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복제에 대한 신학적 견해
이정배(감신대 교수 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21세기를 생물학의 시대라고 한다. 생명공학이 주도하는 세계가 올 것이라는 예고이다. 해서 생명공학을 주도하는 국내의 학자들 중에는 기존의 종교규범을 가지고 과학의 변화를 정지 시켜서 그 속도를 늦추어 보겠다는 생각을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많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행위능력을 과거 인류초창기 때 생겨난 규범으로 평가하는 것을 온당한 처사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종이 종교적으로 필연적 가치와 존엄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존재일 뿐이라고 생명공학을 근거짓는 분자생물학이 주장할 때 중요 논쟁거리가 발생하게 된다. 분자생물학에서 정신이란 다른 물질들과 하등차이가 없다. 정신이란 물질들 간의 고차적 관계라고만 해석 된다. 따라서 인간 생명이 갖는 특별한 의미, 초월성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생명공학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 비롯되고 인간복제 문제점 역시 이점에서 논란이 된다 하겠다.

생명(인간)복제에 대한 종교의 일반적 시각

 
주지하듯 생명복제로 인해 성(
)이 다음 생을 재생산하는 유일한 도구도 방법도 아닌게 되고 죽음이란 것이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복제로 인해 육체와 동일한 숫자의 동일한 영혼이 존재하는지, 육체는 같아도 영혼이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불교,기독교를 막론하고 생명복제에 대한 종교적인 근본 물음이다. 무엇보다 업과 윤회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의 존재와 생명관은 바로 생명복제 기술로 인해 심각한 질문을 요청받고 있다. 自作自受의 원리 곧 행한 대로 그 결과를 밟는다는 업사상은 인간의 윤리적 자유의지 및 그 결과에 따라 삶이 이해되고 결정된다는 불교의 기본 사상이다. 나쁜 일을 많이 쌓으면 내생에 축생의 몸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유전자조작으로 짐승이 될 수 있는 유전자를 사전에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얼굴, 삶, 존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업사상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된다. 불교의 존재관을 말하는 윤회사상 역시 업문제가 타당성을 잃을 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 생명체가 죽으면 그것은 형태를 바꾸면서 다시 태어나게 되지만 한존재가 둘 셋 존재로 불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윤회사상에 의하면 우주 생명체는 그 기원에서부터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것으로서 그 존재는 그 존재일 뿐이며, 그 존재이어야만 한다. 불교의 궁극목표는 고통에서의 해탈, 즉 윤회의 업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다. 이를 위해 불교는 탐욕을 버리고 화를 거두고 진리를 깨달으려는 자기 수행에 철저하다. 그러한 자기 수행은 기나 긴 시간이 요구된다. 그러나 생명복제는 수행의 의미, 시간의 의미를 탈각시킨다.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의 세포를 복제하기만 하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문형 인간시대의 도래,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완전한 복제품을 남기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의 결과일 것이다.다시 말해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원리를 망각한 체, 실재하는 자아에 집착하여 나의 생명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담보하며 연기적 세계관을 깨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인간노력과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대자연의 근본원리(연기)에 따른 것임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 생각이다.

 한편 기독교는 모든 인간존재를 하느님 형상(Imago Dei)으로 이해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인간 생명 및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에 모든 인간은 유일회적인 고유한 존재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동시에 모든 인간은 자연주의적 의무나 가치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이루는 초월명령 앞에 선 존재로서 절대 자유한 인격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 시키는 생명복제와 같은 어떤 류의 문화적 조작을 악으로 규정한다. 복제된 인간은 복제하는 인간의 비인간성의 산물 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기독교는 복제 생명을 종속존재(Subbeing)일 뿐 하느님과의 근원적 관계 속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생명복제가 하느님 형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음 처럼 정리된다. 인간 및 생명복제는 삶의 기본 틀인 남성과 여성의 상호의존 관계를 불필요하게 만들며 복제할 인간이 결정됨으로써 인간존재의 미정성, 곧 자유가 박탈되고, 우성인자만을 선호, 복제하게 됨으로써 존재의 다양성이 파괴되며 동일한 복제인간으로 인해 인간 개개인의 본질적 개성이 사라지며 인간에 대한 근본정의가 더 이상 하느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공학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상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신의 예정론의 실종, 인간에 의한 예정론의 등장)

 혹자는 인간 복제가 결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며 이미 존재하는 세포들의 조작이기에 복제행위자가 생명 창조주가될 수 없고 복제된 인간 역시 하느님의 은총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복제된 인간의 신학적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만이 그의 도구적 사용을 막을 수 있는 적극적 방안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생명을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그것을 물적토대로 환원하여 일종의 정보로서 처리하고 있기에 소위 제2창조의 목적이 처음의 목적과 같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생명복제가 기독교적으로 문제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인간 및 모든 생명체의 삶의 조건인 시간성 자체(빛의 창조)를 파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간개념을 공간개념보다 더 근본적으로 것으로 이해하는 현대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시간성의 붕괴는 생명자체의 파괴, 질적 파괴를 예상해야만 하는 것이다.한 개체 생명이 존재하기까지 수 천 만년의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인데 한 순간의 조작으로 생명체의 시간성을 파괴하는 일이 잦아질 때 그로 인해 예상되는 부작용은 명확관화 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은 생명이 인간 기술에 의한 조작가능한 것으로 방치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유익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간복제가 지닌 난문제로 인해 사람들은 곧잘 인간복제는 허용될 수 없으나 다른 생명체, 즉 동물적 유전자 조작은 인류의 존속과 번영, 그리고 안정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불교와 기독교 모두는 생명공학에 대해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에 본질적 이의를 제기한다. 불교,기독교 모두는 생명 자체는 나름대로 고유한 가치(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기에 그들 모두는 인간에 의해 변형되지 않고 자유롭게 발전 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상위개념으로서의 인간은 개미보다 그 의미와 가치가 중요할 수 있으나 그러나 하위 개념으로 개미가 없으면 상위적 존재인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이다.

 자연도 여성을 동근원적 의미로 이해하는 에코 페미니스트들, 여성신학자들은 생명조작을 여성조작과 같은 선상에서 받아 들이고 있는 바(예컨대 최근 생명공학은 더 많은 알을 얻기 위해 칠면조의 모성 본능을 삭제하였다.), 이들 역시 종교적 이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더더욱 자연이 영원불변한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습성(habits) 곧, 자신 속의 내재적 기억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며, 전체 우주의 90%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dark matter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최근 신과학적 논리는 효율성을 신봉하는 공리주의적 생명공학으로부터 영적 생태학으로  인간의 관심이 확대되어 나가야 하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생명공학시대의 새로운 우주론과 종교의 근본 과제

오늘의 종교는 기독교, 불교라는 상호 다른 이념체제를 넘어 생명공학의 세기를 지배하려는 새로운 철학의 토대, 그들의 새로운 우주론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노력을 보여야만 한다.주지하듯 생명공학은 생명의 본질 자체를 해체시켜 전혀 새로운 유기체를 만들려 하는 일종의 발생술(algeny)인 바, 자연 및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 체계를 밑바탕으로 하여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이 새로운 우주론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생명복제는 조만간 자연의 자연스런 한 과정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인간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생명 공간을 개조해 왔었다. 그럼에도 제2창조를 도모하려는 인간의 능력은 종과 종사이의 경계에 의한 제한 때문에 제약을 받아왔다. 분자 생물학의 발전은 이제'종의 본질'이란 개념을 전적으로 파괴시켜 자연의 벽을 허물었고 생명공간은 이렇게 어물어진 자연을 새로운 우주론 속에 편입시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정보 산업을 토대로한 최근 생명공학은 생명체가 지닐 수 있는 미래적 특성을 프로그램화하여 그것이 자연이 스스로 조작하는 방법과 일치(조화)를 이룬다는 확신하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체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주고 그 유기체로 하여금 인공적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기체의 유전자 명령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의 진화 개념 속에는 생명이 영적 본질을 지니고 있다거나 생명 종의 완전성,고유성 등의 의미는 자리할 여지가 없어진다. 새로운 우주론 하에서 생명은 정보로만 인식되기에 생명의 실체 .본질이란 개념자체가 사라진다는 지적이다.종의  경계를 제거하고 생명을 정보로 환원시켜 내는 것만이 생명공학의 관건이 되어 버렸다. 다윈의 '적자생존'이란 말은 이제 생명공학시대에 있어서  '정보화된' 자의 생존'이란 말로 교체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새로운 우주론 하에서 생명공학은 오로지 창조적 진보와 동가적인 개념이 될 뿐이다. 이렇듯 새로운 우주론은 모든 생명개체를 정보를 담아 놓은 일시적 용기처럼 이해하고 있다. 또한 생명공학자들에게 있어 정보는 영생(eternal life)을 위한 핵심개념이 되고 말았다. 생명복제로 유전자 정보를 무제한으로 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종교가 꿈꾸던 영생의 과학적 실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육체가 없는 정보로서의 생명체 (전 자연세계)는 생물에 대한 인간지배능력을 궁극적으로 확대 시키는 것으로서 인간중심주의 산물일 뿐이며 더 나아가 소비를 위해 자연세계 자체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종의 종교의식과도 같다.

 더더욱 인간 몸에 타자로서가 아니라 안식의 주체로서 새롭게 각인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로운 우주론은 반 여성주의적, 육체 혐오적인 영지주의적 특성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성육신 사상을 말해온 기독교 정신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이렇듯 생명공학이 개체종의 고유성(내재적가치)은 물론 선재하는 우주규범도, 보편적 진리도, 불변의 신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한 창조적 진보만을 강령삼아 자연(육체)의 재구성을 위해 자기 자신과 후손을 수정, 변형, 조작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우주론을 요청하고 있는 중이다.

 본래 종교란 과거를 오늘에 기억해 내며 미래를 책임지는 총체적 삶의 표현으로서 과거와 미래를 오늘에 통전시켜 전체를 조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만약 개체종의 본질, 그들의 역사성이 탈각되고 신적인 의미도 사라지며 우주규범도 선재할 수 없다고 생명공학이 주장한다면 보편적 구속력을 지닌 도덕성(종교성)을 강조하는 종교들 모두는 생명공학의 새우주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생물체의 유전적 암호를 재작성하므로써 오히려 수백만년에 걸친 자연생태의 진화적 발전이 중단될 수 있는 위험성을 예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적, 생태학적 시각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자연의 재창조만을 말하는 생명공학의 우주론보다 전지구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이다.

 생명복제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

향후 세계가 생명공학이 주도할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느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럴수록 기술의 선택은 이제 모든 선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미래 에너지원으로 각광을 받았던 원자력이 그 위험성의 발견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자발적으로 그 사용이 포기되고 축소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생명복제 기술도 금욕적으로 제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생명공학시대에 있어서 그 기술을 어느 만큼, 어떻게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제 종교인들 모두의 적극적 관심사안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쌓아온 지식과 경험에 절제와 여운이  동반될 때만 그것이 인류 및 전 자연생태계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리프킨은 생명복제를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벌이는 러시안 룰렛게임으로 보고 있다.

 주지하듯 생명공학, 생명복제기술은 생명의 단위를 세포로 보고 인간정신을 물질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분자생물학의 응용분야이다. 분자생물학에서 인간과 대장균과의 질적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세포들이 만든 단백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이 되고 대장균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인간은 침팬지와 유전학상으로 1~5%정도의 차이밖에 없으며 이러한 차이는 단지 아미노산의 배열구조에 기인할 뿐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바로 이런 분자생물학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복제 및 생명조작은 더 이상 주지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분자생물학자들은 대기 중에 있는 분자들 간의 결합을 통하여 우연히 박테리아가 생겨났고, 그를 근거로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중의 수 많은 분자들 간의 결합을 통해 우연히 박테리아가 생성되려면 우주가 지금까지 진화해 오는데 걸렸던 시간보다 상상을 초월할 만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몇몇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라는 행성 위에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은 생명의 어떤 의도성, 방향성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류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10억을 10억번 반복해서 그중 하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함을 보임으로 생명 유지 시스템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전 우주자연을 종교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연을 재창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자연의 경이(본성)에 대한 설명 자체 속에서 종교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 사물의 내향화(internalization),곧 사물들을 그 목적이나 내적 동인, 본유적 가치의 입장에서 살피도록 과학에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따라서 생명복제를 비롯하여 인체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유전자공학 연구들은 법적 규제의 차원을 넘어 궁극적 신비 속에 있는 우주적 창조성과의 연계 속에서 재고 되어야 할 주제이다.

 생명복제기술은 탈자연화를 지향해서는 안될 것이며 오히려 자연 속에 내재하는 질병 및 고통의 예방 및 치료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자신의 공생애 기간 중 치유행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우렸다. 귀머거리, 절름발이, 소경, 등을 치유 함으로써 전 창조세계를 자유케 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내의 무질서를 질서로 바꾼 창조적 치유행위라고 볼 수 있다. 생명공학기술로 인해 자연내의 약한 것들이 자연의 온전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생명공학기술은 하느님의 구속행위에 동반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생명 공학으로 인해 인간의 탐욕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이미 멈추어진 것을 멈추어지도록 놓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는 쥐의 정소 조직을 활용하여 인간의 미성숙한 정자를 숙성시키는 실험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소위 쥐아기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생식세포가 만나 이미 성장을 멈춰버린 인간세포를 성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성서에 나온 귀머거리,절름발이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인간세포와 동물세포가 결합되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그 당대에는 발전되지 않더라도 몇 세대이후 유전자 이상이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지,생쥐들 간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그것이 사람세포, 더구나 생식세포와 접하게 되면서 에이즈 같은 예상치 못한 병원체가 생겨나 인류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뿌린 불행의 씨앗을 기술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것이 정당화되어져서는 안된다.유기체내에서 어느 한 부분이 죽지 않고 계속 번식만 하는 경우 바로 그것이 암이 되듯이 한계를 넘어서려고만 하는 인간의 욕망은 전체 생명에 있어서 암적일 수밖에 없다. 한 개체로서 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전체를 위해서 참아 내야만할 과제이다.전 생태계의 조화와 질서를 위해서 인간생명의 무한연장 및 인간종족의 번식은 무조건적으로 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어느 시인은 자신의 시신이 인류의학 비전의 한 도구가 되기보다는 한그루 나무의 거름이 되고 싶다는 역설을 말한 바 있다.

 생명공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세상에 복제해 내려 하기보다는 이미 복제한 듯 모든 존재 속에 들어 있는 본래의 모습을, 그것이 하느님의 형상이든지, 불성이든 지간에 삶으로 보여주는데서 미래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샘(01/3/18)지에서 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