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환연 15주년기념 심포지엄 발제1

자연을 돌보는 인간
- 본문 창세기 2:4∼17 -

                         박봉배 교수 (전 목원대 총장, 기독교윤리학)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위험한 처지에서 그 심각성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인류와 지구가 모두다 파멸되고 말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들이 너무나 무식하게 욕심을 부려 자연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였을 적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좋았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몇번 씩이나 좋다고 하셨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모든 만물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후 인간에게 이를 잘 가꾸고 보살피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28에 있는 말씀만을 강조하여 땅을 정복하는데만 총력을 집중하여 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이름을 사람으로 하여금 짓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기셨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름은 그 사물의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책임지고 관리하게 되였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고 하는 모든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특히 기독교문화권 내에서 과학기술을 발달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놓고 연구하거나 개척하거나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이런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경탄이나 심미의 대상을 넘어서서 공포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화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양의 이런 자연의 신비화의 경향은 자연을 마음놓고 조사하거나 연구하게 하여 이를 개발하고 정복하게 하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양권내에서는 서양보다는 과학문명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서양의 과학기술이 너무 지나치게 자연을 착취하여 생태계의 파괴와 공해문제를 나타내게 되었다. 공장에서 뿜어대는 검은 연기는 하늘을 가리울 뿐 아니라 그 독한 냄새는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있다. 수많은 자동차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다.

언젠가 뉴욕의 하늘이 흐려서 한주 동안 짙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을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흐린 날 서울시내를 한번 돌고 나면 기침이 나고 가래가 새카맣게 나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많이 있을 것이다. 어제 서울 일변에 오존 경보가 났었다. 오존 오염도가 위험수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며칠전 신문에 동경의 주민 가운데 60만명이 천식에 걸려 있는 데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공기 오염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천식 환자 가운데 상당수가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마구 베어버리는 산의 수림은 황폐화되어 버렸고 공장에서 방류하는 폐수는 우리가 마실 물을 독소로 가득 차게 하고 말았다. 이제는 수돗물도 마음놓고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농약으로 가득 차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몸을 병들게 하고 있다. 산성비는 식물에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인체에도 해롭다. 근래에 와서 어린이들이 계속해서 감기에 걸리는 것도 공기 오염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즈음 우리는 절기에 맞지 않는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지구의 공기 오염때문이다. 공기 오염 때문에 지구의 열기가 하늘 위로 발산될 수가 없다. 게다가 공해로 인해 오존층이 구멍이 나서 강력한 자외선이 우리의 피부를 파괴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지구의 온도가 일년에 0.2도씩 올라가서 10년후면 2도, 20년 후면 4도가 오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극과 남극의 빙산이 녹아 내려 가뜩이나 좁은 지구가 더욱 더 좁아져서 폭발적인 인구 팽창과 겹쳐 지구는 사람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이다. 산림의 훼손은 가장 큰 문제로써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큰 도시 근처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의 변형된 모습에서 우리는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와 지구가 모두 다 파멸되는 파국이 초래될 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고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서양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읽고 저지른 자연파괴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창세기 2장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읽어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소위 제사문서라고 하는 P문서와는 달리 예언문서라고 하는 J문서에 속하는 창세기 2:4 이하는 창세기 1장에 있는 자연을 정복하라는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전혀 다르게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를 맡아서 책임있게 보존하도록 위임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생태학적인 질서를 따라 생존하도록 창조하셨다. 즉 아메바를 먹고 사는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또 그것들을 먹고 사는 동물, 그래서 만물들이 균형잡혀 살아가도록 만드셨다. 그런고로 어느 한 식물이나 동물이 전멸하면 그 질서가 깨져서 생태계가 점점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인간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하여 그런 질서가 깨지고 만 것이다. 자기들만이 풍부하고 편리한 생활을 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 두번째의 창조설화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이것을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금령이다. 그런데도 아담과 하와는 더 지혜로워 진다는 유혹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그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야만과 욕심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어긴 후 벌거벗은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여 나뭇잎으로 자기 몸을 감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첫번째 과학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과학기술은 죄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과학기술의 공헌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입장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에 큰 공헌을 하여 현대인간들을 풍요하게 그리고 편리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는 교훈은 그것이 인간의 야망과 욕심에 의해 좌우될 때에는 인간에게 해를 가져온다는 중요한 교훈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두번째 과학기술은 노아의 방주 건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인간의 과학기술이 인류를 구원하는 데 공헌을 하게 된다. 노아의 방주건립이 인류를 홍수에서 구원했다. 즉 과학기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수행될 경우 인간을 구원하는 큰 역사를 결과한다. 그런데 세번째로 성서에 나타나는 인간의 과학기술은 또 다시 인간의 교만과 욕심을 나타낸다. 바벨탑을 쌓아 올라가는 인간은 자기 힘과 지혜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된다. 그 결과는 인류를 얻어 장벽으로 갈라놓는 분열을 결과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자기자신의 야망이나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동은 이렇게 인류와 지구를 파멸로 이끌어 가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연을 맡아서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연과 더불어 같이 사는 방법을 찾아내어 공생공존하는 방법을 실천에 옮겨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이것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양의 철학은 시초부터 인간이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 것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며 심미의 대상이지 정복의 대상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자연 속에 조화하며 살아가야 한다. 동양의 산수화를 보면 인간은 아름다운 산과 수림과 호수 속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자세히 보아야 조그만 배에 타있는 인간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다윗과 마돈나의 그림을 보라. 늠름하고 강력한 다윗의 인간상은 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중심의 표상이며, 비길데 없이 아름다운 마돈나의 모습은 자연의 어떠한 아름다운 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미의 상징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일 뿐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신 자체이다. 다시 말해 지나친 인간중심적인 서양문화가 자연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어 놓고 만 것이다. 동양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오히려 자연을 신성화한 나머지 정령주의에 빠져 자연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런 견지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은 서양의 자연지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의 자연숭배도 아닌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연을 맡아서 잘 돌보는 책임있는 인간이다.

물론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의 현대문명이 인간에게 풍요하고 편리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결과하는 지나친 물질주의와 자연환경의 파괴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서양사람들이 태평양 어느 섬에 상륙하였을 때의 이야기다. 코코넛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토착인을 깨우면서 그 서양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어서 일어나서 열심히 일을 하시오. 그래서 돈을 많이 버시오. 그러면 그 돈으로 집도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음식도 먹고, 편리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토착인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거참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겠나! 우리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애써 돈을 벌려고 다투고 싸우지 않아도 이렇게 먹고 싶으면 바나나를 따먹고 자고 싶으면 코코넛나무 밑에서 마음대로 자곤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당신들처럼 그래야 한단 말이오. 에이! 어리석은 말 그만하고 이 섬에서 떠나시오." 물론 이것은 토착인들의 게으름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정말 어느 편이 행복한 것인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숨막히는 서울거리를 정신없이 달려 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는 현대인들과 무르익는 벼농사를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논두렁을 걸어가는 농부를 비교한다면 그 어느 편이 정말 행복한 것일까? 오늘의 서울거리 그 교통지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걸어서도 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시간 두시간씩 허비하면서 그래도 자동차를 몰고 다녀야 한다. 일년에 도로상에서 소비되는 휘발유 값이 몇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좀 다르게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건강하게 그리고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좀 덜 먹고, 덜 쓰고, 덜 편리하게 살아야 하겠다. 그렇게 하여 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환경을 회생시키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그대로 아름답고 조화된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아름다운 절제운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시작은 물자가 적어서 소비절약운동으로 그리고 금주금연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물자가 풍부하지만 인류와 자연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본래적인 기독교 생활의 모습을 회복하는 의미에서 새롭게 실천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한국교회의 큰 공헌이 될 것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생존의 윤리는 바로 동양 또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정립하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책임은 자연을 마구잡이로 정복하고 파헤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책임있게 맡아서 가꾸고 돌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먼저는 잘못된 인간중심주의적인 사상을 수정해야 하고, 서구의 지나친 성장일변도와 소비주의 제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아야 하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참된 뜻을 새롭게 깨달아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웃을 위해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확립해야 한다. 인류와 자연의 생존을 위해 지나친 욕심과 물량주의를 버리고 삶의 양보다는 질을 위해 우리의 삶의 궤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인간만의 존중이 아니라 창조의 책임있는 보존을 위해 G.N.P. 즉 하나님, 자연 그리고 인간이 함께 공존하도록 힘써 나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다. 로마서 8:18 이하에 보면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피조물들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씀이다. 새로 거듭나서 야망과 욕심에서 해방되어 자연과 공생공존하고 이웃을 위해 절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 그것만이 이 파괴되어 가고 있은 인류와 자연을 지키고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