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적 양식
장신대 교수 노영상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장 11절)

주기도문에 나타난 위의 문장 중 일용할(헬라어 "에피우시오스")이라는 형용사의 번역은 단순하지가 않다. 주석들은 그 단어가 몇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번역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있어 보프(Leonardo Boff)는 그의 책 『주의 기도』에서 이 단어의 번역의 가능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필수적인"(necessary)이라는 번역이다.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는 epi(concerning, 뜻 없는 접두사)와 ousia(substance, existence)라는 말들의 합성어로서, "본질적인,"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둘째로는 "오늘을 위한"(for today)이라는 번역이 가능하다. 그것은 "에피우시오스"를 epi ten ousan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여러 번역 성서들에 의해 그 번역이 채용되어 왔다. 세 번째로는 "내일을 위한"(for the coming day)이라는 번역이 있다. epiousios를 epi와 ienai(도래하다)의 합성어로서 보는 견해로, 그 번역은 현대신학자들에 의해 빈번히 채용되어졌다. 이렇게 보프는 이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가 "필수적인", "매일의", "내일을 위한"이라는 세 가지 번역의 가능성을 가지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에 의거 각 번역성서들은 그들 나름의 입장에서 위의 번역 중의 하나를 각기 채택하고 있다. 영어성경인 TEV는 "필수적인"이라는 번역을 선택하였다. 다음으로 KJV은 "매일의"라는 번역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셈족어로 쓰여진 외경 중의 하나인 『히브리인의 복음』은 그 단어를 히브리어 마하르(내일)를 써서 번역하였다. 아울러 영어성경 RV와 the New English Bible는 세 번째의 번역을 취하고 있다. 최근에 번역된 한국어판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또한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두 번째의 번역을 선택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쓰고 있다. 이상과 같이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의 번역은 쉽지 않은 것으로, 위 세 개의 번역들 중 하나를 채택하기보다는, 위 세 가지를 의미를 통합하여 위의 구절을 해석하고자 한다. 오늘의 환경 오염의 시대에 즈음하여 우리의 먹걸이 문화가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차제에 어떠한 음식문화가 이상적인 것인가를 검토하며, 오늘의 식생활 위기를 대처하고자 한다.

2. 필수적인 양식

먼저 첫 번째의 번역으로서의 필수적인 양식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요한복음 6장 5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본문은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양식이라는 말을 "참된" 양식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 세상에는 필요한 양식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비본질적인 양식도 있다. 꼭 먹어야 되는 양식이 있고 먹지 않아야 되는, 먹으면 해가 되는 양식도 있다. 요즈음 우리는 오염된 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한 물은 참된 음료이기보다는 참되지 못한 음료라고 할 수 있다. 수입 농산물에서 과량의 농약이 검출된다고 한다. 이런 먹걸이는 참된 양식에서는 거리가 멀다. 먹을 수 있다고 다 우리 존재에 필요한 양식은 아니다. 독주는 참된 음료이기보다는 먹지 말아야 하는 음료이다. 어떤 사람은 마약 먹기를 즐겨하기도 한다. 그러한 것도 올바른 양식이라고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6장 27절은 이 참된 음식을 보다 길게 설명하고 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 이 본문은 참된 양식과 반대되는 썩는 양식에 대해 설명한다. 이사야 55장 2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값이 나간다고 하여 좋은 양식이 아니라고 본문을 말한다. 비싸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좋은 양식이 있을 수 있으며, 정부는 이 같은 양식들을 대중들을 위해 싼값에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비싼 것이 좋은 양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본질적인 양식은 평범한 데에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참된 양식과 반대되는 개념에 있는 양식으로서 썩는 양식에 대해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참된 양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위 본문은 썩는 양식을 말하면서, 그에 반대되는 참된 양식을 설명한다. 참된 양식이란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다. 영생을 주는 양식이 좋은 양식이다. 영생이란 우리가 체험해보지 못한 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시적인 말로 그 말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생명을 주는 양식, 삶의 에너지를 주는 양식, 삶의 활력을 주는 양식, 삶에 창조성을 공급해주는 양식, 건강을 주는 양식이 참된 필수적인 양식이라는 것이다. 비싼 값을 주고 샀지만 양식이 안 되는 것이 많다. 비싸게 사먹어도 생명력을 주지 않는 양식이 있다.

3. 일용할 양식

우리는 주기도문 중,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매일의, 매번의 양식을 우리에게 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매번의 양식을 주셔야겠다는 것이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긍정문으로 고치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만을 먹겠다는 결단이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만이 참된 양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에서 나오는 양식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회사의 사장이 나랏님이 우리에게 양식을 주는 것으로 잘 못 알 때가 많다. 인간이 양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진정한 양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다.(시 104:14-15, 27-28) 윗사람이 양식을 안 주어도 하나님은 주신다.

  요한 6장 31절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하늘양식이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 걸쳐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의 실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늘에서의 떡인 만나를 경험하였다. 또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병이어를 통해 많은 백성을 먹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양식의 위력을 보여주셨다. 하늘의 양식만이 진정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양식이다. 내가 벌어서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므로 내가 먹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양식을 구하는 이 땅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보통 알고 있는 모든 양식을 다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양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보통의 인간은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양식들을 잘라먹고 산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을 덧입고 사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해서만이 나의 생명이 지탱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의 기운에 의해 지탱되어진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빵이지만, 하나님께 바치면 주님의 오병이어가 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늘의 양식이 된다. 내가 먹는 것은 빵이지만, 그 빵을 남에게 줄 때, 그 빵은 하나님의 빵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기대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참된 양식이다. 그 하나님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대상으로서, 그 하나님의 양식은 또한 거룩한 양식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특수한 어떤 것을 통해 거룩히 되지 않는다. 가장 평상적인 일상의 밥을 통해 하나님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물질적인 빵과 떡이 이 세상에서 하나의 거룩한 성만찬으로 변화할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신다. 거룩한 양식이란 더럽지 않은 양식을 말한다. 더럽지 않은 양식은 정의로운 양식이다. 무엇이 거룩하고 정의로운 양식인가? 그것은 부정의한 수단으로 벌지 않은 양식을 말한다. 직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얻은 양식은 거룩한 양식이 아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얻은 양식은 하늘의 양식은 아니다. 남을 속여 벌은 양식은 참된 양식일 리 없다. 오히려 정의로운 양식이란 진정한 노동 곧 땀의 대가로 얻은 양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참 노동에의 결단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기도는 먹을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먹을 가치를 구하는 기도이다. 마태복음 6장 31벌은 인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먹을 양식이 아니다.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먹을 가치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양식을 값없이 먹지 말고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으로 먹어라." 이 본문은 먹을 가치에 대한 말을 하면서, 그 가치가 노동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일하고 먹어야 한다. 성경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살후 3:10) 일하지 않고는 먹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러므로 하늘의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먹을 가치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그 먹을 가치는 참다운 노동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는 일함을 통하여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된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참다운 노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이 참다운 노동인가? 그 노동의 질에 의해 우리의 양식의 질은 결정되는 것이다. 수입이 많은 노동이 무조건 가치 있는 노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노동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남에게 해를 주고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진정한 노동이란 수입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진정한 노동이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노동을 말한다.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준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남에게 물질적이며 정신적으로 유익을 준 대가로 우리는 양식을 얻어야 한다. 반대로 말해, 우리가 더 많이 벌고자 한다면, 남에게 더 많은 유익을 줄 일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본질은 사람들을 위한 맛있는 빵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먹지 못할 빵을 만들어 놓고 노동을 하였노라고 자위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또한 아무리 맛있는 빵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만을 위한 빵으로서 남아 있을 때, 그러한 빵은 땅에 버려질 수밖에 없게 된다. 참다운 노동은 나만의 빵을 위해 하는 노동이 아니라, 우리 전체의 빵을 위한 노동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오늘날 "우리에게"(hemon)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간구를 가르치고 있다. 그 빵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적 빵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정도로 노동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있지 않다. 요한복음 4장 34절은 "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한다. 이 본문은 양식을 곧 일이라고 강조한다. 진정한 양식은 진정한 노동을 통하여 취득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노동은 진정한 먹을 가치를 일구어내며, 진정한 먹을 가치가 있는 자들에게만이 진정한 양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또 하나의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참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남에게 유익을 주는 정도로 우리의 일이 마쳐져서는 안 된다. 그 일은 하나님의 일로까지 승화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대비시키고 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하루를 나의 일만 생각하고 지낸다. 아침 일어나 나의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지를 그 아침에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모두 나의 일만 걱정하고 나의 일만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만이 진정한 노동이다. 우리의 노동은 인간의 뜻을 성취하는 노동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이 역사 가운데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우리는 이루어야 한다. 요한복음 6장 29절은 이 문제를 더욱 근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믿음이 기초이다. 믿음이 노동이며 일이다. 믿음이 곧 행함이다. 기도와 노동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영성(spirituality)과 해방(liberation)은 하나이다. 관상(contemplation)과 투신(commitment)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나누일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생을 가져다주는 것이 참된 양식이다. 참된 양식은 참된 노동을 통해 주어진다. 참된 노동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가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가운데의 것을 다 요약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의 결론을 얻게 된다.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음이 곧 영생이다. 우리는 삶의 에너지가 떨어졌을 때, 몇 가지의 정비를 하곤 한다. 어떤 이는 운동을 시작함을 통해 새 에너지를 충전하려 한다. 다른 사람은 음식 정비를 통하여 새 힘을 얻으려고 하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정비하여야 할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의 정비와 믿음의 정비이다. 생명력 있게 살기 위해서는 일단 일을 추슬러야 한다. 일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며,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인 것이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여야 한다. 내가 죽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사시게 하여야 한다. 그것은 믿음의 길을 통해서 가능하다.

4. 내일의 양식, 성만찬적 양식

 필자는 위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자에게만이 참된 양식이 주어짐을 말하였다. 가치 있는 삶과 인격을 가진 자에게 진정한 양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가치 있는 사람인가? 나는 먹고 살 가치가 있는 자인가? 나는 진정 남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가? 살피면 살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가치한 자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밥 먹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없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이르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모두가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먹을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타락으로 모두 살 가치를 상실하였다.

  그러한 무가치한 인간에게 양식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은총의 양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밥상 받음은 나 자신의 노동과 공적의 대가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밥상이며,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밥상이다. 모든 양식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은총의 양식으로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사야 55장 1절은 다음의 말을 하고 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본문은 값없이 먹을 수 있는 양식에 대해 말한다. 필자는 앞에서 양식을 먹을 가치를 구비하고 먹을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함께 먹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양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은총의 밥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차려주신 성만찬의 밥상을 의미한다.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음료가 죄 사함을 위해 자신이 흘리시는 대속의 피임을 말씀하셨다.(마 26:28) 그 피는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피이다. 그 피로 말미암아 무가치한 죄인이 가치 있는 곧 밥을 먹을 가치가 있는 의인으로 변화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성만찬의 은총의 밥상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나는 훌륭한 일을 했으므로 먹을 가치가 있는 자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그 은총의 양식을 받을 수 없다. 스스로 먹을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은총의 밥상이 부여되는 것이다. 먹을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자만이 먹을 가치가 있는 자이다. 회개하는 자에게만이 성만찬적 밥상이 주어진다. 스스로 먹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자에겐 어떤 음식도 감사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고백하는 자가 받은 밥상은 감사와 감격의 밥상일 수밖에 없다. 감사가 없는 밥상에는 투정만이 있을 뿐이나, 일하고 감격하여 먹는 양식은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도 아름답다.

  그 성만찬의 밥상은 천국에서 맛볼 밥상의 선취를 의미한다. 미래에 맛볼 밥상이 우리에게 앞당겨 주어진 것이다. 그 성만찬적 밥상은 오늘에 주어진 "내일의" 양식이다. 그것은 종말적인 양식이며, 인류가 맛볼 수 있는 최후 최상의 밥상이다.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밥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사 25:6, 계 22:17)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30).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차린 밥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차려주시는 밥상을 보아야 한다. 매일의 식사가 성례전이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썩는 양식이지 참된 양식이 될 수 없다. 양식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영양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양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먹는 음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 안에서 사는 것이다.(마 4:4)

  마태복음 6장 25절은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살기 위해 먹으면, 먹기 위해 살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활동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 그 순서가 바뀌면 먹는 것을 탐닉하게 된다. 물질적 양식이 우리의 전 생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면, 양식이 우리의 우상이 된다. 양식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되면 먹는 것이 삶의 중심에 오게 된다. 인간이 양식을 부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양식이 인간을 쥐고 흔들게 된다. 우리가 경배할 분은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에게서 양식이 오는 것이지, 양식에서 하나님이 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얻을 것이요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필자는 지금까지 "일용할"(epiousios)이라는 주기도문의 한 단어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음식문화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였다. 참다운 식생활을 위해 본인은 세 가지의 전제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노동의 정비와 믿음의 정비 및 회개의 정비이다. 아마 그 중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회개일 것이라 생각된다.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 하나님의 은총의 밥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또한 본인이 이 글에서 추구하고자 함은 음식의 물질적인 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면 및 그 음식의 종교적인 면 사이의 조화이다. 곧 성만찬적 양식 속에 있는 수직적인 의미와 수평적인 의미를 고찰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음식을 물질적인 기준만으로 섭취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할지라도, 사회의 부정의한 구조에 그대로 안주하며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철저한 의존을 망각한다면, 그런 양식은 그의 살을 썩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양식을 먹고서는 신령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에너지만으로 감당될 수 있다. 다음의 말씀으로 마치고 싶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요 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