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창조신학

-시편 24, 74, 136편을 중심으로-

이경숙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

1. 머리말

전쟁, 거짓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는 기존의 모든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자연과 인간의 존엄성마저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다. 또 인간의 편의와 물질문화의 일방적 추구로 말미암아 자연과학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인류 전체는 물론 지구전체가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지구의 생태계를 보존하고 인간과 지구전체가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지구의 생태계를 보전하고 인간과 자연의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환경 만들어 가기 위하여 모든 학문과 종교, 지역과 민족들이 지혜를 모으고 심사숙고할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죽음을 향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WCC는 이 문제들은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이라는 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적 입장에서 이 문제들을 논의하고 나름대로 문제 해결을 모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정의와 평화 창조의 보전이 상호간에 서로 구별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는 정의, 이것이 없는 참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창조의 보전, 이것이 없이도 참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참 평화가 없는 창조세계는 바로 죽음의 세계일 뿐이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정의와 평화는 자주 외쳐왔지만 창조의 보전 문제에 관해서는 소리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니 일부에서는 기독교가 자연파괴의 주범이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너무나 초자연적 존재여서 자연과의 접촉이 용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화의 관계로 보지 않고 대립의 관계로 진술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파멸의 위기로 몰아가는 계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으며, 시편 8편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영광스런 존재로 고백하고 있는데 이런 진술들이 모두 결과적으로 인간들이 자연파괴를 정당화시켜 주었다는 지적인 것이다.

이러한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든 아니든 간에 여하간 기독교 국가들이 다른 종교를 가진 국가들보다 좀 더 손쉽게 자연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지적은 옳다. 근대에는 기독교적 영향 이외에도 자연과학이 싹틀 수 있는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자연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는 이러한 자연파손, 대량살상, 지구파멸의 위기까지도 몰고 오는 사태에 관해 어떠한 진술들을 하고 있는가? 과연 창세기1장과 시편 8편에 나타난 하나님, 자연, 인간에 관한 진술의 본래적 의도가 자연파괴 허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이제 성서의 진술들을 재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많은 학자들이 창1장과 시8편 등 성서의 관련 구절들을 재검토하여 이들 보도들이 자연을 마구 정복하고 파괴하고 훼손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말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지닌 자연보전의 의무와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 밖에 다른 성서구절들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가? 창조, 인간, 자연세계를 언급하고 있는 그밖에 다른 성서구절들의 신학적 의도와 진술은 무엇인가? 이제 창조주로서의 야훼가 자주 찬양되고 있는 시편을 몇 편 골라 그 구조와 내용을 검토하고 그 특징을 종합해 봄으로써 구약성서에 나타난 창조의 보전에 관한 신학적 메세지를 찾아 보기로 하겠다.

2. 시편 24, 74, 136편의 내용과 특징

1) 시편 24편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야훼께 복을 받고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야훼이시다.
싸움터에서 그 용맹 떨치신 야훼이시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영공의 왕은 만군의 여호와 그분이시다.

이 시는 성소에서 사용되던 제의시에 속하며 세단락으로 나누어지는 짤막한 시이다. 1-2절은 피조세계는 모두 야훼에 속한다고 선언한다(비교; 시74:16, 89:11, 95:4f, 22:28, 삼상 2:8 등등). 시편 저자는 땅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데도 흔들거리지 않고 고정되었다고 크게 감탄하며 그러한 야훼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비교; 시136:6, 창7:11 등).

3-6절은 제사장의 물음과 평신도의 대답 혹은 평신도의 물음과 제사장의 대답이 교차되는 "성전허입-예전문"이다. Tora-liturgie라고도 불리우는(Gunkel) 이 단락은 성소에 온 순례자들에게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거행되었던 의식이 반영되고 있고 시15편과 50편의 내용이 비슷하다. 야훼가 원하는 바 그의 백성이 행하여야 할 윤리적 계명들이 짧게 축약되어 성소입구에서 반복하여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7-10절은 영광의 왕, 야훼와 성소로 입장하는 의식을 반영하는 구절이다. 이제 전쟁의 승리자, 용사, 야훼가 들어가시니 문들은 고개를 들라는 것이다. 여기서 야훼는 전쟁의 용사 즉 영광의 왕으로 찬양되고 또 반복되는 문들의 물음과 대답으로 야훼의 영광과 승리가 한층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법궤가 시온성에 올라가는 그런 성전의식이 여기에 반영된 듯 하다.

이 시 24편에는 (1) 창조주로서의 야훼찬양 (2) 야훼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규정이 (3) 영광의 왕, 전쟁의 승리자로서의 야훼 찬양 등 세 가지 모티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인 야훼에게 속하며 야훼는 이 땅을 든든히 붙잡고 고정시키셨다. 그리고 야훼께 속하는 사람이 되는 규정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순수하고, 그 영혼이 허무한 것을 좇지 아니하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것이다. 이렇게 윤리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만이 참다운 야훼의 사람이며 구원받고 복을 얻는다.

그런데 이 야훼는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승리와 영광의 왕이시다. 문들도 머리를 들어 축하하는 야훼의 영광은 곧 전쟁에서의 승리자의 영광이다. 이 배후에 들어 잇는 표상인 바 야훼는 만군의 하나님으로 전쟁에서 이기시는 용사로 고백된다. 그런데 야훼전쟁의 특징은 야훼는 전쟁의 무기로 자연현상을 쓰신다는 점이다. 해, 달, 별, 바람, 구름 등을 동반하신 야훼는 애굽을 바다에 처넣어 승리하시되(출15) 이스라엘 진지와 애굽진지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누어지게 하시고 한쪽에서는 광명을 다슨 한쪽에게는 어둠을 주셔서 애굽군 스스로가 혼비백산하게 하셨고(출14:24) 또 해와 달을 멈추도록 명령하여(수10:12)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승리의 하나님은 곧 자연의 주인이신 창조자 하나님이다.

시24편에 나타난 사고를 요약하면 야훼는 세계만물의 주인이시며 공의를 원하시며 자연을 움직이심으로 역사 속에서 늘 승리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사다. 시24편은 창조, 정의, 승리의 모티브가 섞여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식을 반영하는 제의 찬양 시라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 어찌하여 끝까지 우리를 버리시며
어찌하여 당신 목장의 양떼에게 진노하십니까?
기억하소서,
한 옛날부터 당신께서 얻으신 이 백성을,
당신 차지로 속량하신 이 지파를,
당신의 처소로 정하신 시온산을,
이 끝없는 폐허에게 발길을 옮기소서.
원수들이 성소 안을 휩쓸었습니다.
원수들은
당신의 백성이 모이는 곳에서 고함을 치며
승리의 표로 저희 기를 여기幾기 꽂았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찍는 나무꾼처럼
모든 문들을 도끼와 망치로 짓부수며,
당신의 성소에 불을 지르고
당신의 이름을 모신 성막을 뒤엎고 더럽혔습니다.
우리를 단번에 멸종시키리라 작정하고는
나라 안의 거룩한 예배소를 모두 불질러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표적과 없고 예언자 또한 없어
이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 언제가지 적군의 목욕을 참으시렵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당신의 이름을 모독하리이까?
어찌하여 당신 손을 사라시옵니까?
어찌하여 오른손을 품안에 품고만 계시옵니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나의 임금님,
땅 위 모든 곳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옵니다.
당신은 그 크신 힘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바다 위에 솟은 괴물들의 머리를 짓부수신 분,

레비아단, 그 머리를 깨뜨리시고
그 고기로 사막의 짐승들을 먹이신 분,
샘을 터뜨려 물길을 트시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말리셨습니다.
낮이 당신의 것이니 밤 또한 당신의 것,
해와 달을 제자리에 놓으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야훼여, 기억하소서
원수들이 당신에게 악담을 퍼붓고
미련한 백성이 당신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산비둘기 같은 당신의 이 백성을
저 들짐승들에게 넘겨 주시 마소서.
땅의 구석구석에 폭력의 도가니이오니
당신께서 맺어주신 계약을 기억하소서.
억눌린 자, 부끄러워 물러가지 않고
가난하고 불행한 자,

당신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일어나소서, 하나님 옳으심을 밝히소서.
날마다 당신을 모독하는 미련한 자를 기억하소서.
아우성치는 당신 원수들을 잊지 마소서.
당신의 적대자들
그 우짖는 소리가 높아만 갑니다.

이 시는 민족탄식시에 속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약탈과 황폐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1-3절에서 시인은 야훼 하나님께 탄식과 기원으로 관심을 요청하고 있고, 4-9절에서는 폐허가 된 성소의 암담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아무런 희망의 표적도 없고 예언자도 없는 안타까운 현재의 상태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0-11절에서 또 한번 야훼께 탄식한 수 12-17절에서 시인은 창조에 나타난 야훼의 구원의 시작을 기억하고 피조세계의 주인되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어서 시인은 18-23절에서 자신들의 희망, 즉 야훼가 그의 백성을 위협하는 폭력을 꺾으시어 억눌린 자,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이 모두 야훼 이름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원을 한다. 야훼가 일어나시어 시비를 잘 분별하시어 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시인은 희망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들의 상황을 "우리에게는 표적도 없고 예언자도 없고 또한 이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를 아는 자도 없습니다"(9절)라고 묘사하고 있다. 상황은 매우 참담하고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따라서 시인의 희망은 오로지 야훼에게만 있다. 야훼는 처음부터 왕이시며 "땅 위 모든 곳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는 창조에서 부터 출애굽과 요단강 도강사건에서(13절, 15절) 광야에서의 인도에서(15절, 비교 시 104:10, 줄 17:6) 또 자연의 질서 있는 운영에서 그의 구원을 이룩하신 분이시다. 시인은 적들이 야훼의 이름을 더럽히고 성소에 불지르고 여러 가지 파괴행위를 한 것에 대해 야훼가 더 이상 인내하시지 않고 시시비비를 따져서 원수들을 처벌하실 것을 바란다. 그리고 그는 야훼의 능력에 때해 확신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지금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진노의 결과로 지금까지는 야훼가 적들의 악한 행위를 묵인하시기 때문에 현재의 암담한 상황이 지속된 것이고, 원하기만 하면 야훼는 이 상황을 급변시킬 수 있다.

『이 시편의 내용을 가난안에서 거행되었던 죽어 가는 神=王 신화의 반복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Willesen)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편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소파괴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단지 연대설정은 9절의 표현 대문에 마카비 시대로 보는 사람들과 성소의 모욕이 이방신의 숭배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B.C. 587∼520년 경으로 보는 학자들로 나뉜다. 13∼18절의 표현은 매우 동화적으로 되어 있는데 바빌론 창조신화나 Ras Schamra의 묘사와 매우 흡사함이 눈에 뜨인다.』

이 시에서 시인은 고통과 회의 속에서도 창조와 역사를 통한 하나님 구원행위에 완전히 의지하고 있다. "땅 한가운데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 그의 구원은 창조에서 시작되었고 역사 안에서 지속된다. 이러한 내용은 제2 이사야의 선포와 일치하며 창조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인의 유일한 희망이다. 야훼의 명예회복은 곧 야훼를 따르는 자들의 구원일 것인 바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진노가 그치는 날 이루어질 것이다.

3) 시136편

이 시는 성소에 쓰이던 감사시로 제사장과 평신도들이 번갈아가면서 화답하던,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가 반복되는 제의 감사시이다. 이 시에게서도 창조주로서의 야훼는 역사의 주인으로 찬양된다.

4∼9절은 창조자 야훼의 찬양이고 10∼24절은 역사의 인도자 야훼에 대한 찬양이다. 역사적 사건으로는 출애굽 사건(10∼15절), 광야사건(16∼20절), 가나안 정착사건(21절) 그리고 사사시대의 사건(23∼24절)이 열거되고 감사의 대상이 된다. 이 시에서 특징적인 구절은 2∼3절의 다신론사 등이라고 볼 수 있다. 2∼4절의 표현은 신 10, 17과도 일치하는데 아마도 다신론적 세계에서 빌려온 표현일 것이다. 『바빌론의 마르둑 신의 칭호도 이와 비슷한 것이 많다. 25절의 양식을 주시는 창조자라는 표현은 시 104:27, 145:15, 147:9 등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H. Schmidt는 이 구절을 이 시의 핵심으로 보아 포로 이후에 거행되었던 추수감사절 축제와 이 시를 연결시킨다. 5절의 지혜와 창조와의 연결은 시편연구에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셨다는 표상은 피조세계에 대한 감탄과 경의에서 나오는 바 이러한 하나님 창조와 지혜와의 연결은 곧 야훼를 경외하는 인간의 지혜를 요구한다.』

시 135편은 창조, 역사 지혜가 결합되어 있는 감사시로서 예루살렘 성소에서 사용되던 제의 감사시이다.

3. 시편에 나타난 창조신학

1) 창조와 역사

시편에는 창조주로서의 야훼 찬양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창조주 야훼 찬양은 시편 전편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창조주로서만 야훼가 찬양된 시편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 우선 눈에 뜨인다. 야훼가 단지 창조주로만 묘사된 시편은 시104편과 148편 뿐이다.

시 19편은 상반부만 창조주 찬양이고 하반부는 토라에 관해 언급한다. 시104편은 널리 알려진 데로 애굽의 태양신 찬양과 아주 비슷하며 시 148편도 가나안의 바알신 묘사와 매우 흡사하다. 이렇게 이방의 창조시를 그대로 모방한 시편 이외에는 거의 모든 창조주 야훼 찬양시는 다른 형식과 결부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검토한 대로 시 24편은 창조, 토라, 정의, 승리 등의 모티브와 결합되어 있고, 시 74편은 창조와 역사, 탄식이 결합되어 있고 또 시 136편도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착 등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등장한다. 이 밖에 46, 48편 등도 시온, 언약, 토라 등의 모티브 등과 결합되어 창조주 야훼 찬양이 등장한다. 이렇게 창조주 찬양이 특히 민족의 역사와 결부되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시편들의 특징이다.

가령 애굽의 창조시에는 창조주의 작품이 한때 일어난 완결된 사실로 보고 이를 객관적으로 찬양하도록 부른다고 보고 있다. 창조가 애굽에서는 신들의 세계와 신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증거하기 위한 큰 신의 행위였다면, 이스라엘에서는 창조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야훼의 구원 사건의 출발점이다. 창조의 사건은 객관적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관계 속에서 확인되고 일어나는 하나님 구원사건의 일부인 것이다.

시편의 창조주 찬양의 내용은 그 내용이 길든 짧든 모든 근동의 다른 신들의 묘사를 대체로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시편에는 다신론적 신화적 표상이나 자연묘사 방법들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가량 빛의 야훼의 외투이고, 구름은 그가 타고 다니는 마차이고, 바람과 불꽃은 그의 사자이다(시104:4, 암 9:5, 4:13, 렘 10:10). 자연은 그러나 다른 종교 등에서처럼 하나님이 사는 곳은 아니다. 또 자연은 신적인 존재들도 아니며 단지 야훼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해와 달은 신적 존재가 아니고 야훼의 피조물로서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인 것이다.

야훼는 창조주로서 자연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자연을 주관하시고 보존해 나가신다. 그는 지금도 밤과 낮을 주관하시고, 눈과 얼음도 있게 하시고, 땅을 흔들기도 하시고 고정시키기도 하시며, 땅에 물을 쏟기도 하시고, 장마를 말리기도 하신다(시 148, 암 5:8). 또 야훼는 인간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으며, 가난하게 하실 수도, 부자로 만들 수도 있으시다(삼상2:6f, 시75:8, 146:9, 욥 5:11ff, 12:17ff, 36:5ff등).

욥의 표현대로 그의 위대한 일은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고 또 셀 수도 없다9욥12). 하나님의 능력은 초자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보존되어 가는 이 세상은 좋고 아름답다. 이스라엘 시편들은 이러한 야훼의 능력이 자연창조와 보전에서 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노래한다. 창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좋고 선한 구원의 의지는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착, 그리고 지금까지 역사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창조는 하나님 구원의지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2) 창조와 지혜

시편은 하나님이 자연을 지혜로써 창조하였다고 고백한다. 잠 8장에는 이 사고가 발전되어 있는데(비교: 욥12, 28, 시 104:24, 136:5 등) 이에 의하면 야훼는 만물을 지으시기 이전에 이미 지혜를 지으셨다. 깊은 바다, 샘, 물도 솟기 전에 지혜는 이미 있었다.

그래서 야훼가 하늘과 땅과 구름을 지으실 때 지혜는 있었고 땅의 터전을 잡으실 때에는 지혜가 조수 노릇을 하였다. 이러한 표상은 어떤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든 간에 이 세계의 질서가 기막히게 좋고 그 오묘함이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한다는 점을 잘 말해준다.(비교: 시19A)

이런 의미에서 W.Zimmerli는 지혜문학의 신학은 곧 창조신학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자연을 주관하시고 운영하시는 야훼의 지혜를 깨달아 인간이 올바른 삶의 영위를 도모하는 것이 지혜문학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곧 창조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선물로 스스로 이 우주를 만드셨음을 깨닫고 이 자연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며, 지혜의 근본인 창조주의 권능을 믿고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야훼경외"라는 것이다. 시편에 들어 있는 지혜시에 의하면 율법과 교훈도 이러한 지혜의 실천을 위한 지침 외에 다름 것이 아니다. 지혜문학에서 인간의 세상에 대한 관리 책임과 능력이 요청되고 강조된다면, 시편에서는 창조와 지혜가 결합된 자연, 즉 피조세계 자체가 야훼에 대한 찬양과 경탄, 그리고 신회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찬양과 경탄과 신뢰는 또 다시 피조물로 하여금 올바른 의로운 행실을 하게 한다.(가령 시 1, 37, 49, 73 등)

3) 창조와 심판과 구원

야훼의 위대한 권능은 창조와 승리의 역사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야훼의 적대자 처벌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표상은 시 74편과 같은 탄식시에 잘 나타나 있고 예언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호 4:1∼3에 보면 "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나님을 알아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고리를 물고 가는 데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땅은 메마르고 주민은 모두 찌들어 간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도 함께 여위고 바다의 고기는 씨가 말라간다"고 되어 있다.

또 예레미야는 4:23∼26에서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산을 바라보니 사뭇 뒤흔들리고 모든 언덕은 떨고 있습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사람 하나 없고 하늘에 나는 새도 모두 날아 갔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옥토는 사막이 되었고 모든 성읍은 허물어져 야훼의 노여움에 불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고 그 당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의 죄 때문에 야훼가 분노하신 것이다. 야훼는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심한하시고 자연의 황폐화로 나타내 보여 주신다.

한편 야훼는 그의 성소를 더럽히고 모욕한 이방민족들도 벌하신다. 시편 기자는 야훼의 승리를 확신하며, 그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라고 말하고(시 24, 72, 89, 93, 96,99) 그 자신의 확신을 창조주이면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야훼의 권능에서 얻는다.

이렇게 악의 세력의 심판은 천지창조의 능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시편 기자나 예언자들에 의하면 야훼의 심판도 창조에서 시작된 야훼의 구원행위요 다른 것이 아니다. 야훼의 심판은 그의 권능의 표시이며 구원의지의 표시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훼의 모든 행위는 그의 백성을 살리시기 위함이라는 예언자들의 선포는 옳다(암 5:9, 겔 18:23∼32, 233:10∼20, 호 6:2, 신 3:19 등).

신약에서는 야훼의 창조, 역사, 구원의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완성되었음을 증언한다.

4. 맺는말

이상 위에서 검토해 본 시편의 창조신학은 야훼가 우주의 창조자시며 보존자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늘 승리하는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야훼의 창조행위는 그 자체로 독립되지 않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계속되는 구속사의 시작이며 정의와 지혜가 결부되어 있다고 증언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이러한 창조에서 시작된 구원의 완성이라고 증언한다. 다시 말하면 야훼는 창조에서 출애굽 사건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그의 백성을 살리시고 보전하시려고 역사(役事)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야훼가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면 그것은 우리 세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후손들도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쫓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불의로, 편견으로, 폭력으로, 공해로, 핵무기로, 인류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할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령은 직접 살인 뿐 아니라 이웃을, 다음 세대를 서서히 죽이는 일 그리고 정신적 심리적 살인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우리는 야훼의 살리시는 계획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 없이는 창조세계는 또 다시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창조세계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장이 아닌가?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위해 있습니다."(롬 11:36, 고전 8:6)라는 바울의 말은 우리 신앙의 기본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생명, 지혜, 치유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모든 죽음의 요소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 땅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고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