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리교회(기감 인천 이상길(94당시)
주소: 인천 옹진군 덕적면 서포1리
전화 032-831-2831
주요활동: 굴업도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반대

자체소개
1994년 12월 15일 MBC뉴스를 통해 굴업도가 핵폐기장 건설 예정지로 발표한 후 굴업도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 지구를 해제하기로 1995년 12월 16일 발표하기까지 만 1년동안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운동에 관한 사례'를 덕적지역 교회와 주민활동 중심으로 간략하게 서술한다.
굴업도는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서포 3리로 인천에서 80km쯤 떨어진 5가구 10인이 거주하는 외딴 섬이다. 1994년 12월 16일 '원자력 폐기물관리 사업단'이 덕적지역을 순회하며 핵의 안정과 지역 발전계획을 설명하면서 정부의 밀어부치기식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다. 갑작스런 일에 주민들은 혼란스러웠고, 사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운동연합'의 핵과 핵페기장의 문제점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주민모임을 갖고,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덕적지역 교역자들은 최초로 반대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수요예배를 덕적지역 연합예배로 드림으로써 교인들을 하나되게 하고, 창조질서 보전의 신앙을 독려하며, 다음과 같이 결의문을 채택했다.

"첫째, 창조신앙에 위배되는 핵정책에 반대한다. 둘째, 생존권을 위협하는 핵폐기물 반입에 반대한다. 셋째, 주민의사 무시하는 정부는 각성하라. 넷째, 주민 여론 호도하는 언론은 각성하라." 그리고 교회에서는 특별 새벽기도회를 시작했고, 설교, 연합 집회, 환경 교육 등을 통하여 주민들을 위로하고 독려하며,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감당했다. 주민들은 생계를 전폐하며 이천, 서울에서 수시로 궐기대회 및 각종 집회를 개최하며 의사를 꿋꿋하게 밝혀 나갔다.
정부는 발표문을 통하여 "굴업도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역발전과 안전을 보장하며, 주민의사와 법에 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허구였다. 정부는 불안전하고, 비경제적이며, 비과학적으로, 비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선택했다. 1991년 한국자원 연구소는 굴업도를 단층과 균열이 많고 지하수위가 높다는 지질학적 이유를 들어서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그런데 과학적 지질 조사와 해양탐사등 기초조사조차 실시하지 않고 최적지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안전, 기술, 경제성이 우선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행정편의에 의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울진, 안면도 주민들이 격렬하게 투쟁하니까 거기는 안되고 굴업도는 주민이 적으므로 쉽게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굴업도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주민 의사는 묻지도 않았다. 주민과 대화하기보다는 회유와 압력으로 반대운동을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깊이 잠든 새벽에 군화발로 침입하여 자녀들이 보는 가운데 연행하기도 했다. 덕적은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았다.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자손손 평온하게 살던 주민들을 찬성과 반대로 갈라놓고 갈등을 조장했다.
그리고 언론은 주민의 여론을 호도했다. 반대가 90%에 이르고 있었는데 70%가 찬성한다고 보도했고, 주민의 반대 의견을 혐오시설에 대한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가는 듯했다. 이렇듯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부의 행태와 양식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정부의 회유와 압박에 주민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외부강사를 초청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고, 핵에 대한 정보와 환경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교역자들이 주민 집회에 참여하여 격려하고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역설하고 신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투쟁소식지를 발간하여 주민 전체에게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얻어갔다.
한편에서는 외부(육지)에 덕적상황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인천지역 교계지도자(감독, 감리사, 노회장 지방회장)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갖고 현지상황을 알리고, 각 교회를 통하여 서명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에 건의문을 상정하여 공식 입장을 표명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굴업도 핵페기장 건설 문제는 단순히 덕적의 문제가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임을 알려 합리적인 대안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활동비가 필요했다. 덕적 주민들은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가구별로 일정액을 납부했고, 교회에서는 특별헌금을 실시했을 뿐 아니라 뜻있는 분들의 후원금이 답지하여 반대운동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자원연구소가 부지특성 조사를 하던 중 굴업도 인근 해역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되어 1995년 12월 15일 원자력 위원회(위원장 홍재형 부총리)에서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지구'의 지정을 해제하기로 의결함으로써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한 결과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막으셨다. 그리고 초기에 교역자들이 주민들을 일깨웠고 정신무장시킨 것이 주요했는데 교역자들이 이 일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덕적지역에 복음화(70%)가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끝까지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은 것과 주민 지도자들의 헌신과 환경단체 등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좋은 결실을 얻게 되었다.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덕적 주민은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환경운동사에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주민들간의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 골이 깊게 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일과 정부에 대한 주민의 신뢰 회복, 핵정책에 대한 근본적 전환과 핵폐기장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라는 과제를 숙제로 남겼다.
(글쓴이 : 이상길 목사, 전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