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환경주일 설교문                         

"성전을 헐라 !"

요한복음 2 :13-22

-창조 세계의 현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이 세계를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하실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속한 태양계 같은 것이 이 우주에 천문학적인 숫자로 많이 있는데, 사람들의 발달된 기술로도 아직까지는 지구와 같은, 아니 원시 생명체라도 있는 별은 찾지 못하였으며, 오직 이 지구만이 이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탐욕으로 인하여 창조 세계가 파괴되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멸망직전에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창조세계의 파괴는 산업문명 발달이후 (18세기 이후 약 200년간에 특히 100년 전후부터) 급속히 파괴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대기오염에 의한 지구의 온난화, 오존층 파괴, 화학 물질에 의한 수질, 토양 오염, 핵 물질에 의한 방사능오염, 핵전쟁으로 인한 순간적인 지구 생태계의 멸망 위험, 등은 오직 사람의 탐욕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지구의 나이는 45억년, 생명의 탄생은 38억년전, 사람의 탄생은 200만년전, 이른바 사람문명의 탄생은 5000년전 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는데, 사람이 지구의 생명체들을 200여년 동안에 멸망의 직전까지 이르게 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이며, 비록 앞으로 몇 백년을 더 지탱한다해도, 그것은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순간적인 시간으로 엄청난 죄악인 것입니다.

-창조신앙의 오해-

더욱이 이런 지구생태계 파괴 원인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창조신앙"이 사람에 의해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것으로, 상당한 책임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비판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죄를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창조신앙'은 이 피조물을 비신성화, 비마술화(모든 것은 피조물이다!)하여 사람들을 피조물의 노예에서 해방 시키려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극단적으로, 이른바 '인간 중심주의'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번영과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창조세계의 피조물들을 제약 없이 정복하고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하느님의 '복 주심'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창세기 1:27-31에 하느님이 사람을 향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라...땅을 정복하여라."는 말씀을 사람만을 위한(인간중심주의) 말씀으로 해석하여, 오직 사람만이 땅에 대한 지배자라고 정당화하여, 창조세계 피조물들을 사람만을 위한 이용 대상으로 삼아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재료'로만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배경으로 발달한 서구의 산업문명은 창조세계 피조물들을 거리낌없이 파괴 이용하고 착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 말씀은 사람이 '맡겨진 자연을 돌보고 가꾸면서 자연이 주는 소산물을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창조세계 피조물들의 행복과평화를 위하여 돌보고 가꾸는 자로, 즉 '자연을 다스리는(관리)자'로 지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창조세계 피조물들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전을 헐라!-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행동과 "이 성전을 헐라!"(요 2:13-22)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유대국가에서 '성전'과 '성전체제'는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유대국가 체제를 뒤엎는 혁명적인 행동과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전체제'의 폐해는 종교를 독재체제로 만들고, 사람들을 종교의 노예로 만들어 수탈하고,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극도로 분리하여 사람을 수직 계층적 신분사회로 구분하며, 대단한 형식주의(율법)에 빠지게 하여 심각한 위선을 만들어내며, 복잡한 형식을 유지하기 위한 물량적인 소비를조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가지고 있거나 '성전체제'를 택한 어떤 정치나 종교는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피조물과도 소외시키는 체제인 것입니다.

현대의 말로 한다면, 대단한 공해를 일으키는 체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강도의 소굴"(마11:17-18)이 될 수밖에 없는 체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시대의 예언자들 (이사야,아모스.호세야,예레미야,미가)이  '성전체제'를 비판 반대했고, 오늘 봉독한 본문처럼 예수께서도 목숨거시고 '성전체제'를 허무시기 위해서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무는 자'로 고발되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가셨던 것입니다(마26:61-62,27: 40-41;막14;58-59,15:29-30).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후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다시'성전'과 '성전체제'를 받아드림으로, 자기 폐쇄적이고, 미신화하고, 이기적이고, 세상과 분리하고, 종교귀족화 하고, 위선적이고, 맘몬(물신)적인 소비 지향적이며, 공해를 배출하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기독교회 체제에 반대하고, 개혁하려는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으나,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며, 지구의 생명체 전체를 위협하는 '맘몬' 세력에 '복음'으로 대항하여 싸우지 못하고, 오히려 도피 내지 편승하므로써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완전히 파괴할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국가인 서양나라들의 이른바 거대하고 웅장한 '성전'들은 관광객의 눈요기와 사람의 예술품 정도로밖에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이른바 대형의 '성전'들도 아직 사람들은 많이 모이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자기의 건물이나 체제유지에 분주합니다. 그러기에 '성전' 밖에서 수많은 사람과 피조물이 굶어 죽고, 억울하게 폭력에 피 흘려 죽어도, 나의 '성전'과 '체제'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상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 땅에 사는 사람과 피조물에게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종교적인 욕구만을 채우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행동과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국가의 '성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전정화' 행동이 그저 성전내의 청소 정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전의 기능 내지 역할을 무력화, 폐기하며, 유대교의 운명(옛 구원 방법)에 대해서도 매우 심각한 의미를 주는 혁명의 행동이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른바 '성전' 과 '성전체제' 가 있는 곳, 즉 사람과 피조물에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억압과 파괴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언제나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행동과 "성전을 헐라"는 예언자적인 말씀에 심각하게 응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돌'과 '형식'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옛 '성전'과 '체제'를 허물지 않고는 결코 '복음'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요2:19)의 "성전"( )과 "허물라!"( )라는 단어는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중적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사람의 '몸'(요2:21; 고전3:16; 6:19)을 의미하기도 하고, "허물라!"는 건물의 파괴와 몸의 사망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옛 사람(옛 삶의 존재)을 헐어 버리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맨 처음 사람들을 부르실 때 철저한 요구가 먼저 '옛 삶의 방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가족, 직업, 재산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골 3:6, 엡 4:22-24 ). 그래서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은 기꺼이 '옛 성전'과 '체제'를 허물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마 4:18-22; 막 1:16-20; 눅 5:1-11). 이러한 요청은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로 한 우리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도 나서는 모든 이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으로는 '새 길'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보전은 "삶"이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 보전의 삶(운동)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시간과 여유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해도 상관없는 그런 여러 운동중의 하나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 피조물이 멸절의 위기에 처한 이 시대에 '복음'의 전체의 내용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창조세계를 파괴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복음'의 내용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 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렘 12:4 표준새번역)라고 예언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보전의 길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고, 복음의 내용대로 삶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창조보전(환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목이 "더러움과 친해져라, 불편함을 즐겨라, 단순한(느린) 생활 방식을 가져라,..."등 입니다. 그래서 1회 용품 덜 쓰기, 화학세제 덜 쓰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물과 전기 아껴쓰기, 작고 단순한 것 사용하기, 음식물 절제하기,.....등 많은 덕목들을 실천하기에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도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들이 창조세계를 파괴해 온 생활방식을 그대로 두고, 생활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의 적당한 운동으로, 지엽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는 창조보전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더 좋은 것, 더 편리한 것, 더 많은 것을 소유' 하기를 원하는 지금까지의 우리 '삶'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 할 수 없으며, 창조 보전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람의 탐욕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같이 살아 갈 '동료'로서 보며, 지구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려는 의지로의 창조신앙의 회복과 가치관의 변화와 삶에 방향전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빌 3:8 표준새번역)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더럽다고 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한 결단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야말로 자기의 '성전'과 '성전체제'를 허무는 결단의 삶을 말한 것입니다.

창조보전의 삶을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이 세상의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 하는 생존 방식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더 편안하기 위해,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더 빨리 하기 위해....필요이상의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너지' 사용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더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을 더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반대로 에너지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겨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환경운동의 지침으로 되어있는 예수님의 말씀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마7:13-14)는 이 세상에서의 어떤 고행이나 도피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존방식에 있어서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일 것입니다(현대적인 말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소의 '에너지'로 살아가는 모범을 보이셨으며(마8:18-21), 어떤 형식이나, 규례도 제정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문서나 글자 한자조차 남기시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열두 제자를 전도자로 파견하실 때도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어떤 기구나, 건물들을 가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마10:9-10 표준새번역) 고 지시하셨으며, 또 그 말씀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간 많은 분들이 이 세상의 '에너지'를 최소로 사용하는 청빈, 단순한 삶을 살았으며, 오늘도 많은 분들이 살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상 '성전'과 '성전체제'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삶입니다. 건물과 복잡한 형식을 위하여 과도한 에너지가 소비되고, 또한 무고한 많은 희생제물의 생명이 파괴되었던 것입니다(구약시대). 그래서 예수께서 '성전'과 '체제'를 허무시기 위해 단 한번으로 영원히 유효가 되는 속죄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오직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히 7:26-27, 9:12-13, 25-28, 10:12-18 표준새번역)-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내 '성전'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보전 운동(환경운동)이 삶과 분리된 하나의 운동이거나, 일시적 행사 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성자 성인들처럼 극단의 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보전의 삶은 평범한 삶 속에서, 일상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비상한 가치관의 변화와 삶의 생존 양식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슈마허의 명제는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개인과 그가 속한 가정, 사회, 국가, 세계로 이어져 방향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 세계의 문명 구조가 에너지 대량 소비 구조인데, 개인들이 무슨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고 비관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거대한 "골리앗" 앞에 너무나도 작고 연약한 "다윗"을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즉 기독교에는 구조적이고 집단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앞에서의 개개인의 삶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꺼이 '성전'(건물과 삶의 방식)을 허물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8:34)는 부름에 따라 과감히 '성전'을 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창조보전을 이룰 것이며,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염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젓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헤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11:6-9 표준새번역)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막15:29-30). 마침내 유대국가의 그 견고하고 화려한 성전은 AD 70년 영원히 허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비웃는다면, 창조세계는 사람을 포함해 완전히 파괴 될 것입니다.

김용웅(장로 기감 자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