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환연 15주년기념 심포지엄 발제2

사회적 차원에서의 환경위기대처방안
김정욱 교수 (공동대표, 서울대 환경대학원)

1. 환경위기의 진단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아레니우스라는 유명한 화학자가 앞으로 석탄을 계속 때면 이산화탄소가 늘고 지구의 기온이 오르게 되어 지구에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경고는 오랫동안 철저히 무시당했었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막 발달하고 있는 과학기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때여서 앞으로는 과학기술이 인류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구와 인류의 앞날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전쟁문제는 사람들의 의식을 교육하면 해결되고 식량이나 질병이나 기타 인간의 모든 수고는 과학기술이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쯤이면 지구가 낙원이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구는 어떤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부분적으로 희망적인 징조가 보이기도 한다. 문맹율이 떨어지고 유아 사망율이 떨어지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식량증산이 인구증가율을 앞지르고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절망적인 징조가 압도적이다. 교육수준이 높아져도 전쟁의 위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 2차대전시에 일본과 독일이 저지른 잔학성, 지금에 이르러서도 르완다, 소말리아, 옛 유고연방, LA 폭동, 체첸 등에서 보는 인간의 잔학한 모습은 교육이 인간성을 전혀 개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지구를 여러번 폭파시키고 전 인류를 수십번 죽이고도 남을 핵무기는 과학기술문명이 전쟁의 위험을 오히려 극도로 고조시켰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환경성 질환으로 알려진 암과 같은 질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장애아로 태어나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식량생산이 인구증가율을 앞질렀다지만 그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선진국에서나 식량이 남아돌 뿐이고 후진국에서 굶주리는 인구는 오히려 해가 갈수록 증가해 왔다. 그리고 농경지는 갈수록 척박해지고 연안의 생산성도 떨어지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나라들이 부유해졌다지만 그럴수록 국가간 빈부의 격차도 더욱 커졌다. 뿐만 아니라 많은 가난한 나라들은 더욱 더 가난해져가고 있으며 환경마저 극도로 피폐해져서 다시 일어설 기력마저 잃고 있다.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기술이 발달하고 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켰지만 여전히 일년에 수천만명의 인구가 가뭄과 홍수로 인하여 피해를 입고 있고 그 피해인구는 해가 갈수록 급속히 늘어만 간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하고 산업화가 진척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이 단지 어떤 운 없는 지역에서 운 없는 사람들에게만 불행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와 인류의 앞날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다. 인류가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을 누리도록 뒷받침하고 있는 세계경제구조는 자원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공급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환경문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금 인류는 경제가 마치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끊임없이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원은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재생이 불가능한 에너지나 광물은 언젠가는 그 바닥이 날 수밖에 없고, 삼림이나 흙이나 강이나 바다 등은 재생은 가능하나 생산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무한정 뒷받침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경제활동으로부터 발생하는 환경파괴도 지구는 감당할 수 없다.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사막화, 생물들의 멸종, 확산되는 환경오염 등이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현상들이다. 인간이 자신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면서 에너지와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환경파괴를 당연시한다면 이런 문명은 언젠가는 에너지와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황폐화되어 파탄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지구가 커지지 않는데 지구의 경제가 계속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지구 생태계에서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커는 것은 암 밖에 없다. 지금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을 다 착취하면서 인간만 살찌우고 있는데 이는 마치 암이 신체의 모든 다른 조직들을 말리면서 자신만 크는 것과 흡사하다. 암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래서 앞으로 인류는 새로운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류의 앞날을 위협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원칙도 명확해 진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석유, 석탄, 원자력과 같은 에너지가 부족하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있는 에너지는 물론 아껴 써야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 재생가능한 에너지라면 태양, 풍력, 조력, 생체, 수소 등의 에너지를 말한다. 둘째, 에너지 이외의 다른 부족한 자원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있는 자원은 물론 아껴 써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원을 재활용해야 한다. 셋째, 지금과 같은 환경파괴와 오염행위를 이 지구가 지탱할 수 없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경파괴나 오염행위를 절대로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에너지와 자원을 아끼고 환경오염을 줄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다. 환경오염 자체가 주로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또 환경오염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에너지와 자원을 가장 낭비 없이 사용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2. 현 사회 체제의 문제점과 새로운 대안의 모색

이와 같은 환경문제는 결국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목표가 바로 잡아지지 않고 올바른 정책을 추구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해결할 수가 없다. 그 중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적 효율성을 기준으로 하는 가치관이 바뀌어져야만 한다. 화폐가치로 환산한 경제성은 사물을 크게 왜곡할 수가 있다. 돈 가진 사람과 사업시행주들이 경제성을 평가하기 때문에 대체로 이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경제성을 왜곡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환경오염으로 병들거나 죽고 난 뒤에 보상비 받는 것보다는 병 안들고 안 죽고 보상비 안 받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 정도의 보상비를 내는 것만으로 이익이 생기는 사업이면 경제성이 있는 사업으로 인정되어 추진된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서, 이자개념을 도입한 경제성 평가 자체가 미래 세대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이자율로 경제성을 계산하면 수백년 후에 지구가 망해도 하나도 돈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공해가 심하기로 이름난 원진 레이온 공장은 원래 일본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이 공장이 이황화탄소라는 유독가스로 인하여 많은 종업원과 인근 주민들을 환자로 만들고 또 죽이다가 일본에서 사람 값이 비싸지자 수지타산을 맞출 수가 없어서 공장을 우리나라로 옮겼다. 이 공장은 그 후 우리나라에서 또 많은 사람을 다치다가 우리나라 사람 값이 비싸져서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사람 값이 싼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다. 이 공장은 중국 사람을 한참 다치다가 중국 사람 값이 비싸지면 아마 다시 몽골이나 베트남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이런 논리로 공해산업들은 계속 후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우리나라나 대만의 환경문제가 그들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심각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러나 우리나라나 대만 사람들은 또 중국이나 인도 같이 우리보다 더 늦게 개발하는 나라들의 환경을 보고 또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심각한 환경문제를 보고 깜짝 놀란다. 선진국들을 둘러보면 인류가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착각하기가 십상이지만 후진국들을 둘러보면 인류는 전혀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농사를 지어 땅과 생물과 사람의 건강에 피해를 입히는 화학농법, 놓아먹일 땅도 없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고 수입사료와 성장 호르몬과 항생제로 기르는 축산, 시화호와 같이 호수를 썩게 만들고 연안생태계를 망치는 간척사업, 수많은 사람이 마시는 낙동강 물에 썩은 냄새가 나도록 상류에 들어서는 공장들, 이 모든 일들이 다 옳고 그른 것보다는 경제적인 효율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이런 가치관의 전형을 다음의 예에서 볼 수가 있다. 1991에 World Bank의 수석 경제학자인 Lawrence Summers 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메모를 동료들에게 돌린 적이 있다. 첫째, 환경오염에 의한 인체 피해비용은 개인의 소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가장 인건비가 싼 나라에서 환경오염행위가 이루어 져야 한다. 둘째, 오염이 적은 후진국에서는 오염배출을 증가시켜도 오염의 피해가 이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고 피해가 작다. 이들 나라들은 과소오염(under-polluted)되어 있기 때문에 좀 더 오염시켜도 괜찮다. 셋째, 평균수명이 긴 선진국에서는 장기간의 노출 후에 노년기에나 나타나는 전립선 암과 같은 질병을 일으키는 환경오염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지만 평균수명이 짧은 후진국에서는 이에 대한 관심이 적다. 그래서 환경오염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수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람의 결론이었다. 이것은 은밀하게 쪽지로 돌린 내용이 공개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은밀한 생각들이 실제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서 어려운 환경문제는 계속 후진국으로 수출되고 있고 또 미래세대로 떠 넘겨지고 있다.

이런 경제논리로 이 사회가 움직인다면 머지 않아 나라가 망하고 지구가 망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경제적인 논리가 아니라 먼저 환경적인 논리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지어야 한다.

둘째, 지금 세금제도에 큰 문제가 있다. 지금은 소득세다 법인세다 해서 열심히 일을 하면 세금을 많이 매기는 반면에 땅을 소유한다든지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쓴다든지 환경을 오염시킨다든지 하는데 대해서는 세금을 적게 매기거나 아예 세금이 없다. 그래서 지금 세금제도는 열심히 일하는 것을 억제하고 일 안하는 것을 장려하며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오염을 많이 시키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고 일 안하고 토지 투기를 하거나 자원을 많이 팔거나 오염을 많이 시켜야 돈을 벌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경제적인 이득을 얻고자 마당에 이런 세금제도로는 결국 자원의 낭비와 환경오염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한대로 사람들이 이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잠간 동안 지키고 가꾸도록 위임받은 것이라면, 혹은 아프리카의 속담대로 이 땅을 후손으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라면 빌려 쓰는데 대한 사용료, 혹은 세금을 내야 한다. 즉, 토지와 자원과 환경에 대해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데 대해서는 세금을 매기기 보다 장려를 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인건비가 비싸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에 세금을 매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인건비는 금방 줄어든다. 인건비 증가율이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앞지른다고 걱정하는 의견도 많은데 그것은 사실은 인건비가 그렇게 증가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동산 비용이 그렇게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금은 토지세, 자원세, 환경세만 충분히 매기면 족하다. 그렇게 하면 토지 투기가 없어지고 자원이 절약될 것이며 재활용이 촉진되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 의욕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와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도록 유도될 것이고 탈세의 염려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땅이 어디에 있고 자원이 얼마나 채취되거나 수입되며 환경오염물질이 얼마나 배출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환경오염이나 파괴 행위도 억제될 것이다.

셋째, 예산 배정의 우선 순위가 바로 잡아져야 한다. 지금 세계 각국은 전쟁 준비하고 무기 개발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쏟고 있다.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고 넉넉한 보수를 받고 존경받으면서 품위있는 생활을 누리는 반면에, 쓰레기 처리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럽고 냄새나고 건강상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적은 월급으로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 핵무기를 만드는데에는 가장 우수한 두뇌들이 모여 온갖 첨단과학을 다 동원하지만 쓰레기 매립장은 어수룩하기 짝이 없고 하수관들은 서로 구멍이 맞지 않아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다. 무기공장에서는 도대체 인류에게 얼마나 유익한 제품을 만들기에 돈을 그렇게 많이 쏟아야 하고 또 많은 두뇌들이 달려들어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그리고 쓰레기 재활용 공장이나 하수처리장은 그렇게까지 엉망이 되도록 내버려 둘 만큼 아무 쓸데없는 일을 하는 곳인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무기를 만드는 것만큼 돈과 정성을 쏟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세계를 둘러보면 총알이나 포탄을 맞아서 죽는 사람은 몇 안된다. UN이 조직한 '세계 환경과 개발 위원회'의 통계에 의하면 매년 6천만명의 인구가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총알을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전쟁 통에 오염된 물을 마시고 병들어 죽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진다면 무엇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가? 전기 끊어지고 수도관 터지고 나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무엇인가? 그 때는 안양천이나 중랑천이나 낙동강 물을 마실 수밖에 없다. 그런 물을 마실 때 우리도 르완다나 소말리아인들처럼 떼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강물을 깨끗하게 해 놓지 않고는 절대 전쟁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강물을 살리는 것은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에 국방비의 1/100만 물에 썼더라도 우리나라는 이렇게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사실은 1/1000도 제대로 썼는지 의문이다.

인류를 죽게하는 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무기 개발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고 환경문제를 무시하면 인류의 장래는 희망이 없다. 무기 개발에 쏟는 돈과 노력과 정성을 환경문제 해결에 쏟으면 환경문제는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넷째, 우리의 지역사회 구조가 환경적으로 맞도록 개조되어야 한다. 소비자 집단인 도시가 지금과 같은 구조와 규모로 커져서는 건전한 생태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와 분해자 사이의 물질순환이 원활히 이루질 수가 없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지탱가능하지가 않다.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도시를 이상형으로 삼아 거미줄처럼 도로를 얽어 자동차로 다니고 에너지와 자원을 무한정 투입하고 쓰레기는 딴 데다 갖다 버리는 그런 도시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하나의 생태학적인 단위가 되어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고 물질의 순환이 건전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정주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금 세계의 모든 곳이 지역적인 특성을 잃고 똑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사람들도 똑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지역의 기후나 지형이나 특산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자들을 수출하고 수입하여 더운 곳은 춥게 추운 곳은 덥게하고 같은 집에 같은 옷에 같은 음식에 같은 취미생활을 하고 같은 물건들을 쓰며 살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자원들은 세계 곳곳에 분주하게 거래가 되어 대량 소비가 촉진된다. 지금 세상에서 물건들은 마음대로 세계 곳곳을 돌아 다니는데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꼭 묶여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이런 지역사회의 모습은 지탱가능하지 못하다. 지역마다 가장 그 지역의 특성에 알맞은 독창적인 지역성을 가지고 지역의 산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기본재를 충당하고 사치재의 수입을 절제하는 지역사회가 지탱가능한 사회에 가깝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역사회들이 환경적으로 지탱가능한 생태학적인 단위를 이루어 왔다고 생각된다. 필요한 에너지는 산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인근 지역으로부터 반입이 가능했고 그리고 도시에서 나오는 재와 분뇨와 기타 쓰레기는 인근 농지에 비료로 쓰거나 가축에게 먹이거나 재활용해서 쓰고 물도 하천이나 지하수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지역사회를 이루었다. 건강한 자연 생태계에서는 재생가능한 에너지가 사용되며 물질은 완전 순환이 이루어 진다. 지역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생태학적인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가장 적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환경오염을 적게 만들며 오염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으로 도시를 구성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당이나 일산 같이 일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서울의 bed town 을 만드는 방법은 환경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환경대책은 우리나라 국토의 전반적인 환경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세워져야 한다. 국토이용계획을 단지 인간의 욕구에 따라서 용도지역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생태학적인 측면에서 국토가 황폐해지지 않고 풍성한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안정될 수 있도록 계획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필요한 강수량을 얻고 적당한 하천용수를 유지하며 바람직한 수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림을 어디에 어느 정도 확보하고 가꾸어야 하는지, 농경지와 초지와 도시지역은 어느 정도까지 개발을 허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확고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산림은 특히 하천의 유량과 수질관리에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이다. 따라서 지금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산지개발이 이런 기본계획 아래서 검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해안의 개발도 무턱대고 간척사업을 벌이고 공단을 조성해서는 안된다. 지금 간척 예정지로 되어 있는 곳들은 대개가 만으로서 물고기의 산란지들인데 이들을 무분별하게 없앨 때 서해의 어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사전에 평가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해양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생태계획이 되어야 한다. 이런 고려가 없이 단지 오염의 피해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상수원 보호구역이나 생태보호구역 혹은 산림보호구역으로 묶여야 할 지역들이 개발되기 시작하면 국토가 전체적으로 볼 때 환경적으로 균형을 잃을 염려가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는 국토의 전체적인 환경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환경대책을 세워야 한다.

3. 교회의 역할

인류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인류의 앞날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그 흐름이 너무나 도도하고 거세기 때문에 이 세대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듯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물결 따라 흐르지만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산 믿음을 가진 교회는 세상 풍습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세상에 소망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잘못한다고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 본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을 실천하고 새로운 지역사회를 가꾸어 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세상이 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교회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그린벨트 같은데 땅 사다 놓고 규제가 풀리고 땅 값 오르기를 기다린다든지, 교회 헌금 수입으로 성공여부를 따진다든지 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다 헛일이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땅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시민들에게 녹지로 내 놓는다든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생태계를 구입해서 자연에 돌려준다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자없는 은행을 운영한다든지하여 세상의 경제적인 논리를 뛰어 넘는 그런 가치관을 교회가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세상이 할 수 없는 참신한 방법으로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돈과 정성을 쏟는 곳도 세상 풍습과는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는 돈이 벌리는 곳에 그리고 사람과 생물을 죽이는 데에 온갖 돈과 정성을 다 쏟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선교사업에 돈을 썼다고 자랑하지만 실은 자기 교회에 성도들을 끌어 모아 자기 교회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는 교회가 많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자꾸 긁어모아 자기 사업 확장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교회 건물 짓는데 돈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데 그래서 결국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 건물 뿐이고 기독교 정신은 부패한 사회에 파묻혀서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는 유익하지만 수익이 없는 그런 사업에도 열심히 투자를 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돈도 아니고 자기과시도 아니고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교회는 돈이고 재산이고 사랑을 모아두는 곳이 아니고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부동산 투기로 번 돈을 하나님의 축복인양 즐거워 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가만 앉아서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는 세상에 대해서 세금제도를 공평하게 하라고 큰 소리를 칠 수가 없다. 그리고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돈을 올바로 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부터가 헌금을 바로 써야 한다. 성경이 십일조를 말할 때에는 내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거두어 들인 십일조를 어떻게 써서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라는것까지도 다 말하고 있다(신14:28-29). 교인들을 향하여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거두어 들인 십일조를 올바로 쓰지 않는 교회는 도적질하는 교회이다.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로 잡는데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아마도 지역사회를 가꾸어 나가는데 있을 것 같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적어도 매주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교회만큼 지역사회에서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교회는 지역사회가 지탱가능한 사회가 되고 또 지역사회의 주민들의 생활이 또한 지탱가능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올바른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시작되어야 할 운동 중의 하나는 흩어지는 운동이다. 도시가 지금처럼 천만명에 이르는 규모가 되면 이는 근본적으로 지탱가능한 지역사회가 되기에는 너무나 크다. 성경은 우리더러 항상 흩어지라고 하고 있는데 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떼로 모여서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도시가 어느 정도 작아야만 주위의 농촌과 어우러져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고 순환형의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도시 자체는 근본적으로 지탱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에너지와 자원과 식량 등을 공급 받아야 하고 또 폐기물을 내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할 수 있고 또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넓은 생산지를 끼고 있어야 생태학적으로 안정될 수가 있다. 따라서 도시의 지역사회는 생산지인 농촌과 협동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사회라 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이 따로 독립적으로 지역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서로 연계하여 생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맺어져서 생산과 소비를 이어주고 순환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할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서로 유대관계가 맺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다 올바른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 자체도 지역사회 안에서 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재활용센터를 운영한다든지, 환경상품을 판매한다든지, 환경시설을 정직하게 운영하여 지역에 봉사한다든지, 환경교육을 한다든지, 그 밖에 교인들의 생활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활동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벌이는 이런 활동을 꼭 교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여 기독인들이 땅의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겠다.

4. 맺는 말

지금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이 큰 착각들을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일하면 할 일을 다 한 줄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바깥 세상을 향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을 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막 16:15, 롬 8:21, 골 1:23). 이 땅이 오염되고 그 안에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천만이나 되는 기독인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참다운 기독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들에게 진정 기쁜 소식은 인간의 죄악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해 주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