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고난주간 묵상자료

예수님의 고난,피조물의 고통

첫째날 (월요일)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

 이튼날 아침에 예수께서 성안으로 들어오시다가, 마침 시장하시던 참에, 길가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리로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하고 말씀하셨다.(마21:18-19)

예수께서 하나님이, 그리고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 저주 속에 담긴, 열매 없음으로 인한 안타까움, 슬픔을 기억해보자. 그 저주 속에서 열매맺는 나무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느껴보자.

모든 피조물이
안녕과 평화 속에서 풍부해지기를
약하거나 강하거나 살아 존재하는 모든 것이
긴 것과 작은 것
짧은 것과 중간 것
초라한 것과 대단한 것 모두가 그리 되기를
어머니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다해
재난으로부터 자기 아들을,
하나뿐인 자기 아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그대 자신의 자아 내에 그렇게
모든 살아있는 창조물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품으라. <토마스 베리>

주변에서 우리는 열매맺는 나무를 얼마나 보고 있는가? 그 열매를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있는 것이라곤, 공기정화용이요, 관상용이 전부가 아닌가?. 열매를 기대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의 식물들이 어떠해야 하는 지,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하자.

둘째날 (화요일) 오염된 성소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거기에서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막11:15-16)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어느 곳이 거룩한 곳으로 남아있는가? 하나님을 만나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는가? 자본주의, 맘모니즘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이 세상, 우리 교회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품어보자.

더 많은 자원들이
무기와 파괴를 위해 사용되고,
질병과 기근에는
더 적은 관심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은 물건을 차지하기 위한
강박 관념이 지배하는 곳에,
우리의 공기와 나무와 바닷가,
오염으로 뒤덮인 곳에,
눈먼 장삿군들의 욕심이
우리의 환경을 위협하는 곳에
거룩한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온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소서.
<WCC 캔버라 총회 예배기도문 중에서>

거룩한 것이 돈으로 오염되고, 욕심으로 오염되는 우리 삶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하나님께서 당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도록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의 회복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더러운 것들을 뒤엎고 몰아내자.

세째날 (수요일) 가난의 위대함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두 렙돈을 넣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막12:41-44)

많은 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랑스런 일인가?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가? 그 돈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생명을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많은 돈을 벌수록 더 많은 피조물을 죽여야 하는 세상이 아닌가?

점점 더 많이 벌고, 많이 갖고,
많이 쓰고자 하는 열망으로
여린 지구와 미래의 터전을 파괴하는 삶이
진보가 되고
지구 마을 곳곳에서 굶주려 쓰러지는
아이들 몫을, 더 높은 경제성장으로,
더 많은 임금인상으로 끌어당겨와
우리도 선진국이 되었다고,
이제 평등분배만 이루면 된다는
이 시대 사람들 속에 비추이는 내 모습
   <박노해의 시, 인간의 거울 중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적게 쓰고 적게 먹음으로, 강요된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황폐해져가는 이 땅을 살리고, 욕심에 찌든 나를 살린다. 가난은 이 시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력에 대항하는 강력한 무기다. 부를 향한 미친 욕망에 사로잡힌 이 세상에서, 가난의 풍성함을 배우며 살아가자.

넷째날 (목요일) 오염된 빵과 포도주의 성찬식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떄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막14:22-26)

우리가 성만찬 시간에 받아먹는 빵과 포도주,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떠한 것인가? 더러운 물과 공기, 농약으로 오염된 것은 아닌가? 정당한 노력이 아니라, 욕심으로 빼앗은 것은 아닌가? 다른 피조물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얻어진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성찬식은 온전한 것인가? 언제 우리는 온전한 성찬상 앞에 설 수 있을까?

이 세계 어딘 가에 굶주림이 있다면,
그러면 우리의 성찬 거행은
세계 어떤 지역에서 행해지건 간에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어디에 살든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간에
생명의 빵을 내어주지 않는 한
저 "생명의 빵을"을
합당하게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아루뻬의 글에서>

좀 더 온전하고 깨끗한 빵,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음료를 성찬상 위에 올리기 위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의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자.

다섯째날 (금요일) 생명이 사라지는 고통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15:34,37)

생명이 죽어가는 고통스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왜 예수님은 당신의 고통을 우리를 당혹케 할 정도로 크게 호소하시는가?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우리들의 죽음을 바라보자,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피조물의 고통 소리를 들어보자.

뿌리째 뽑혀진 수림의 아픔
오염된 바다의 울부짖음
말라버린 지 오래된 하천들
기름 찌꺼기로 뒤덮인
황폐한 해변과 그 신음 소리.
그 속에서 함께 괴로워하시는
당신을 느끼게 해주소서.
죽어 가는 자연과 함께
우리도 죽어 가고 있음을,
자연과 인간은
나누일 수 없는 하나의 생명임을
모든 이가 깨닫게 하소서.
     <세상울 향한 중보기도문 중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 고통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건들이 주는 편리함이, 생명을 먹고 태어난 물건들이 주는 쾌락이 우리의 입을 막는다. 이러한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의 고통을 호소하신 예수님처럼, 죽어가는 피조물들의 고통을 우리가 대신 부르짖어야 하지 않을까?

여섯째날 (토요일) 죽음을 감추는 세상

그들은 물러가서 그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켰다 (마27:66)

원래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이 세상에 쓰레기가 생기는가? 쓸모없는 것이 왜 생기는가? 왜 이 쓸모없는 것들을 한 곳으로 모아두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하는가?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는, 죽어가는 피조물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기억해보자.

"죽음을 망각하고, 그것을 삶으로부터 배제하는 일은, 오늘날 개인의 생활에서는 물론 사회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 많은 기능과 생산과 물질의 풍요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에서, 죽음은 하나의 방해물로 생각된다. 고장으로 인하여 복잡한 도로변에 서 있는, 그리하여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고장난 자동차와 같은 것 … 이런 장애물은 가능한 속히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통의 원활과 경제의 활성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 그리하여 죽음과 죽은 사람은 … 격리되고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리고 만다."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Ⅴ에서>

더러운 공기, 더러운 물을 먹고 마시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죽음, 동식물의 죽음을 숨기지 말고, 널리 알리고, 크게 장례식을 치르자. 이 세상의 피조물의 죽음이 우리의 죄 때문임을 크게 고백하자. 이 땅의 한 생명도 소홀히 죽을 수 없음을 세상에 크게 알리자. 그를 통해, 우리들은 모든 생명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어보자.

일곱째날 (주일)  죽음의 세력을 넘어서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막16:6)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은 결국 환경파괴로 재앙을 겪게 되고, 망하게 될 것인가? 죽음의 세력이, 나의 인생과 이 세상의 의미를 허무하게 만들어버리고, 실패하도록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죽음의 세력이 너무나 강력하여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힘을 잃고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꺽으시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완성할 것을 꿈꾸어보자.

우리가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했다면
더 기다리는 사람이 됩시다.
살아있는 동안 빛나는 승리의 기억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더 세차게 달리는 우리가 됩시다.
아직도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합시다.
더 많은 땀과 눈물이 필요한 때문이라
생각합시다.
아직도 때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합시다.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도종환,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이 기쁜 부활주일에,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의심과 불안과 슬픔과 좌절과 실망과 어두움을 몰아내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확신과 평화와 기쁨과 용기와 희망과 환한 빛을 따라서, 온 생명이 함께 살기를 꿈꾸는 우리들의 길을 새롭게 힘있게 걸어가자.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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