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우리가 물질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삶을 살려면 경건한 신앙생활을 해야한다. 경건성의 상실은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이며, 현대사회의 물질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건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경건은 모든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경건의 삶은 믿음에서 잉태되어 일상생활로 나타난다. 즉 경건은 이웃을 우리와 함께 사는 존재로 이해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은 우리에게도 분명히 좋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손상되고 파괴되면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기 좋게 회복하여야 마땅하다. 이것은 결코 소극적인 금욕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경건은 적극적인 삶의 결과로 나타난다. 경건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얻는다. 그래서 바울은 경건을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갖는 태도이며 참된 경건은 인간을 둘러싼 악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악의 뿌리가 되는 ' 돈'을 사랑하는 것이나 돈의 노예가 되는 것, 또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것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로서 창세기 1:26∼28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다면, 자신을 구원하며 사회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경건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경건의 덕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모양만의 의례가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고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웃과 자연을 회복하여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① 안식일을 성수하자.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 우선 안식일(원래는 토요일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뜻한다)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성도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엿새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9)고 하셨다. 쉬며 노는 것을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이라고 한다. 이 영어 단어를 분석하면 일을 하고 난 뒤에 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재창조'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식은 재창조이다.

일반적으로 안식일이라고 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만을 생각하게 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인간의 근원을 다시금 확인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육신이 휴식을 통하여 일하는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날이고 더 나아가서는 온 피조세계가 재창조되는 날이다.

창세기 2:2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시던 일을 다함으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피곤하실 분이 아닌데도 쉬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안식의 모범을 보이시고 인간과 자연에게 안식을 가르쳐주시고 안식을 통해서 재창조의 법칙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출애굽기 20:10에 보면 인간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쉬게 하라고 하신다. 또 레위기 25:5에 보면 제7년째 되는 해는 땅의 안식년이므로 스스로 난 곡식을 거두지 말라고 하신다. 이와 같이 안식의 법은 인간만이 아닌 자연도 쉬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배할 뿐만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기 위함인 것이다.

이 날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날이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역사상 이러한 주일을 폐기시키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프랑스 시민혁명 때에는 10일을 한 주간으로 하는 제도를 만듦으로써 주일을 폐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때에는 8일을 한 주간으로 하여 주일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단기간에 끝나고 결국 주일은 부활되었다. 그것은 인간과 이 창조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간섭이었다.

그러므로 한 주간이 아무리 바쁘고 복잡할지라도 이 날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 날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엿새동안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쓸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하루를 온전히 안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나 뿐만 아니라 이웃도 함께 안식을 누림으로 동물과 자연도 안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② 가정예배를 드리자.
사회의 기초단위는 가정이다. 올바른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가정의 안정이 절대적이다. 서로 돕고 사랑함으로써 가정은 존속하며 서로 만나고 대화함으로써 성숙한 가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분주한 삶으로 멀어지고 흩어지고 그리고 만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여러 문명의 이기는 가족간의 간격을 넓히고 생존경쟁은 서로 경원하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 돈이 되는 것이 우선되고 가정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가정공동체는 이혼과 같은 가정의 해체를 낳고 가정의 해체는 비행 청소년을 산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비행 청소년들로 인해 각종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범죄가 발생한다. 인간성이 병들고 도덕이 무너져 내리고 사회가 불안하게 되었다.

오늘의 병든 사회의 치유는 먼저 단란한 가정의 건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진정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정예배가 중요하다. 가정예배는 단순한 예배행위나 종교의식이 아니다. 가정예배는 한 인간이 건전하게 자라며,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물론 진정한 만남과 대화, 그리고 화해와 통일에 기여하게 된다.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통해 경건한 신앙생활을 회복하고 경건의 훈련을 통해 '현대문명-물질주의-환경파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것이 이혼과 청소년문제 등 가정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환경을 살리는 길이다.

③ 자연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는 기도할 때 대부분 인간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한다. 특히 물질문명 속에서 물질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작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나, 이웃을 위한 기도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우리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19:18)신 대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이웃과 자연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극도로 파괴된 자연과 화목하려면 자연을 위한 기도에 힘써야 한다.

성 프란체스코는 동물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상당한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양들에게 기도하며 양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인도하였고 귀뚜라미를 기도에 초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양들을 해치는 늑대에게 애정 어린 감정을 표현하여 늑대를 회개시켰다. 예수님께서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마8:26). 이처럼 기도는 동물과 자연 등 창조세계에 미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마25:40)을 새기며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선한 청지기로서 자신만이 아닌 신음하는 이웃과 자연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