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앙과 환경보전

창세기 1:27∼2:3

요즈음의 환경문제는 너무 심각해져서 어디에서 부터 손을 써야할 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갈 수록 쓰레기와 오염 정도는 더욱 심각해져 있으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하여 21세기에는 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핵폐기물 처리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아 인류의 생존은 더욱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기독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걸까요?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창 1:1).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이 사실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이는 없습니까? 이것은 가슴으로 인정하고 깊은 신앙 가운데 고백되어야 합니다.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 인간이 피조물 중 하나일 뿐임을 모릅니다. 환경파괴의 가장 기본적 원인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가운데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생존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는 지금,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도 원어로 보면 '돌보아주다',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다'를 뜻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좋았던' 창조세상을 인간더러 왜 정복하고 착취하라 하셨을까?

둘째, 안식은 재창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Recreation이란 단어는 '다시(re-)'와 '창조(creation)'의 합성어로서 재창조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만 생각하지만, 안식일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인간의 근원을 확인하는 동시에 육신적의 휴식을 통하여 에너지를 재충전을 하는 날입니다. 나아가 온 피조세계가 재창조되는 날입니다. 창 2:2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던 일을 다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안식의 모범을 보이므로 인간과 자연에게 안식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재창조의 법칙을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출 20:10의 제 4계명을 보면 인간뿐 아니라 가축도 쉬게 하셨습니다. 레 25:5에 보면 안식년 법에서 제 7년째 되는 해는 땅의 안식년이므로 스스로 난 곡물을 거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공부하느라 시달리고, 어른들은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로 바빠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바쁘게 지냅니다. 이것은 재창조의 법칙을 어기는 것으로, 이러한 현대인의 생활태도 때문에 창조세계의 회복은 그 가능성을 잃고 파괴가 가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쉬지 아니하면 자연도 쉴 수 없기 때문이죠. 이제는 바쁜 것도 하나님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환경보전운동은 경건·절제운동과 함께 실천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임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고백은 우리의 몸에, 우리의 말에, 우리의 가치관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풍조가 인간 중심주의로 흐르고 있기에 세상을 본받지 말고(롬12:2)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독학생으로서의 경건훈련을 쌓아 세상을 이기어야 합니다. 절제훈련은 어떤 것입니까?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에 젖어있는 현대인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과는 달리 우리는 편리한 문명의 이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급기야는 그것이 없이는 살지 못하는 절름발이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전에는 십리 길을 걸어가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으나 지금은 자동차가 많아져서 버스로 한두 정거장도 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동차라고 하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져서 이제는 자동차가 없이는 꼼작을 못하는 장애인과 같이된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자라나는 중고등학생들은 어른 세대보다 차에 일찍부터 익숙해져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이와 같이 물질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절제의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마 6:24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물을 즐기고 탐하면 그만큼 하나님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서양의 교회가 지금 쇠퇴하고 그 사회의 도덕이 타락하는 것도 그들이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신앙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물질로부터 멀어져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물질을 즐기며 안락함과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시에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 환경파괴의 예를 생각해보면 자동차 이용을 많이 하면 할수록 휘발유를 태움으로써 공기는 오염되고, 자동차 생산하기 위한 철광석을 파내 철을 생산해야 하고, 기타 여러 가지 원료를 얻기 위하여 자연을 훼손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절제의 훈련은 우리의 신앙이나 환경보전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또 우리가 환경보전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물건의 값으로 그 가치를 따지던 습관을 버리고 이제는 환경보호의 차원에서 물건을 선택하거나 행동규범을 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문지를 모으는 일은 값으로 따지면 얼마되지 않으나 신문지를 재활용하면 나무를 살리게 된다는 점에서 나무 한 그루의 생명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의식개혁이 필요합니다.

환경보전은 말이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인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생활양식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살기 좋다고 자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준엄하게 경고하십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한다고(롬 8:22).

지금은 피조물이 죽어 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앙을 회복하지 않고 계속 물질에 종속되어 있는 한, 창조세계의 파괴와 생존의 위협은 계속될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1)고 하신 것처럼 이 환경파괴의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책임을 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음이니 야고보의 말씀같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나은"(1:15) 결과 인류 전체가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새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신앙을 회복하며 절제의 훈련을 쌓고 실천적인 환경보전운동을 벌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우리의 후손에게 처음 창조의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