의 샬롬을 위해 우리 인간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이, 우리도 자연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