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이 쓰레기라니? 안상님/ 여성교회 목사 음식물
쓰레기로 연 15조원이 썩는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이렇게 엄청난 음식을 썩혀버리다니 옛 어른들이 들으시면 천벌을 받을 일라고 꾸중하실 것이 분명하다. 수채 구멍(마당가에 있던 하수구)에 밥알이 보이면 그 집 주부는 살림을 못한다고 지탄을 받았다는데. 요즈음이야 수채 구멍이 밖에 보이지도 않지만 누가 남의 살림에 잔소리를 할 만큼의 관심이나 있으랴. 밥알 하나만 떨어뜨리면 다시 집어먹어야 하는 줄 알고 자란 우리 세대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찬밥이 남으면 지붕에 얹어 놓아 새들이 먹게 했다는 우리 선조들의 살림 이야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민족이 보리 고개를 넘은지가 몇 년이나 된다고 이리도 음식 귀한 줄 모르고 정신없이 살고 있는가? 너무 음식에 줄였어서 그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흥청망청거리며 먹어야 직성이 풀리려나? 마치 못 먹었던 음식에 원수 갚음이라도 하려는듯 마구 버리는 것일까? 음식이 우리 입에 들어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밥 한 술, 나물 한 젖가락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깃들어 있는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볍씨를 심기 위해 가을부터 논바닥을 뒤집고 새 흙을 넣고, 거름을 넣어 모판을 만든다. 볍씨를 뿌려놓고 잘 자라는지, 물이 적지 않은지 수시로 둘러보고, 모를 내고 나면 김을 매고, 오리를 들여보내 벌레를 잡게 하고, 추수하여, 쌀이 되게 방앗간으로 가져가, 시장으로 날라다가, 소비자의 집으로 들어온다. 쌀통에서 쌀을 끄내 씻어서(요즈음에는 쌀을 일지는 않으니 그 일은 줄었다), 밥통에 넣고, 밥통에서 퍼서 밥그릇에 담아 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는가? 그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인력이 쓰여졌는가? 그렇게 애써서 만든 음식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썩어지는데 일년에 15조원이 없어진단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모습 대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함께 축복하시고 함께 하나님의 창조를 지키고 돌보라는 청지기직을 맡기신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여성신학에서는 이 음식 쓰레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찾아보자. 지금도 그렇게 하루치 양식만 받을 수 있는 방식이라면 버리는 음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냉장고에 냉동고까지 쓰는 살림이 되었으니 일용한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그저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일용할 양식을 간구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여성신학은 여성이 억압되는 가부장 문화를 바꾸어 평등의 문화를 만들며 자연과 사람이 평화로이 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지향한다. 또한 이 세상의 청지기인 우리는 자연을 살리고 양식을 낭비하지 말으라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고백한다. 크리스트를 따르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기억하고 음식을 귀하게 여기고 쓰레기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미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있다. 내가 담임하고 있는 여성교회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이주노동자 여성센타가 있다. 거기서는 주일마다 예배 후에 함께 점심을 먹는다. 우리처럼 여러 가지 반찬을 차려놓는 것이 아니고 반찬이 한 두 가지인데 각자 자기 접시에 밥을 놓고 그 위에 반찬을 얹어서 섞어가며 먹는다. 접시를 말끔히 비우는 그들의 식사를 보면서 참 깨끗이 잘 먹는다고 감탄했다. 이번 축구경기에 올 손님들의 숙박 문제로 고심하던 당국은 불교의 사찰을 숙박시설로 개방하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거기서는 스님들의 식사와 똑같이 손님들을 대접할 것이라고 한다. 바리에 음식을 받아서 다 먹고는 물로 바리를 깨끗이 씻어서 그 물을 숭늉처럼 마시는 식사이다. 내가 불교에서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식사 예절이다. 음식을 상 위에 가득 차려놓지 않고 다 함께 먹을 음식 그릇에서 자기가 먹을 만큼의 음식을 자기 그릇에 담는 것이 얼마나 절제 있는 모습인가! 또한 음식을 먹은 다음 그릇을 깨끗이 씻어서 다 마셔버리고 다시 싸서 자기가 보관하니 아무에게도 아무런 뒷일이 남지 않는다. 카톨릭 교회에서 성만찬 한 집기를 다 비우고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서 제자리에 넣어두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오늘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는데 김밥 두 개와 유부초밥 세 개가 남었다. 덧붙여 나오는 꽁치구이도 남았다. "저거 남기면 어떻게 하지? 다 먹어 쓰레기로 나가지 않아? " 아무도 더 먹으려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 이것 좀 싸주세요?" "네. 개 주시려고요?" "아니요 남기면 버릴 꺼 아녜요? " "네 우리는 다 버려요."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표정이다." "15조원이라지 않아요?" 그 아주머니는 그저 귀찮다는 듯이 가버렸다. 하찮은 일 같으나 음식은 하나라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그것을 싸들고 왔다. 여성신학을 사는 삶이라는 생각이 그 귀찮고 하찮은 일을 기꺼이 하게 만든다. 우리 집에서는 음식 쓰레기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식탁에서 쓰레기로 나오는 것은 과일 껍질이다. 음식을 먹을 만큼 만 상에 놓고 물장수 상을 만든다 (예전에 수도시설이 없을 때 물장수가 물을 길어오면 밥상을 차려주는데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음식을 만드느라고 나오는 쓰레기나 풀을 마당에 묻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 요즈음에는 흙누룩이라는 것을 사다가 섞어서 묻어두면 아주 촣은 흙이 된다. 우리 집에는 대문 위의 슬라브에 흙을 올려 만든 밭이 있다. 그 작은 밭은 채소를 가꾸는 나의 놀이터이기도 하고 거름 제조장도 된다. 하나님과 함께 자연을 살리는 길이라는 신앙고백이 이런 일들을 하면서 기쁘게 사는 길을 열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