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한 기도

                        유병찬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꺽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 구나.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가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아가 6:2-4)

[들어가는 말]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구입하러 종로 서적에 잠시 들렀는데 우연찮게 한 권의 책이 나의 시선을 주목 시켰습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라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책을 구입해서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마치 이솝우화를 읽는 기분으로 쉽게 책을 읽어나갔고, 실제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이 잘되어 있는 책이었습니다.이 책에서 나의 마음속에 가장 화 닫는 말은 다름이 아닌 이책의 제목이었습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장자의 가르침입니다. 며칠 전 지하철 속의 전동차 광고란에 써있었던 내용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습니다.’자연과 문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연은 소가 자기의 네발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이고, 문화는 그 소에 꼬뚜레를 끼워넣는 것이다.’ 아주 기막힌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읽으면서 중국의 우애한 사상가 장자의 깊은 통찰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 시카고 대학의 물리학 교수이며 과학 철학자인 토마스쿤은 현대를 과학 기술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기존의 과학, 즉 베이컨과 뉴톤으로 이어온 근대 과학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하이델베르크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과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운동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지금까지의 기계론적인 부분의 집합으로써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근원에 깔려있는 전체의 연관성에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사물과 불리 된 독단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사물과 유기적으로 관계된 관계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자연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의 절대적 마술에 취해있던 인간은 인류의 행복과 미래를 꿈꾸며 자신들이 개발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유토피아, 테크노피아, 크레디피아, 휴먼테크”…미디어를 통하여 쏟아지는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천국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운동, 바로 테크노피아 아닙니까?”

[몸 말]

 몇해전 후세인의 지역 패권주의와 미국의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라는 실리의 충돌로 걸프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다국적 영상매체인 CNN방송의 직접적인 생중계로 하이테크 전쟁무기의 묘기를 안방에서 오락게임을 보듯 시청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전자 비디오 게임이라는 착각을 저뿐만 아니라 그 방송을 보던 시청자는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컴퓨터로 조준된 곳을 미사일이 정확히 맞추어 건물이 와르르 무너질때에, 시청자들은 일어나 환호를 지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미사일의 목표에 대한 정확성을 근거로 내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현실입니까? 무너지는 그 건물 속에 수 백명의 이라크 민중들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래도 돈내기를 즐겼을까? 라는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이 말도 되지 않는 말이, 분명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더욱더 기막힐 것은 이러한 범죄 행위가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이름으로 행하여졌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대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게서 이 전쟁을 위해 축도하면서 악마들과의 전쟁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약 10만명의 이라크 민중이 죽은 이 전쟁이 미국은 자신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개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해오던 테크노피아입니다! 현대인이 꿈꾸어 온 천국이 눈앞에 확인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쁨니까!  너무나 즐거워 춤을 추고 싶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추는 그 춤은 생명의 춤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춤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아프리카에는 700만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전쟁의 포화 속에 수 많은 여인들이 강간당하고 있고, 그리고 대부분의 3세계 국가에서는 지역적 민족적 그리고 경제적 명분으로 희생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인 취급을 하던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자비한 살육을 양심의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이름으로” 말입니다.한국에서, 베트남에서, 파나마에서, 이라크에서…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학원가, 국화, 그리고 신문지상에서 5.18광주 학살의 규명과 책임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용서하느냐, 처벌하느냐, 역사에 맡기느냐 등등…어느 유력 일간지 구석에 조그만하게 실린 어느 광주 시민의 절류가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을 무색하게 했습니다.

“용서라는 것 그것은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입니까?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누굴 용서 하란 말입니까? “ 바로 썩을대로 썩은 양심을 가진 자들에 대한 피해자의 최소한 소리입니다. 바로 이 소리는 광주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중동 지역에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민중들이 소리인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때려잡은 마귀새끼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잘못했다고 고백할 때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졌느라! 이 말은 용서받은 자에게는 해방의 소식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심판의 서곡인 것입니다.

[나오는 말]

 여러분 환경의 회복은 자연과의 회복이고, 창조주의와 회복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환경이라는 위기는 쓰레기 분리수거와 환경 캠페인 등으로 극복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과거의 현실의 반성 없이는 극복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 강간당하고, 굶주리고, 죽임을 당하는 세계의 모든 형제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환경운동은 바로 이들이 희생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억울한 죽음을 위해 우리는 날마다 위로와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