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세계의 보전과 그 신학적 성찰

김경재(한신대교수,조직신학)

1. 전환시대의 세가지 당면과제

해방의 영성추구, 다른 문화 및 종교간의 대화, 그리고 지구환경 위기극복 이상 세가지 과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당면과제이다.

그 세가지 당면과제 중에도 지구환경 파괴로 인한 생명 멸절의 위기 앞에서 창조질서를 보존해내는 일은 아마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교회의 선교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교회와 신학의 여러과제들 중 하나라고 말하기보다는 근본적 과제이며 부분적 시정조처가 아니라 총체적 회심을 요청하는 일인 것이다. 이 글은 세번째의 과제를 직시하고 신자연신학의 복권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창조질서의 보전을 지향하는 생명목회신학의 원리들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⑴ 신 자연신학의 대두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모델 : 나그네모델, 정복자모델, 청지기모델, 중추신경계모델

첫째,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초월적 유신론 신관의 재검토를 통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서의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지금도 “계속 창조”하시면 영광으로 완성하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초월적 유신론이나,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소박한 범신론을 넘어서는 범재신론(Panentheism)적 신관에로 나아가고 있다. 범재신관은 세계와 창조주를 구별하되 분리시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는 견해이다. 창조주는 세계현실, 역사현실만이 아니라 자연현실의 매순간 순간마다 새로움과 창조성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자연과학은 물질·정신의 이원론적 실체관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자연은 스스로 자기 안에 자기조직의 생명력과 자기조정의 의식복잡화의 운동을 한다고 본다. 자연은 거대한 모래알의 분자 집합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일종의 근원적 에너지가 시공 4차원의 세계 안에서 파동현상과 같이 어떤 때는 물질형태로, 어떤 경우는 정신형태로 현시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자연의 살아있는 운동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적 구체화의 원리로서, 새로움을 창발시키는 영적 유인자로서 매 순간마다 모든 생명현상 속에 현존하고 역사하신다(에베소 4:6, 로마서 8:18~29, 시편 139편).

그러므로 창조주와 자연의 관계는 시계를 만든 기술공과 시계와의 관계가 아니라, 포도나무와 농부와의 관계라고 본다. 포도나무는 농부에 의해 양육되지만 농부는 포도나무의 포도열매를 먹으며 새로운 힘을 얻는다. 새로움을 맛보며 새롭게 일한다. 창조주로서 피조물 자연 위에 군주처럼 군림하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설득하고, 부드럽게 유인하고, 끈질기게 기다린다.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경험을 공유한다. 세계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이다. 이러한 신관은 분명히 전통적인 초월적 유신론의 신관과는 다른 것이지만 보다 성서적 하나님의 이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신자연신학의 견해이다.

둘째,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다시 정립한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형상론을 “돌보고 관리하라”는 청지기 이미지로 바꾸어 이해할 뿐만이 아니라 한발작 더 나아가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마치 몸이라는 유기체 안에서 중추신경계가 몸의 다른 기관하고 갖는 관계에 비유한다.

자연의 인간화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화가 이러져야 한다. 아니 본래 인간의 철두철미 자연의 소생이었다. 자연이 그의 모태이고, 양육자이고 돌아갈 집이다. 인간의 오장육부를 구성하는 세포의 구성인자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구성인자들과 사실적으로 항상 교체되고 있다. 자연의 대지가 인간의 살이고, 강물들은 그의 핏줄과 신경줄이며, 산맥들은 뼈들이고, 호수들은 그의 두뇌와 같다. 인간의 생명이 자연의 무수한 생명의 희생과 생명체들을 밥으로 하여 성장하고 꽃 피어난 것인즉, 그 인간도 뭇 생명체의 희생물이 되어 주고 밥이 되어 주는 상호공능의 상보상생을 실천해야 한다. 성 프란시스와 함께 자연의 생명체를 형제자매처럼 대하여야 하고, 성 베네딕트처럼 자연과 함께 노동을 통해 대화하고 친구가 되고 성스럽게 변화해가야 한다.

자연은 욕심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지 아니하다. 오로지 의식이 너무 강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존재의 덧없음을 두려워하는 일종의 존재 콤플렉스를 지닌다.

그러므로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자기만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 형제자매를 본래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객물화하고 실용적 가치척도로서 재단하고 분류해 버린다. 자기 주위에 많은 소유물을 쌓아놓지 아니하며 자기존재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생명 기운의 흐름을 차단하고, 생명의 기운을 한 곳에 고여 있게 하고 그래서 독소가 생기게 하고 생명체를 병들고 썩어가게 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단순한 정복자나 관리인의 비유를 넘어서서 중추신경계의 기능이 전체 몸의 유기체적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교할 수 있다. 중추신경계 조직은 몸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자기의식활동을 하면서, 전체 몸의 정보전달, 제어, 조화 균형을 총괄한다. 한마디로 단순한 청지기 이상의 관계이다. 이러한 각성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뒤에 좀더 상론하기로 한다.

셋째, 신 자연신학은 역사일변도의 신학적 사유를 중화시킨다. 자연과 역사는 실재의 양면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 속이다. 자연 없는 역사는 공허하고, 역사 없는 맹목적이다. 자연의 역사화가 지난 기독교 신학의 중심과제였다면 역사의 자연화가 이제 각성되어야 한다.

자연의 원리는 순환성, 상보성, 다양성, 창조성에 의해 변화하는 과정적 실재이다. 직선적, 목적론적 발전사관은 자연의 나선형의 순환과 진전ㅇ이라는 이중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 단일 극성적 사고보다는 양극성적, 또는 다극성적, 또는 다국성적 사고가 요망된다. 자연의 세계, 하나님이 끌어가시는 이 신비한 창조의 세계는 생명체 종의 다양성과 다채로움으로 가득차 있다. 다양성과 다채로움은 긍정되고 사랑 받아야 한다. 획일주의적 사고, 일사분란한 통일성이란 근대적 독단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별되어 각각 자기의 위치와 공능을 지니면서도 서로 불가분리적으로, 유기체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한한 전능하심과 절대자유자로서 피조세계 전체로서의 만물 위에 초월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풍성으로 인하여 피조물 안에, 피조물을 통하여 일하고 계신다(엡 4:6). 인간의 자연의 일부로서 정신적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통일체로서의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육체적 인간”(psychophysical person)이며 자연 안에서 자연에 의해 자연과 함께 자라고 그의 생명 자체가 자연과 내적으로 구성적으로 자연과 관계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글자 그대로 유기체적 관계에 있다. 인간의 모태로서 자연 그 자체가 지니는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신자연신학의 탐구가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는 소명을 받고 있다.

넷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르게 재정립하기 위해서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데로 그리스도교사와 그리스도교 문명사를 뒤돌아보면 대체로 네가지 모델이 있다. 나그네 모델 정복자 모델, 청지기 모델, 중추신경계 모델이 그것이다.

각각의 모델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자연을 이해하는 지식정보의 질량, 자연을 개발하는 생산도구와 수단의 발전속도, 일정한 역사적 사회관계, 그리고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는 인간의 성숙도 등등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① 나그네 모델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계 안에서 자기들의 실존을 이해할 때에 “나그네”로서 자의식을 가졌던 것은 초대교회, 고대교회, 중세교회와 종교개혁시대까지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자기이해 모델이다. 나그네 모델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 그리고 자기가 성취한 것에 대한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을 가변성, 덧없음, 과정성, 매이지 않음 등으로 이해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항구적 종교적 의미가 있는 실존이해임에 틀림없다. 진실로 인간은 나그네인 것이다.

그런데 세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나그네 의식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동시에, 자연은 일시 인간이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머물고 가는 “주막집”, “여관”의식과 관련되고 지구생명과 자연관의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의식이나, 자연을 개발 보호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의식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뿌리 없는 인생관을 낳고, 몸이 지닌 육체성을 최대한 무시하고 정신적-영적 구원을 중요시하는 플라톤적-영지주의적 물질관을 갖게 한다.

사실 “나그네 모델”의 철학적 종교적 기초는 플라톤 철학과 영지주의적 종교가 제공하였다. 인간의 자연의 거치른 황야를 개간하는 효과적 도구를 전혀 가지지 못하고, 인간의 육체노동이라는 고달픈 작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리고 고대, 중세사회의 전쟁, 유행성 질병, 전재군주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인간들은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스스로 “나그네”로서 규정하였던 것이다. “나그네 모델”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극적 관심도, 개발과 관리의 책임의식도 없고 최소한도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자연 안에서 얻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② 정복자 모델

인간이 자연 속에서 종복자와 지배자로서 자기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창세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성경구절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구는 “나그네 모델”이 주효하던 고대나 중세 그리스도인들도 읽어 왔기 때문이다.

“정복자 모델”은 근세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인력과 축력의 오랜 노동력의, 시대를 벗어나서, 기계를 발명하고 석탄 석유 등 화석에너지를 사용하여 지구표면을 공략하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이 스스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한 모델이다. 위의 성구는 그러한 근대인의 자연정복의 능력획득을 축복하고, 자연훼손의 정복적 수탈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무기로 활용하였을 뿐이다. 정복자 모델은 수천만년동안 형성된 생명의 생태계를 단번에 밀어부터 파멸시켜 버리는 포크레인이나 불도저로서 상징된다. 지난 300년간 이러한 “정복자 모델”이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체의 멸종을 가속화시켜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정복자 모델”은 인간 생명체와 자연과의 생태적, 유기적 관계는 완전 무시되고 물리적 힘의 역학관계만이 작동한다. 이러한 모델의 효시적 사상가는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 아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3)일 터인데, 그는 ‘뉴 아틸란티스, 1627’라는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지식이 곧 힘”이라는 그의 신념 속에서 자기 뒤에 따라오는 300~400년 간의 “정복자 모델”을 신봉하는 근, 현대인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③ 청지기 모델

청지기 의식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간의 자기이해모델로서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눅 12:42~44, 롬 16:23, 고전 4:1~2, 9:17, 엡 3:2) 청지기(oikonomos)는 청지기직(oikonomia)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 소속한 종들과 자녀교육, 논밭과 포도원 등과 밭의 생산 수확 관리, 집에 드나드는 숙박객의 관장 등 한마디로 주인의 재산과 일체의 산업을 기획 관리, 집에 드나드는 숙박객의 관장 등 한마디로 주인의 일체의 산업을 기획 관리하는 사람이다. 주인에게 절대 신임을 받는 유능한 자이어야 하고,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단순한 관리인이라는 철저한 자기의식을 지닌 자이어야 한다.

이러한 청지기 의식은 크리스챤이 자연과 역사의 관리를 위임받은 책임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인의 자의식을 잘 나타낸다. 그리하여 세계교회협의회 안에서 책임사회론이 논의되었을 때 “청지기직”(Stewar-dship)이 강조되었으며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생태학적 윤리의 기초로서 교회가 청지기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청지기 윤리의식은 칼빈과 그 후예들 특히 퓨리탄들의 기본정신이었고 그 정신을 토대로 하여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되었음을 막스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강조하였다.

분명히 청지기 모델은 생태학적 윤리의 기초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를 위한 신학적 토대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한 자연파괴의 위기극복을 위한 신자연신학의 모델로서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첫째, 청지기 모델은 청지기와 그가 관리하는 큰 집안의 구성인자들과의 관계가 외면적-사회적 관계인 것이지 내면적, 유기체적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책임관계는 청지기가 그에게 재산 경영관리를 위탁한 집주인(창조주)과의 상하수직관계일 뿐이지, 논밭의 생명체나 집안의 사람과의 수평적 책임관계의식은 있을 수 없다.

세째, 이 청지기모델은 봉건사회의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성숙한 자율과 민주적 참여의식을 공유하는 계몽된 현대인들의 성숙한 생태학적 윤리모델로서는 부적합한 면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④ 중추신경계 모델

위에서 말한 세가지 모델과는 전혀 다른 바람직한 모델은 “중추신경계 모델”이다. 중추신경계란 인간의 몸 유기체 안에서 두뇌와 척수로 구성된 신체기관을 말한다. 중추신경계는 신체의 다른 부위와 유기체적으로 관계돼 있어 영양, 산소공급 등 중요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받음으로서만 존립할 수 있다. 인간중추신경계는 신체기관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적 자의식(Self - consciousness, Reflective power) 기능을 가진 기관이다. 다시 말해서 반성적 사유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감상하고, 경외하는 정신적 능력을 갖는다. 따라서 오관의 감각 정보를 조절, 전달, 기억하고, 몸의 각 기관의 조화균형 발전을 위해 조정자와 통제자 기능을 담당한다. 그것의 기능이 몹시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의 진화는 기관을 특별히 보호하는 두개골과 척추의 추골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중추신경계가 신체의 다른 기관보다 특권을 누린다거나, 양분을 독식한다거나, 독재군주와 같은 자기강화의 폭력수단을 사용하지 아니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바로 몸과 중추신경계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공동운명을 지니고, 내면적 관계를 가지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면서도, 전체를 조망하고 조화와 균형발전을 위한 조정과 조화의 심부름을 하는 역할, 그것이 오늘날 자연 안에서 인간이 해야 하고, 또 인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창조주로부터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자연신학은 이러한 중추신경계의 모델을 지지하면서 생태학적 윤리와 목회신학의 재정립 필요성을 촉구한다.

⑵ 생명목회의 지침원리

첫째, 생명목회는 “창조질서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하여 회중들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교육해야 한다(호 2:18~23, 계 22:1~5).

지금까지 대체로 “창조질서의 보전” 개념이 자연의 질서를 바르게 지키는 운동이거나 자연환경보호 운동쯤으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크리에이션”(Creation)이라는 어휘가 “창조질서”라고 번역된 것 자체가 잘못이다. “피조물 전체”를 말한다. “보전”이라는 개념도 오해되어 있다. 본래의 “인테그레이션(Integration)”은 유기체 어느 부분이 훼손되거나 손상을 입거나 원활한 통일성을 상실함 없이 전체가 건강하고 조화롭고 유기적 통전성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창조세계의 온전성”, “피조물의 통전성”의 뜻이라는 것을 바르게 교육해야 한다.

둘째, 인간의 생명은 자연 위에, 자연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서 성장하고 삶을 누리도록 창조주에 의해 피조되었음을 말씀을 통해 선포되어야 한다(창 2:4~9, 시 104:1~35).

그러므로 인간의 자연 위에 군림하는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연과 같은 형제자매이며, 자연을 돌보도록 위탁받은 맏형과 같은 청지기이며,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피조물세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적인 몸이라고 볼때, 인류는 두뇌와 중추신경계의ㅇ ㅕㄱ할을 해줘야 하는 조정자, 정보전달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바르게 교육해야 한다.

세째, 창조주와 피조세계의 관계는 기계적 모델로서가 아니라 유기체 모델로서 이해되어야 한다(요 15:1~10).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전체 자연의 기쁨과 슬픔과 성장의 환희와 소멸의 허무를 함께 맛보시는 임마누엘의 창조주 하나님, 처음 태초에 창조하셨고 지금도 계속 창조하시는 “계속적 창조”의 주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네째,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과 구원의 완성은 역사를 통한 역사의 구원만이 아니라 자연의 피조물의 신음과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로 변화시키고 참여시키는 전 피조세계의 완성임을 강조해야 한다(롬 8:18~25).

주기도문의 “하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 계시록에서 “새하늘과 새땅”의 비전이 모두 자연을 배제하는 초역사에로의 이월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피조세계의 온전한 완성과 영광이라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다섯째, 생명문화의 윤리는 인간중심적 윤리가 아니라 생태학적 윤리임을 고백해야 한다. 생태학적 윤리란 자연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들과 자연의 피조세계가 상호보완, 상보상생, 균형과 조화, 지속과 순환이 가능하도록 하는 행동이 선이며 정의임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생명목회에서 삶의 지향성고 특히 물질적 생활은 “소비가 미덕이다”거나 “더욱 더 많을 수록 좋고 축복이다”라는 자세가 아니라 “일용할 재화면 족하고 절제와 나눔의 삶이 선이다”라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일곱째, 환경운동은 에큐메니칼적이어야 하며, 교파나 종파를 초월하여 전 지역주민과 생명연대전선을 구축해가야 한다. 환경운동의 모토는 “생각은 항상 범지구적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실천운동은 구체적 가정과 마을에서 미시적으로!”이어야 한다. 생명운동은 자그마한 실천으로부터 시작하고, 실천을 통하여 배우고 깨닫는 프락시스 교육방법이라야 한다.

여덟째, “창조세계의 보전”운동은 그것 하나로서만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와 사회공동체가 본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존속하기 때문에 “창조세계 보전” 문제는 ‘정의’, ‘평화’, ‘사랑’이라는 선교의 다른 근본주제와 분리하여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목회를 통해 인지시켜야 한다. JPIC는 유기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시킴으로써 지역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나 지방자치제 실시나 군비축소 등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각성시킬 때만이 타락한 정치-경제 기득권 집단에 의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공공연한 자연생태계 파괴를 방지할 수 있다.

아홉째, 개체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 조직과 특별위원회 구성에 있어서, 그리고 예산편성계획에 있어서 “생명과 환경위원회”(가칭)를 교회마다 신설하고 목회자의 특별한 관심과 지도 아래서 활성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위원회의 구성은 교회 회중의 연령, 성별, 직분 등을 망라한 참여적 조직체가 되어야 하고, 형식적 조직체로 머물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열째,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 시대에 보여주어야 할 모습은 “경건한 삶과 절제할 줄 아는 삶”, “물질적 외면적 풍요보다는 영적 내면적 풍요한 삶”, “이기적 독점 아닌 함께 나눔의 삶”의 스타링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실천에 옮겨야 할 때이다. 결국 “창조세계의 보전과 생명목회”란 교회를 영적으로 갱신시키고, 회중들로 하여금 성령의 부르시는 소명에 귀를 열게 하는 영적으로 거듭나는 사건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목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