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성서학습 I

환경적으로 올바른 성경해석

정호진 목사(생명누리 농원)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거름의 중요성

지난해 늦봄에 잡초가 잔뜩 돋아나 있는 밭을 괭이로 일구어 이랑을 만들고 시장에서 사온 여름 무우와 배추, 그리고 알타리 무우씨를 넣었다. 모두 해서 한 스무평 정도 되는 얼마 안되는 것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물론이요, 몇몇 이웃들에게도 무공해 무우 배추를 나눠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땀을 흘렸다. 씨를 넣은지 며칠이 지나자 파아란 싹이 돋고 잎이 나오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며칠이 멀다하고 자주 가서 풀도 뽑아 주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이 놈들이 싱싱하고 힘있게 자라주질 않는 것이었다. 어떤 이랑의 것들은 올라온지 한 열흘쯤 지난 뒤에는 아예 말라 죽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유독 몇 군데의 것들만이 정말 검은 빛을 띠며 활기차게 자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한결같이 지난 봄에 과수 묘목들을 심으며 거름을 잔뜩 주었던 주변에서 그 거름기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크기를 비교해보니 자그마치 5~10배 정도는 차이가 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늦었지만 부랴부랴 이랑마다에 웃거름을 넣어주고 흙을 덮어 주었더니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농사에 대한 또 한가지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땅은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생명이 싱싱하고 활기있게 자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또 참으로 생명이 생명답게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땅과 하나님과의 관계

본문으로 선택한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이 본문이 전해지고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라는 사실은 성서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 강대국 바빌론은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가 노예로 부렸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인데 그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진 사회에서 노예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책임을 맡기셨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그 속에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눈을 들어 살펴보시니 참으로 보시기에 좋았다.’ 그렇게 좋으셨다는 내용이 자그마치 일곱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좋았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심고 가꾼 채소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가슴 하나 가득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쁨을 어찌 돈이라는 가치로 잴 수 있으랴!

그렇게도 보시기에 좋은 하늘 땅 바다와 그 속의 것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는 더욱 기뻐하셨다. 나에게도 나를 닮은 녀석 둘이 있다(너무 나 자신의 경험이야기가 많이 나와 독자 여러분에게 죄송한 마음이지만 좀더 설득력을 갖추려다 보니 그렇게 된 점 이해바라며…). 하나는 아들 다른 하나는 딸이어서 생김새는 각기 다르지만 그래도 두 놈 다 기가 막히게도 엄마 아빠를 빼어 닮은 것을 보며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닮은 녀석이 처음 태어나던 때의 감동이 일곱 살 네살된 아이들을 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기쁨 잘 모르실 거다(약간 농담). 나를 닮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는 좋음은 내가 심고 가꾼 나무나 채소를 보는 좋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찌 천하를 준다한들 이 아이들의 생명과 바꿀 수 있으랴?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남녀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뭐라고 말씀하셨나? 이야기가 더 전개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이라면 어떤 말을 하겠는가를 꼭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나는 밭에 갈 때마다 나를 닮은 아들녀석을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심심하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데리고 가 이것저것 식물과 동물이 자라는 것을 보며 생명에 대한 사랑을 익혔으면 하는 바램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케도 아들놈은 아빠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빠 엄마랑 같이 일하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일하러 가자면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렇게 데리고 간 아들녀석에게 내가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미 우리의 소유로 되어 있는 채소밭, 그래서 정성들여 가꾸고 보기에 아름다운 그 채소밭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를 잘 살펴서 거름도 주고 김도 매 주라고 하지, 어찌 아들놈에게 우리의 채소밭을 마음대로 휘젖고 정복하라고 하겠는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정말 좋다고 찬탄을 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리자인 사람에게 자신이 정성들여 만드신 땅과 그 위의 것들을 맡기시며 정복하고 다스리고, 부리라고 한다면 전혀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의 오판인가 아니면 성서를 기록했거나 번역한 이들의 잘못인가?

다른 본문에서의 입장

환경문제가 우리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자 많은 성서학자들은 창세기 본문이 지닌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해보고자 얘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용기가 없어서인지 ‘정복하고, 부리고, 다스리라‘는 번역은 그대로 둔 채 정복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려고 땀을 흘리지만(예를 들면 왕같은 통치 개념을 사용하여 다스림이 정복이 아니라 완전한 통치라는 등) 별로 크게 도움이 못되는 것 같다. 구약을 전공하는 나에게도 이 문제가 혼란스러워 먼저 성서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셨다(창 2:15). 에덴동산이나 이 땅이나 모두 하나님의 손수 지으신 작품인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에덴동산 이외의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되어도 좋고 에덴동산만 돌보는 곳이 되어서 되겠는가?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2:3) 땅은 분명히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황폐하게 하거나 다른 이에게 팔아넘겨서도 안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내가 세상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그 누가 세상의 기초를 놓았느냐?”(욥 38:3~6). 하나님 자신이 정성들여 기초를 놓으신 땅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 104:1~30).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맞춤하듯 하나님께서 땅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땅이 다시 소생하고 생기를 띠게 된다. 이처럼 성서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계시지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생각하시는 흔적이 없다. 심지어 홍수로 멸망을 시키실 때도 사람들의 죄악 때문이었던 것이지 땅이나 그 위의 것들 때문은 아니었다(창 6:5~7).

성서오역의 역사

성서를 통해 살펴본 하나님과 땅의 관계는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서로 적대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참으로 좋은 관계를 가진 땅을 향해 정복하라고 하실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성서 번역가들의 잘못이다. 개역성서나 공동번역 새번역 모두 ‘정복하라’ 일색이다. 영어 독일어 헬라어 모두 마찬가지다. 어찌 하나같이 이럴 수 있는지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열심히 히브리어 원어를 살피기 시작했다. 히브리어 원어(카바쉬, 롸다 등)들이 공교롭게도 두 가지의 해석이 다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드디어 문제가 풀리는 기분을 좀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은 1) 정복하다, 쳐서 복종시키다, 지배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2) 봉사하다,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다, 돌보아 주다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이제 문제는 자명하다. 본래 히브리어 기록자는 잘못이 없다. 단지 약간 혼동이 될 수 있는 소지를 없앴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본래의 성서전통을 따라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고, 짐승들을 돌보아 주라고 번역했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번역하는 것은 번역자의 관점의 문제이다. 아마도 그런 오역의 역사는 하늘의 것만 소중하고 땅을 천한 것으로 여겼던 그리스철학의 영향(헬라역)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며, 그 뒤로 자신들의 정복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던 로마(라틴역)를 거쳐 한결같이 세계의 정복자인 영국(제임스왕역)과 미국(홀리 바이블)이 그 전통을 이어갔고, 그 아류쯤 되는 한글성서도 그런 오류를 계속 반복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번역들에는 정복자의 논리가 은밀히 감춰져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땅과 짐승을 빼앗는 자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 정복하고 다스리겠지만, 사랑스런 자기 몫을 돌보는 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얼마나 보기에 좋고 사랑스러워 기쁨에 넘치는 대상을 향해 더욱이 자기 닮은 녀석에게 정복하라니….

새로운 번역

성서는 고정되어 있더라도 보는 자의 삶과 눈에 따라 같은 본문이 달라져 보일 수도 있다. 올바른 성서 이해를 위해서는 성서 해석작업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되는 것은 성서를 올바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누구나 올바로 성서를 볼 수 있도록 성서가 가진 본래의 눈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번역에 임하는 것이다. 성서가 가진 본래의 눈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번역에 임하는 것이다. 번역작업에는 은연 중에 번역하는 자의 가치관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한가지 본문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공동번역 판관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개역). 이 번역을 서로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번역들에는 왕이 없던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한 시대에 대한 부정과 긍정이 엇갈려 담겨 있다. 왕이 있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히고 안정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왕권옹호자들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던 것에 대한 비판을 가하겠지만,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고 민중의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 시대는 참으로 좋은 시대였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누구나 소신껏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은 시대일까? 이처럼 번역자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이제 본래 히브리 성서기자의 눈으로 다시 한번 본문을 새로 번역해 보자. 아마도 그 의미는 전혀 새로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돌보아주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돌보아 주어라!”

이 번역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과제는 철저히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고, 그 위에서 자라는 식물과 동물들을 잘 돌보아주는 것이다. 실제로 땅과 그 위의 사물들을 사람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이야기가 완성된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하나님의 속생각을 꿰뚫어 알아 맞히기라도 한 듯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