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의 시각에서 본 한국교회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김영락목사

1. 여는 말

  기독교환경운동을 창조질서의 회복 또는 창조보전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교회가 벌이는 환경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키는 것으로서 일반인의 그것에 비할 수 없는 신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창조세계를 파괴하면 안 되는 이유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은 파괴된 자연을 청지기로서 회복시켜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환경운동에 소극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체 한국교회 중에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고, 교회 내에서 무엇인가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교회의 비율은 5% 미만일 것으로 추정된다. 예장 통합측의 경우 교단 내에 환경보전위원회가 있어서 매년 지도자 교육을 하며 전국교회에 일년 중 환경주일에 환경예배 자료 등을 우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는 5% 정도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다. 본회에서 2년 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환경의식이 있는 교회들의 경우에 환경에 관한 설교를 하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은데 반해서 환경운동에 예산을 배정하여 사용하는 교회는 낮았다. 이는 의식은 있지만 실천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를 대상으로 환경운동에 참여하도록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시도했지만 매우 큰 장벽을 느낀다. 현재까지 주로 목회자들을 통해서 운동을 소개했으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목회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목회자들이 어떠한 일 때문에 바쁜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근본적으로 목회활동에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교회의 본분 중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적인 통찰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현재 한국교회의 환경운동의 수준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책임은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 환경운동의 지도력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이 기독교환경운동을 반성하고 교회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한국교회와 사회의 창조보전운동이 발전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2. 시류에 흔들리는 교회

가. 물신주의

    환경이 파괴된 직접적인 이유는 과다한 생산, 소비, 폐기의 악순환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근저에는 인간의 물욕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 시대는 돈이 우상이 되어 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라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물의 달콤함에 중독되어서 재물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들도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돈을 위해서 인간의 장기도 매매하고, 윤리를 무시한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생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전쟁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교회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신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다. 물신주의는 돈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무비판적으로 추구하는 것까지 포괄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돈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교회가 현대사회의 이러한 문제점을 깨닫고 절제와 청빈을 강조하고 실천한다면 환경문제나 기타 다른 사회문제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교회가 이제는 재물을 미워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사회를 바로 이끌어야 한다.

 나. 성장제일주의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해온 한국사회에 속해 있는 한국교회도 또한 성장을 해왔고, 아직도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지상목표를 성장에 두고 그 이외의 것에는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제일주의는 진보주의와도 맥이 통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할수록 좋다던가, 경제는 성장할수록 좋다는 진보주의에 대해서 환경운동의 시각에서는 항상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성경에서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큰 것은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장을 위해서, 기업들이 하듯이 큰 돈을 들여 교회 시설을 화려하고, 편리하고, 쾌적하게 하는 것은 일반인에게 교회도 하나의 사업과 같이 비치게 된다. 교인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거액을 들여 실내를 장식하고, 냉난방을 과도하게 함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일주일에 한번 쓸 주차장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헌금을 하는 것 등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에너지 절약하자'는 환경운동의 구호를 부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재정을 남용함으로 신뢰를 약하게 한다.

 다. 폐쇄적 보수성

    위의 두 경우가 교회가 사회의 바람직하지 않은 시류에 휩쓸리는 경우라면 반대로 시류에 거스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교회의 폐쇄적 보수성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지만 교회는 마치 중세기 성안에 안주해 있는 군주나 백성들 같이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이 선교와 봉사임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 교회와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요즈음 같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달이 급속하고, 국제 정세의 변화가 심할 때에 여기에 대응하는 교회의 속도는 매우 늦다. 환경오염의 심각함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사회가 이에 대응하는 속도에 비하면 교회는 안타까울 정도로 늦다. 교회가 선교공동체라기 보다는 자기 만족적인 친교공동체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다. 교회가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의 젊은이들과 여성의 발언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사회의 비정부기구(NGO)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떠나는 현상을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며 겸손한 자세로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3. 미숙한 신앙

 가. 창조신앙의 취약성

    사도신경의 첫머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하지만 입술로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 삶으로는 표출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과 몸으로 온전히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자연을 이렇게 함부로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산과 강과 나무와 동물을 파괴하고 함부로 죽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적인 환경교육이 필요하다. 현재 기성세대는 제도교육에서 환경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다만 매스컴을 통하여 환경의 심각성을 표피적으로 느껴왔는데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창조신앙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가 십자가의 구원에 대해서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 온 것도 문제점의 하나이다. 더구나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은 중시하면서 일반계시인 자연 속에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 왔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생태적 감수성을 키운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동물, 식물 등을 보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창조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창조신앙이 삶 속에 녹아들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환경은 보전이 되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현재 이렇게 파괴된 환경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핍이며, 더 나아가서 인간 영혼의 피폐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신앙의 문제이며 환경의 실태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나. 인간중심적 신학

   환경오염의 주요 원인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이기적인 사고가 공기를 더럽히고, 물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교회조차도 하나님보다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환경위기 시대에 사회는 생태경제학, 생태정치학, 생태건축학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파라다임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도 인간중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루 속히 모든 피조물을 배려한 신학과 교리가 확립되어야 한다. 구원론의 경우도 인간구원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롬8장에 나오는 피조물의 해방과 구원을 포함해야 한다. 예장통합 측의 신앙고백문이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 중에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창1:28의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구절에 대해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가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착취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해 왔었다. 그러나 근래에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선한 청지기로서 '땅을 지키고, 모든 생물을 돌보라'로 해석하고 있다. 요3:16에 나오는 '세상'도 인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가르키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온 우주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골1:15 이하에서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로 국한시키고 있다. 찬송가에도 인간 중심적 요소가 있다. 찬송가 115장 1절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영어 찬송가에는 'Joy to the world! The Lord is come; Let earth receive her King; Let every heart prepare Him room, and heaven and nature sing.'로 되어있다. 우리 찬송가는 구주의 오심을 인간에 국한 시키고 있다.

 다. 허약한 십자가 신앙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두말할 필요없이 십자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몸소 지셨고, 제자들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 건실한 십자가 신앙을 찾기 힘들다. 한국교회의 병폐 중에 하나가 기복신앙인데 이러한 풍토는 십자가 신앙을 허약하게 했다. 환경운동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표출된다. 왜냐하면 환경보전을 실천하는 것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환경을 지키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환경보전은 자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 희생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결과는 부활이라는 더 큰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자신을 위해서 즐겁게 질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환경을 지키는 삶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희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처음에 실천할 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만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이나 경제적 면에서도 유익하다. 이렇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힘들지만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면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마7:13,14에서 말하는 '생명을 얻기 위해 좁은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진리의 말씀이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소비를 줄이고 불편함을 참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활 속에서 십자가 신앙이 강조되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십자가 신앙은 단순히 불편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십자가는 한마디로 '죽고자 하면 산다'는 진리를 보여 주고 있다. 환경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람들마다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쌓여 환경오염으로 모두 죽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환경위기의 현실은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환경을 살리려면 '죽고자 해야 한다.' 환경운동에서는 겸손하고, 절약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 작아지는 것을 미덕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험악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면 '죽는다'고 말한다. 즉,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몸소 죽고자 하면 산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환경오염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개인들이 죽고자 해야 산다는 사실에서 십자가 신앙의 위대함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십자가 신앙은 약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비결이다. 십자가 신앙을 상실한다면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작은 불편한 일들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순교는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는 신앙훈련이 쌓일 때 가능한 것이다. 일예로 일회용컵을 사용하지 훈련에서 시작하여 십자가 신앙에까지 이를 것이다.

4. 교회 구조의 문제점

 가. 개교회주의

    교회의 연합활동이 취약하여 지역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선교과제에 대해서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환경문제는 종교에 관계없이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문제이기 때문에 개신교 교단은 물론이고, 종단을 초월해서 공동으로 대응함으로 주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 교회들이 패쇄적이고 개교회적이어서 지역주민으로부터 고립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역 속에서 환경운동을 통해 교회의 문턱을 낮춤으로 지역선교에도 좋은 결과를 낳은 교회들이 있는데 이런 교회들은 교회 내에 환경상품, 유기농산물, 중고품 등을 비치하고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하곤 한다.

이러한 일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보다 더 큰 단위에서도 중요한 환경문제가 발생할 때에 교회가 연합해서 대응함으로 개신교가 사회로부터 신망을 받을 수 있는데 개교회주의로 말미암아 좌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문제가 되는 생명공학의 문제도 교회가 힘을 합해 교회의 입장을 사회에 표명하고, 법률 제정에도 관여하여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적 풍조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다른 예가 있는데 그것은 새만금갯벌 매립사업이다. 전북 부안군에 위치한 새만금갯벌을 매립하는 일에 대해 전북의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 사업을 찬성했었다. 그 이유는 이 사업이 지역경제 발전에 매우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 사업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는 전체 교회의 여론과는 다른 것이었다. 환경보전과 경제개발이 상충할 때에 교회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창조신앙에 입각하여 판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인들과 교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정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 남성중심의 교회

    교회의 성비율로는 여성이 월등히 다수 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회의 의사결정은 남성들에 의해 주도 되고 있다. 더욱이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나 장로는 대부분이 남성이며, 장년층이나 노년층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구조는 교회를 권위주의적으로 만들며,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여성의 특성을 희생시키기 쉽다. 교회환경운동의 역사를 보더라도 교회여성들은 조직적인 환경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살림살이 속에서 실천을 하며 이를 확산시켜 왔었다. 그런데 개교회의 현실은 여성들의 자치활동조차 목사의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다.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본래부터 생태적 감수성을 가지고서 생명을 보호하는 특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성의 모성애가 교회에서도 발현되도록 고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도화된 교회의 틀에 매이고 익숙해지면서 여성들조차 남성들의 권위주의와 업적주의를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 닫는 말

 환경문제는 여러가지 사회문제 중에 하나가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며 현대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응축된 사회현상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환경위기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가르침을 어기고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아온 결과 인류가 자초한 재앙이기도 하다. 이미 기독교 전통 속에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피조물을 사랑하며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 그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이다. 그는 탁발수도를 하며 가난한 삶을 살며, 모든 자연을 형제, 자매로 여기며 살았었다. 그는 심지어는 죽음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며, 죽음의 순간을 기쁨으로 맞이했다. 이러한 그의 영성은 그가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극도로 절제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도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전라도에서 활동하며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선생이다. 그는 거지들과 함께 살고, 맨발로 다니며 구걸을 하고, 살생을 금하며, 잡초도 함부로 밟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제자들을 불러 기쁘게 춤추며 노래하라고 하고, 기쁨에 충만하였다고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우리가 영적으로 약해지고, 오염된 환경에서 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가 각성하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함으로 교회다운 교회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경직성을 탈피해야 하며, 구체적인 대안으로는 원시적인 신앙공동체나 수도원, 그리고 자비량을 원칙으로 하는 가정교회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근래에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과 함께 농촌에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농촌에 귀농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고, 기존의 농촌교회를 기반으로하되 기성교회의 틀을 벗어버린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도시의 경우에는 제도교회의 문제점을 해소한 가정교회 등이 가능할 것이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제도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기 쉽듯이 제도화된 운동도 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 환경운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중들의 구미에 맞추고, 자신을 널리 알리며, 성장하려고 하면 환경운동의 이념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사실 가장 효과적인 운동은 구호를 외치거나, 말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며,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제도교회의 문제점과 조직화된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농촌이나 도시에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창조보전의 삶을 살아보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생태적 삶을 살았던 스코트 니어링은 운동을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삶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말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는 좋은 예다. 모두가 시골로 갈 수는 없고, 모두가 기성교회를 떠날 수는 없을 지라도 소수의 개척자들이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한국교회 전체에게 신선한 바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두움이 깊어지면 새벽이 오듯이, 이제 머지 않아 새로운 생명의 성령, 생명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 날을 준비하여 세계교회에 생명을 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