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6. 항생제 범벅된 가축 사료

'항생제 고기'가 식탁 점령
가축용 절반이 사료 첨가제로 사용
인체에 '내성' 우려…규제 거의 없어

"돼지의 호흡기 질환이 유행한 지난 겨울 사료에 항생제를 더 넣어달라고 사료회사에 요청했어요." 취재팀이 찾은 경기 파주의 한 양돈 농장 주인의 말이다. 그는 "사료회사는 우리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다"며 "가축 질병이 자주 발생하는 환절기엔 아예 사료에 항생제를 더 넣어주는 '클리닝 서비스'도 해준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선 사례를 찾기 힘든 이 서비스는 가축의 질병을 '청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축에 사용하는 다른 항생제들의 효과까지 '클리닝'한다는 것이 문제다.


◇사료는 항생제 범벅=국내에서 가축용 항생제는 연간 1200여t이 판매되고 있다. 가축의 종류별로는 돼지.닭.수산물.소의 순서로 항생제 사용량이 많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따르면 국내에선 가축용 항생제의 54%가 사료 첨가용으로 쓰인다. 치료용이 아닌 예방용인 셈이다.

양돈업자 S씨는 "사료에 항생제를 넣지 않으면 돼지 키우기가 불가능하다"며 "항생제가 장내 유해 세균을 죽여 돼지가 소화를 잘 시키고 이것이 성장촉진으로 이어진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문제는 항생제의 내성(耐性)이다. 수의과학검역원이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의뢰로 최근 소.돼지.닭의 각종 세균의 항생제 내성을 조사한 결과 테트라사이클린과 스트렙토마이신은 세균을 죽이는 약효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닭에서 분리된 포도상구균(식중독 유발균)의 경우 테트라사이클린에 대한 내성률이 96%에 달했다. 테트라사이클린으로 닭의 포도상구균을 죽일 확률이 고작 4%에 그친다는 것이다. 강원대 수의학과 김두 교수는 "가축에서 분리된 포도상구균에 페니실린(항생제)을 주사했더니 세균의 96%가 생존했다"고 자신의 검사 결과를 들려줬다.

이에 비해 덴마크에선 포도상구균의 테트라사이클린 내성률이 2%에 불과하다. 1998년 가축의 성장촉진을 위한 항생제 사용을 금지해 나타난 효과다.

◇효과 없어도 쓴다=국내에선 최근에 개발된 3세대 항생제인 퀴놀론을 투여해도 닭에서 나온 대장균의 43%가 살아남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조사를 담당한 수의과학검역원 정석찬 박사는 "테트라사이클린.스트렙토마이신 등을 사료에 첨가해도 질병예방이라는 목적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며 "수의사가 가축을 치료할 때도 이런 항생제는 써봐야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테트라사이클린은 가축용 항생제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이(연간 800t) 사용된다. 정박사는 각 항생제 내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탓을 들었다.

취재팀이 경기 파주의 축산 농가에서 수거해온 송아지 사료 부대에도 '염산옥시테트라사이클린+황산 네오마이신 100ppm, 성장촉진과 질병예방용, 휴약기간 7일'이란 표시가 돼 있었다. 내성률이 높아 질병 예방효과를 얻기 힘든 테트라사이클린이 들어 있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흔히 쓰는 항생제인 네오마이신이 첨가돼 있다.

◇사람 건강도 위협=가축용 항생제의 남용은 사람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고기.우유.계란 등 축산물에 잔류된 항생제가 음식과 함께 인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람도 모르는 새 매일 항생제를 먹게 되는 셈이다. 또 가축의 항생제 내성균이 사람에게 전파될 수도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조사 결과 2002년 서울과 수도권 일대 백화점.대형 유통매장에서 판매되는 식품(212종)에서 분리된 대장균의 항생제 내성률은 93%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살모넬라균.포도상구균.리스테리아균.비브리오균 등 식중독균의 56~100%가 항생제 내성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송재훈 교수는 "퀴놀론계 항생제가 첨가된 사료를 먹은 닭에서 여러 항생제에 동시에 견뎌내는 살모넬라균이 검출됐고 이 닭고기를 먹은 사람이 식중독을 일으킨 사례가 외국에서 보고됐다"고 경고했다.

또 일본에선 태국.프랑스 등에서 수입한 닭고기에서 최후의 항생제로 알려진 반코마이신으로도 죽일 수 없는 반코마이신내성장구균(VRE)이 확인되기도 했다.

◇형식적인 규제=성장촉진용 항생제 등 54종의 가축약품이 사료에 첨가할 수 있도록 허용돼 있다. 일부 항생제에 대해선 사용기준과 허용량이 정해져 있다. 항생제의 잔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휴약(休藥)기간도 설정해두고 있다. 아보파신.스피라마이신 등 일부 항생제는 이미 사용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가축용 항생제 규제에 관한 한 국내는 사실상 '무풍지대'라고 지적한다.

한국동물병원협의회 홍하일 회장은 "항생제는 수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식품분야 연구팀(http://ecohealth.or.kr)=유승진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원, 김수현 바른 식생활 실천연대 대표, 이지현 서울환경연합 '벌레먹은 사과팀' 국장, 조수자 월간 '함께 사는 길' 위원, 주선희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사무국장

박태균 기자<tkpark@joongang.co.kr>

2004.04.22 17:19 입력 / 2004.04.23 08:33 수정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