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와 환경윤리

김정욱(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이 지구는 하나님께서 일부러 수고스럽게 진멸하지 않으시더라도 핵무기나 환경오염으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들 흔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환경오염이 서양문명의 소산이고 서양문명이란 것이 곧 기독교 문명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책임을 기독교에 지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을 하셨고 그래서 땅을 정복하는 문명이 바로 환경오염을 낳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질책을 듣고서도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은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땅이란 것은 정복해야 할 대상인 것으로만 알 뿐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는 인식은 별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6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도 이 창세기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연이란 것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야 하고 인간은 이 자연을 길들이기 위해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의 청교도들도 자연을 인간의 적으로 보고 자연과 싸워 이기는 정신을 미덕으로 기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대체로 자연을 인간이 복종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관은 성경의 가르침이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고 그 부족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한데서 나타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그곳에 살게 하시며 인류에게 땅을 지키고 다스리라는 임무를 주셨으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파괴하면서가 아니라 그에 순응해서 살고 또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움직이시는 법칙에 따라서 그 자연을 가꾸고 지키며 거기서 나오는 소산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이면서 또한 특권이어야 한다. 우리가 정직하고 겸손한 눈으로 자연환경을 들여다보면 그 가운데에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연환경을 가꾸고 지켜야만 하는 이유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일관되게 우리에게 땅을 가꾸고 지키며 생물들을 보살피라고 가르치고 있다.

환경이 어떤 법칙을 따라서 움직이는가를 먼저 간략하게 알아보자.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챨스 엘통이 북극지방의 곰섬(Bear Island)으로 탐험을 가서 여우가 거기서 무엇을 먹고사는가를 연구한 적이 있다. 조사해본 결과 여우가 새들을 잘 사냥해 잡아먹고 있었다. 그 새들이 먹는 것을 보니 어떤 새들은 풀을 뜯어먹고 어떤 새들은 곤충들을 잡아먹는데 그 곤충들은 결국은 풀을 먹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먹이연쇄이다. 여우가 새들을 열심히 사냥해 먹었지만 그 먹이연쇄를 따라가 보면 결국 풀을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쌀밥을 먹지만 쌀은 흙에서 난 것이고 쇠고기를 먹어도 소도 역시 흙에서 난 풀을 먹고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흙에서 난 것을 먹는 셈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범죄한 후 그를 쫓아내면서 여호와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생선을 많이 먹기 때문에 바다로 가야 할텐데”하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실은 여우가 잡아먹은 새 중에도 바닷새가 많았다. 바닷새가 무엇을 먹나 보니 물고기를 먹고 물고기는 동물 플랑크톤을 먹으며, 동물 플랑크톤은 식물 플랑크톤을 먹는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그래서 여우가 먹는 것을 다 쫓아가 보면 결국은 땅에 있는 물이나 바다에 있는 식물 플랑크톤을 먹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러면 바다에 있는 식물 플랑크톤은 무엇을 먹고사는가? 식물 플랑크톤이 무엇을 먹고사는 지를 알려면 식물 플랑크톤이 어디에 많이 사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나 식물 플랑크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잘 볼 수가 없고 대신 물고기가 있는 곳을 보면 된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플랑크톤이 있어야만 살 수 있고 또 플랑크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물고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고기가 있는 곳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물고기는 대서양이나 태평양의 깊은 바다에는 전혀 살지 못한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육지 인근의 바다에서만 살고 있다. 육지 인근에서도 육지의 강물이 흘러가서 섞이는 범위에서만 살 수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나 강에서 흘러나와 퇴적한 영양물질을 위로 떠올리는 용승류라는 파도가 치는 곳에 가장 많이 있다. 이것은 결국 거기에 플랑크톤이 많이 있다는 표시이고 이것은 또한 그곳에 영양이 가장 많이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왜 이런 지역에만 영양이 있는고하면 이런 지역에라야만 땅에 있던 영양이 빗물을 타고 강물을 타고 흘러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생물의 영양의 근원은 결국 흙에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생선을 많이 먹어도 결국은 흙으로 가는 것이 옳다. 그런데 흙에 있는 그 영양도 알고 보면 흙에서 샘솟듯이 그냥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여우가 똥을 싸고, 새가 오줌을 싸고, 풀이 썩고 한 것들이 영양이 되어 땅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영양이라는 것은 생물체 내를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그 순환과정에서 잠깐 흙을 거친 것 분이다.

이렇게 영양을 순환시켜가면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생태학에서는 그 기능에 따라 세집단으로 나눈다. 하나는 풀이나, 식물 플랑크톤 같이 비료만 주면 햇빛을 받아서 크는 것들이다. 이런 것을 『생산자』라고 한다. 그리고 새, 여우같은 동물들은 아무리 비료를 줘도 크지 않는다. 식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이것들을 『소비자』라고 한다. 또한 동물이나 식물은 썩어야만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비료가 되는데, 썩히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것이 박테리아 곰팡이 같은 미생물들이다. 이것들을 『분해자』라고 한다. 그래서 영양은 세 생물집단을 항상 순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환하는 과정에서 흙을 한 번 거치는 것이다. 이 세 집단의 생물들은 서로 영양을 돌려가면서 쓸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의 생활환경을 알맞도록 조절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생물이라도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미생물인 박테리아나 곰팡이는 식물이나 동물이 없이는 먹을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살 만한 환경을 얻지 못하여 생존할 수 없다. 또한 동물도 식물이 없이는 먹을 것이 없고 미생물이 없이는 죽은 몸이 썩지도 않는다.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박테리아나 곰팡이가 없으면 잎사귀가 아무리 땅에 떨어져도 썩어서 비료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식물은 동물이 없어도 살 수가 없다. 동물이 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기 때문이다. 요즘 설악산 일대에는 조릿대가 크게 번성하고 있다.

그 이유는 조릿대의 죽순을 먹어치우는 사슴이나 고라니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조릿대가 덮어버린 땅에는 이제 소나무 씨가 떨어지고 참나무 씨가 떨어져도 발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지금 남아 있는 나무들이 죽은 후에는 다시는 소나무나 참나무가 날 수가 없게 된다. 사람이 경작하는 농작물도 사람이 거두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생물들이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생태계이다.

생물들끼리만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 생물과 물, 공기, 흙 등의 환경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생물에 필요한 영양은 흙에 저장이 된다고 했는데 이 흙은 점토와 유기질로 되어 있다. 점토는 암석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깨어진 것이다. 암석이 아주 작게 깨어지면 성질이 돌과 아주 달라진다. 그래서 전기적으로 음전하를 띠게 되는데, 이 전기적인 힘에 의해서 칼리, 칼슘, 나트륨, 철분 등의 생물에 필요한 미네랄을 잘 흡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흙 속에는 유기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유기질이란 동식물이 썩은 것이다.

그런데 이 유기질은 반대로 양전하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음전하를 띤 인산염이라든지 질산, 황산 등의 비료를 잘 흡착하고 있다 그래서 점토와 유기질이 생물에 필요한 영양소를 다 보관하고 있다가 공급해 주게 되는데, 바로 이 유기질이라는 것은 생물이 있어야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생물이 없으면 유기질이 만들어지지 않고, 그리고 흙에 유기질이 없으면 생물이 살 수 없는 서로 엇물린 관계에 있다.

또 흙에 있는 유기질은 물기를 머금어야만 푸석푸석한 채로 굳어진다. 그리고 푸석푸석해야만 삼투압에 의해서 깊은 곳에 있는 지하수를 끌어 올려 식물 뿌리에 물을 공급할 수가 있고 또 푸석푸석한 구멍으로 물을 보관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흙은 물이 없으면 기능을 할 수가 없다. 물은 또한 우리 몸의 생화학반응을 전부 주관한다. 그런데 육지에서는 나무가 없으면 물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다. 나무가 없이는 비도 오지 않고 설혹 비가 왔다 할지라도 물이 보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무는 또한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공기도 보면 생물들은 산소의 공급을 받아서 살고 식물들은 산소를 만들어내고 하는데 알고 보면 식물들도 산소가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식물이 없으면 산소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공기 중에는 그 외에도 아주 묘한 점이 많다.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은 외계에서 오는 아주 강한 광선을 걸러 주기 때문에 지구상의 생물을 보존해 준다. 또한 공기 중에는 아주 미량이 있지만 이산화탄소나 수증기 같은 것은 기온을 딱 알맞게 조절해 준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기온은 이 이산화탄소와 수증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자연환경은 신비 투성이다. 어느 것 하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물, 공기, 흙, 동물, 식물 미생물들이 모두 서로서로 도우며 존재하게 되어 있다.

생태계는 서로서로 돕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또한 엄격한 질서와 균형이 있다. 우리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듯이 자연도 서로 도와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엄연한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에너지법칙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생태계를 지탱하는 에너지는 다 태양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에너지가 생물체 내를 한번씩 이동할 때마다 반드시 일정한 분량은 열이 되어서 없어지고 일정한 분량만이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래서 먹이단계에 따라서 생물들이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딱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 생물계를 보면 식물이라는 것은 지구 전체에 내려 쪼이는 태양에너지의 약 0.2%만을 광합성해 놓는다. 그리고 식물을 먹고사는 소비자 즉 일차 소비자는 식물이 합성해 놓은 에너지의 약 10% 정도만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에 오는 태양에너지의 0.2%의 10%이다. 그후 이차 소비자는 일차 소비자가 합성해 놓은 에너지의 약 10%를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생물들마다 그 먹이단계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딱 정해져 있다. 이것을 에너지 피라밋이라고 한다. 보통 스케일로 하면 피라밋이 안되지만 로그(log)스케일로 하면 피라밋이 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땅 만평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땅 만평에 알팔파 풀을 심으면 천만 포기가 난다. 거기에 소를 키우면 소 네마리와 송아지 한마리가 클 수 있다. 그 보다 더 많이 키우면 소가 풀을 너무 많이 뜯어서 풀밭이 사막이 되고 결국에는 소도 굶어 죽게 된다. 그 소가 생산하는 고기나 우유로 사람이 살 수가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의 양은 한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먹이단계에 따라서 생물들이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이와 같이 자연환경은 그 조화와 질서가 오묘하기 그지없다. 비록 우리가 과학으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그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 보면, “아담아 내가 좋은 환경을 만들어 놓았으니 너는 마음대로 놀고 마음대로 먹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동산을 지키고 가꾸어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 환경 자체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을 지키고 가꾸라고 명령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연환경을 지키고 가꾸어야 할 이유는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태계 내에서 영양물질이 순환한다고 했는데 이는 반드시 영양물질 뿐만이 아니라 중금속이나 농약 같은 독성물질도 아울러 순환하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오염물질을 아무데나 버려서는 안된다. 옛날에 우리가 많이 사용했던 DDT를 예로 들어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에 클리어 레이크라는 호수에서 그 호수의 모기를 죽이느라고 DDT를 뿌린 적이 있다. DDT가 모기를 죽이는 데는 특효약이었다. 기록을 보면 1949년에 0.014ppm을 뿌렸다고 되어 있다. ppm이란 parts per million이라고 해서, 무게로 따져서 백만분의 일이 1ppm이다.

그래서 0.014ppm이라고 하면 일억분의 일 정도 되는 것이다. 즉 물 1억통에 DDT 1통을 넣은 셈이다. 그러니까 모기가 잘 죽었다. 그런데 한 5년이 되니까 모기가 또 생겼다. 그래서 1954년에 0.02ppm을 뿌렸다. 그리고 3년 지나서 1957년에 또 0.02ppm을 뿌렸다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세번을 뿌렸는데 세번째 뿌리고 나니까 큰 일이 생겼다. 그 호수 주변에 살던 농병아리들이 떼죽음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이유를 조사해 보니까 DDT 때문이었다. 그러면 DDT가 어떻게 농병아리를 죽게 했는가? DDT같은 물질은 분해가 안 될 뿐만 아니라 물에 잘 녹지 않고 지방에 축적된다.

그래서 호수에 뿌린 DDT가 식물 플랑크톤에 붙게 되면 그것을 동물 플랑크톤이 먹는다. 다른 물질들은 몸에 들어왔다가도 빠져나가는데, DDT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몸 안에 자꾸 축적이 된다. 이렇게 축적된 플랑크톤을 물고기들이 먹고 또 그것을 새들이 잡아먹은 것이다. 그래서 0.01 내지 0.02ppm 뿌린 DDT가 새 몸에는 거의 100,000배가 축적이 되어서 평균 1,600ppm이 나왔다. 그래서 결국 새들이 죽은 것이다.

이 DDT를 북극이나 남극에는 뿌린 일이 없다. 그런데도 먹이의 순환법칙을 타고 그것이 온 지구에 확산이 되어서 지금은 에스키모인들, 남극의 펭귄의 새알 등 어디 한군데 안 나오는 곳이 없다. DDT는 분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도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DDT를 실험해본 결과 그것이 발암물질이라는 것이다.

쥐를 가지고 실험을 많이 해 보았는데, 다른 암도 많이 걸리지만 간암이 제일 많이 나타난다. 우리 몸에도 혈액 검사를 하면 DDT가 나오는데, 평균 통계적으로 보면 암환자들에게는 정상인 보다 2.5배가 더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DDT는 칼슘대사를 방해한다. 그래서 많은 새들이 DDT로 인하여 껍질이 없는 알을 낳게 되고 결과적을 알을 부화시키지 못해 멸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미나마타병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병이 어떻게 생겼는고 하면, 비료공장의 폐수 중에 수은이 조금씩 나갔는데, 그것이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넓은 태평양에서 희석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다로 나가서는 플랑크톤에 흡착이 되고, 그 플랑크톤을 조개가 먹고 물고기가 먹었다. 그 조개와 물고기를 다시 사람이 자꾸 먹으니까 수은이 축적되어서 생긴 병이 바로 미나마타병이다. 일본에서는 또 이타이이타이 병이라는 것도 발생했다. 농업용수에 카드뮴이라는 중금속을 조금씩 내어 보냈는데 이것이 쌀에 축적되고 그 쌀을 계속 먹은 농민들의 몸에 카드뮴이 축적되어서 일어난 병이 바로 이타이이타이 병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금속이나 유독성 화학물질들을 함부로 아무데나 버려서는 안된다.

둘째로 우리가 환경을 보살펴야 하는 이유는 먹이연쇄에서 먹이단계의 하급생물들이 상급생물들보다 환경오염에 더 약하다는 데에 있다. 생태계에는 균형이 있다고 밝힌 바와 같이 먹이단계의 하급생물이 피해를 입으면 상급생물은 직접적인 피해가 없더라도 에너지 피라밋의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간접적인 피해를 입으면 상급생물은 직접적인 피해가 없더라도 에너지 피라밋의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간접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찮게 보이는 생물들일지라도 차츰 멸종되어 갈 수록 생태계의 안전성은 더욱 위협받게 된다. 왜냐하면 생물들은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므로 한 생물의 멸종은 곧 바로 다른 생물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을 둘러보더라도 생물종이 다양한 생태계는 건강하게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생물종이 단순한 생태계는 쉽게 그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계는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결국은 인간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공기 좋은 시골이나 산에 가면 바위나 나무둥치에 낀 바위 옷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시골뿐만이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지붕의 기와에는 다 이런 것이 끼어 있었다. 바위 옷은 딱딱하고 파랗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이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지금은 서울이나 부산뿐만 아니라 작은 도시에 가더라도 전혀 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공기가 나빠서 다 죽은 것이다. 이끼도 마찬가지이다. 이삼십년 전만해도 집집마다 물가나 수도물가나 마당에는 이끼가 두툼하게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 이끼도 공기가 나빠서 다 죽었다. 유럽과 북미에서 산성비로 인하여 많은 산림이 파괴되었으나 그 비를 맞고 직접 죽었다는 동물은 아직 없다. 서울에서도 비원 같은 고궁에서는 지난 5,6년간 나무종류의 거의 절반이 멸종한 것으로 조사가 되고 있는데 그 원인도 산성비일 것으로 짐작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생태계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식물들 뿐 아니라 동물들도 사람보다 환경오염에 약하기는 거의 마찬가지이다. 염소 소독한 수돗물을 사람들은 끄떡없이 잘 마시고 살지만 그 물 속에 지렁이나 물고기를 넣으면 다들 푸드덕거리며 죽어간다. 노름하는 사람들을 보면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노름하면서 밤새도록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아침에 보면 그 방에 둔 새들은 전부 기절해서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을 따느라고 다들 정신이 말똥말똥한 채로 끄떡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오염 피해가 있었다고 잘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환경이 파괴되어 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심하게 오염시킨 환경으로 인하여 다른 피조물들도 같이 탄식하며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의 사람들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쁜 공기로 인하여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고 나쁜 물과 음식으로 인하여 설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받는다. 거저 감기나 앓고 설사를 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난 10애년간의 서울사람들의 사망 통계를 살펴보면 해마다 어김없이 12월과 1월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는다. 이 12월과 1월이 언젠고 하면 공기가 가장 나쁜 계절이다. 이 때 아마 사람들은 추워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워서 죽는 사람이 있다면 공기가 나빠서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정도이면 다른 피조물들은 얼마나 큰 피해를 받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세심하게 환경오염을 감시하고 사랑으로 동식물을 보살피지 않으면 이 생태계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파괴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사람도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세째, 생태계를 지탱하는 영양소는 우리가 식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쉽게 유실되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가꾸고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생태계를 지탱하는 영양물질도 하나의 자원으로서 이것을 잘 보관하고 생태계에 순환시켜야 한다. 영양소는 생물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순환하는 과정에서 한번씩 흙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식생을 잘못하면 그 영양소가 금방 씻겨 내려가게 되고, 그래서 그것이 바다로 한번 들어가서 밑바닥에 가라 않으면 우리가 회수하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잘 유실되는 지를 보여주는 예는 무수히 많다.

요즈음 브라질은 아마존강 주변의 정글을 개발하려 하고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논쟁이 일고 있다. 그 논쟁이 발단은 이렇다. 아마존 정글에는 나무가 참으로 무성하다. 그래서 브라질 사람들은 그 무성한 땅의 나무를 베어 내거나 태워서 거기다가 농사를 지으려 한다. 그러나 실은 브라질이나 열대 지방에 가면 영양소 순환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나무가 영양을 다 가지고 있지 땅에는 영양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베어내면 이 땅에는 비가 와서 영양이 씻겨 내려가고 땅을 개간하면 4,5년만에 당은 시뻘건 황무지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한번 개간해서 4,5년 사용하다가는 그 곳을 버리고 더 멀리 들어가고 하면서 정글을 훼손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태국, 필리핀 등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울창한 밀림에서 나무를 몽땅 베내어 파고는 나무가 또 자라기를 기다렸다. 또 베어 팔기 위해서,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나무란 것은 땅이 있고 비오고 햇빛만 쬐이면 저절로 자라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나무를 남벌한 땅에서 나무가 다시 자라기는 커녕 남아있던 나무들 마져도 사태로 다 씻겨가고 나무가 없으니 땅에 남아 있던 영양이 또한 다 씻겨가서 황무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무를 베어낸지 수십 년을 기다려도 나무가 다시 나기는커녕 이제는 인공적으로 심어도 자라지 못하는 시뻘건 벽돌 땅이 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산림이 울창한 나라였다. “나무가 많아서 홍수도 가뭄도 없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일본이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산림을 수탈해 갔고 그리고 6·25 동란을 겪으면서 남은 나무들을 불살라 버려 대부분을 민둥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우리 나라는 민둥산에 재식목을 해서 성공을 거둔 편인데, 이렇게 재식목에 성공한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들다.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재식목에 성공을 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다시는 예전같이 훌륭한 산림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번 땅을 민둥산으로 만든 다음에는 회복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흙이 영양소의 은행 구실을 한다지만 흙에서 생물에 필요한 영양소를 보관하고 있는 곳은 단지 표토층의 수십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데 이 표토층을 나지로 노출시켜 놓으면 빗물에 금방 유실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골프장 건설문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지구상에서 풀밭이 생태학적으로 자연스럽게 유지가 되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 한 곳은 북극의 툰드라 지방 같이 추워서 땅 밑바닥이 항상 얼어 있는 곳으로 이 곳에서는 아무리 비가와도 땅 밑이 얼어 있기 때문에 영양이 도망갈 곳이 없고 풀밭이 그대로 유지가 된다. 그리고 또 한 군데는 비가 아주 조금씩 오는 지역으로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역시 영양이 도망을 못 가고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자라나는 풀이 도로 흡수할 수 있는 지역이다. 미국의 중서부나 호주의 목초지가 이런 곳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같이 여름에 뜨겁고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는 대규모의 초지는 절대로 자연적으로 유지가 되지 않는다.

생태학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만들기 때문에 골프장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소모된다. 골프장의 잔디는 뿌리가 얕아서 영양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비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비료만 치고 가만 두면 영양을 균형있게 섭취를 못한 잔디가 병충해로 다 죽기 때문에 또 농약을 뿌려야 한다. 이런 수고를 해도 그 땅은 결국은 메말라 버린다. 이 지구상에는 생태학적으로 맞지 않는 곳에 억지로 초지를 만들었다가는 황무지를 만들어 버린 예가 수없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법칙을 어겨 가면서 까지 억지로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네째로는 우리가 쓸 수 있는 자원이란 것이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원을 아껴야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헤픈지 쓰레기 배출량이 세계 1위이다. 서울 사람 한 사람이 하루에 버리는 쓰레기가 2.8㎏이다. 미국은 1.5㎏이고, 유럽이나 일본 사람은 1㎏ 정도이다. 지금 세계인구가 약 50억인데 이 인구가 다음 세기의 중엽 이후에는 100억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면 인류가 지금과 꼭같은 수준의 생활을 한다해도 자원이 꼭 두배가 더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인류는 끊임없이 잘 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그때 쯤이면 지구의 경제규모가 대충 열배 쯤은 더 커지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에 지구의 경제규모가 50배 커진 것을 생각하면 그 때 열배 커진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경제 규모가 열배 커진다는 말은 만약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산다면 자원이 열배 더 필요하다는 말과 꼭 같다. 지금보다 열배나 더 공급할 만한 자원이 이 지구상에 있는가 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없다.

석유는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매장량으로는 지금처럼 쓰면 앞으로 한 50년 더 쓸 것이 있고 석탄은 한 200년 더 쓸 것이 있다. 이를 열배 더 빨리 소모한다면 얼마나 더 쓸 수 있는 지는 너무나 뻔하다. 석유와 석탄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원이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 동안 무한한 줄로 알고 “물 쓰듯이 쓴다”고 한 그 물도 자원이 한정되어 지금은 물이 없어서 공장도 가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물뿐만이 아니고 흙이며 돌까지도 자원이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한 자원이 없어질 때 대체자원을 개발하면 자원문제가 해결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모든 대체자원이라는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자원을 함부로 낭비하게 될 때 자원의 고갈뿐만이 아니라 자원의 남용으로 인한 환경오염문제도 또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한복음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셔서 사람들을 먹이신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 주님이야 기적만 베풀면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지만, 그래도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이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원을 절약하는 삶의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다.

환경을 안 지키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

우리는 외국의 교훈을 비워야 한다. 애굽은 과거에 땅이 하도 비옥해서 “유럽의 곡창”이라고 했고, 그래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반드시 애굽을 손에 넣으려 했다. 이스라엘 자손도 그 비옥한 애굽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었다. 성경에도 보면 좋은 땅을 가리켜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의 땅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애굽 땅은 완전한 사막이 되어 있다. 스핑크스니 피라밋이니 모든 것이 사막 한 가운데에 있다. 지금 애굽은 “유럽의 곡창”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게도 도리어 유럽에서 곡식을 수입해서 먹고 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도 과거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될 정도로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 이 지역에 실제로 야생꿀이 많았다는 것은 삼손에 관한 기록에서나,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 들판에서 야생꿀을 실컷 먹었다는 기록에서, 세례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 즉 야생꿀을 실컷 먹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야생꿀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아메리카 대륙이나 뉴질랜드 같이 삼림이 아주 잘 보존된 지역뿐이다. 이 지역에 삼림이 무성했다는 것은 다윗의 시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하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의 산 골짜기는 죽음처럼 캄캄한 그늘이 질 정도로 나무가 무성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이를 풀지 못하고 잡혀서 죽은 기록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어부들이 많았는데, 당시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노릇해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그 호수가 맑고 풍성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땅은 풀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인공적으로 심지 않으면 없을 정도이고 요즘 갈릴리에서 어부하라는 것을 굶어죽으라는 말과 같이 들릴 정도로 이 땅은 완전히 황폐한 땅이 되어 있다.

중국이나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옛날 문명시대에 인도에서 그린 그림에는 울창한 숲과 예쁜 꽃이 만발한 그림이 있지만, 그 그림이 발견되는 지역이 지금은 시뻘건 민둥 땅이다. 중국도 처음 문명을 일으킨 곳이 지금은 완전한 사막으로 남아 있다. 실크로드라는 텔레비젼 프로를 보았으면 알겠지만 그 곳은 완전한 사막이다. 고대 사람들이 사막에다 일부러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문명을 일으키고 살다보니 자연적으로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실크로드나 황하의 상류가 지금은 모두 사막이 되어 있다. 이 외에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들은 예외없이 모두가 비옥하던 땅들이 지금은 모두가 사막이 되어 있다. 이 예들이 우리가 당의 단물만 빨아먹고 땅을 돌보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대문명국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일, 이백년 동안에 망한 나라들도 많이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백년 전만 해도 울창한 밀림이었으나 나무를 그냥 두어서는 돈도 안 생기고 먹을 것도 안 생긴다고 생각하여 나무를 다 베어 없애고 돈 벌 궁리를 하였다. 그래서 백년 전만 해도 타잔이 줄 타고 다닐 정도로 울창하던 밀림이 지금은 대부분 민둥땅이 되어 버렸다. 민둥땅을 만들고나자 이제는 비도 내리지 않고 땅이 메말라 해마다 수많은 인구가 굶어 죽거나 먹을 것을 찾아 국경을 이동하고 있다. 이디오피아, 버키나, 세네갈, 니제르, 챠드, 수단, 말리 등이 그런 나라들이다. 고대 문명국들이 망하는 데 몇 천년이 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나라들이 망하는 데 일, 이백년이 걸렸다지만 요즘의 환경오염이라는 것은 몇 천이 몇 백이 아니라 그저 몇 십년, 아니 몇 년이면 끝을 낸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땅을 지키고 가꾸라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제일 처음으로 분부하신 말씀 중에서 창세기 1:28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구절이 종종 환경오염을 정당화시키는 구절인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어에서 ‘충만하라’는 것은 채우라, 충족시키라, 영어로는 fulfill시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땅이 어떤 법칙대로 움직이는 지를 알아서 순리대로 그 욕구를 채워 주라는 뜻이다. 또 ‘정복하라’는 것은 히브리 원어에서 가꾸라, 영어로는 culture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풍성한 땅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헐벗고 굶주리고 하지 말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잘 가꾸라는 뜻이다. 그리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다 잡아먹는 것이 다스리는 것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이 아니다.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땅을 지키고 가꾸고 생물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그간 악한 청지기 노릇으로 일관해 왔고 그 결과로 자멸의 길에 들어서 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핵무기는 인류를 수십번 죽일 수 있을 정도이다.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인류는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종말을 볼 수밖에 없다. 성층권의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어 지난 10여년 동안에 남극 상공에서는 절반이, 칠레 상공에서는 4분의 1이, 북극 상공에서도 오존층에 구멍이 뚫릴 가능성이 커져가고 있으며 북반구에서도 평균 3% 정도 얇아졌다. 그 이유는 냉장고나 에어컨에 냉매로 쓰이고 분무약품에 분무추진제로 쓰이는 염화불화탄소들이 오존층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석유와 석탄을 때면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공기 중에서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어서 지구의 기후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18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기 중에 280ppm 정도 있던 이산화탄소가 지금은 350ppm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석탄과 석유를 다 때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지금보다 다섯 배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면 지구의 기온은 적어도 평균 10도는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빙하는 다 녹고 해수면이 60m는 올라가게 되어 세계 대부분의 농경지와 주거지는 바다에 잠기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온 변화에 무엇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에너지 소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산성비로 인하여 북유럽과 북미지역의 삼림과 호수가 많이 죽어 갔는데 그 위세는 더욱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그리고 사막의 면적은 해마다 놀랄만한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일년이면 남한 만한 면적의 땅이, 30년이면 인도 대륙만한 땅이 울창한 삼림에서 완전한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슬프게도 전 육지의 거의 3분의 1이 사막으로 화해 있고 그 사막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동식물들은 놀라운 속도로 멸종이 되어 가고 있어 생태계가 그 안전성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대로 가면 지구는 종말을 볼 수밖에 없다. 이사야 24:3~5은 인류가 범죄하면 땅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구의 종말이 오히려 소망의 근거가 되는데, 이는 성경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65:17~18에는 "보라 내가 새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으로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라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누가 살 수 있는가? 누가복음 16장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악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 16:10~12)

주님은 천국을 남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누구든지 침노하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우리의 것이라고 하셨다. 비록 우리의 것이라도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는 자에게는 우리의 것인들 어찌 우리에게 맡기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 주님의 비유를 보면 우리가 잠깐 이 세상 사는 것을,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잠깐 동안 종에게 살림을 맡긴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풍성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잠깐동안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그 청지기 사명을 맡은 우리가 온 땅을 더럽고 황무하게 만들었으면 주님이 돌아오실 때 무슨 낯으로 주님 얼굴을 뵈올 것인가?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다 비유하고 있다. 신랑 맞을 준비를 하는 신부가 몸단장을 곱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몸단장만 곱게 했지 온 집안을 오물로 더럽혀 놓으면 신부를 데리러 온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얼마나 그 고민이 크겠는가? 우리 주님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면서 자신을 흠없이 가꾸는 일이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만 했지 이 땅을 온갖 오물로 더럽혀 놓으면 신랑되신 우리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 우리를 데려가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얼마나 그 고민이 클 것인가? 만약에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맡기셨는데 우리가 거기에다가 다시 핵무기를 만들어 쌓아 놓고 온 하늘과 땅을 오염시켜 놓는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땅이 인간의 욕심과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들밖에 할 수가 없다. 그 작은 일들이 이 땅과 인류를 살리는 데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지극히 작은 일들을 크게 봐 주시고 크신 일을 맡기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아껴 쓸 수 있는 분량을 남겨 두고 환경오염을 적게 시켜야 한다. 가능한 한 모든 자원을 재활용하고 음식 찌꺼기는 퇴비를 만들든지 하여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오존층을 파괴하는 냉매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분무약품의 사용도 삼가해야 한다. 중금속이 든 건전지든지 농약같은 화학약품을 함부로 버려서도 안된다. 뿐만 아니라 불법적으로 이러한 오염물질들이 버려지는 것을 볼 때 고발하는 수고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것들을 사용하거나 싱크대에 버리는 것도 절제해야 한다. 환경오염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살피고 멸종되어가는 동식물들도 보살펴야 한다. 특히 식생을 잘 돌보고 가꾸며 흙이 척박해 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그리하여 각자가 살고 있는 지역을 가꾸며 나라의 환경이 바로 바로 가꾸어지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런 일을 할뿐만 아니라 이웃도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설득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이 일이 지극히 작은 일이나 그러나 이 지극히 작은 일에 우리가 충성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고 칭찬을 듣고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맡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