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평화의 주

                        신인호: 새 부천감리교회 목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요 14:27)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제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라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오늘날 평화의 문제는 인류가 당면한 가장 긴박하고도 절실한 문제입니다. 가공할 핵무기 위협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예언자 옐례미야가 말씀하였던 무서운 “혼동과 공허”의 상황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을 우러러본즉 거기 별이 없으며…”렘 4:23-26)이 언제라도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느냐 하는 문제는 온 인류의 사활에 달려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때 평화를 갈구하는 이땅의 모든 인간을 향해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바로 “평화의 주이시여,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살렘의 운명이 외적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역사의 위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오늘 본분의 말씀에서 공명과 정의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메시야 왕의 오심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세 낳고,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각의 왕(sa shalom)이라 할 것 입니라”(사 9:6)

 그리스도 교회는 이 예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주라는 것은 성서적으로 무슨 뜻이며 그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먼저 “평화”의 성서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보통 “평화”로 번역되는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샬롬(Shalom)입니다.

 첫째, 샬롬의 동사형인 살렘(Shalem)은 “완전케 하다”를 의미하며 파생적으로 “완성시키다.” “회복시키다.”, “보상하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음 구절은 샬렘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솔로몬의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것을 마친지라(샬렘)”  (왕상 7:51)

 둘째, 형용사 형태의 샬렘은 “온전한” 또는 “가득 찬”을 뜻합니다. 어떠한 한 부분도 결여되거나 부족하거나 손상되지 않았을 경우 샬롬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부분들이 완전한 조화와 질서, 그리고 통일을 이루고 있는 상태가 샬롬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의미의 바탕 위에서 샬롬은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샬롬은 종종 인간관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그때의 뜻은 관계의 “온전함”, 즉 우의와 화평한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 또는 두 집단이 서로 마주쳤을 때 상대가 친구인가 또는 적인가를 확인할 때도 샬롬이란 말을 썼던 것입니다. 샬롬은 또한 구제 관계의 차원에서고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특정한 두 나라가 샬롬의 관계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간에 우호와 동맹 또는 협조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상 5:12). 물론 샬롬이라는 말에는 전생이나 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라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샬롬의 여러가지 양태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샬롬은 평화를 유도하며, 샬롬이 깨어졌을 때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력충돌과 전쟁의 종결이 곧 자동적으로 샬롬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서적 의미의 샬롬은 좁은 의미의 평화보다는 훨씬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샬롬이라는 말이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공동체의 온전성과 화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공동체에 있어서 샬롬은 공동체안에서 정의와 공평의 실현을 통해 성취되고 유지됩니다. 시편 가자가 노래했듯이 샬롬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정의와 샬롬이 서로 입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외면적어로 보기에 마루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라 할지라도 만약 그 사회 내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가 불공평한 취급을 받고 그들의 인권이 무시되고 짓밟힌다면 그 사회는 샬롬이 결여된 사회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 샬롬이 없는데도 “샬롬, 샬롬”을 앵무새처럼 떠들고 다녔던 거짓 예언자들을 실랄하게 비판했던 것입니다.(렘 14, 8:11; 겔 13:10-16)

 구약의 왕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공평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이스라엘 사회의 샬롬을 유지해야 할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시 72:2-7). 모든 정치권력의 책무는 시편 72편에 잘 나타나 있듯이 정의와 공평을 -특히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실행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임무를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을 때 그 권력은 그 권위와 정당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창조의 능력으로 “혼돈”으로부터 “샬롬”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무엇보다도 모든 창조의 질서 안에 샬롬을 수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고 모든 피조물을 향해 “매우 좋았다.”(창 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대로 완전한 샬롬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안에서 샬롬이란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을 보면 세가지 측면에서 창조질서 안에서 샬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샬롬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독자적 존재도 아니었고 자기의 창조주에 맞서는 반역자고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최고의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완전한 신뢰와 충성, 그리고 신실한 순종의 관계였습니다.

 둘째, 피조물로서 보든 인간 사이에는 샬롬이 있었습니다. 인간 사이의 샬롬의 관계는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 묘사된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가장 잘 예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대상이었고, 공통된 임무를 부여 받았으며, 상호 동등한 지위에 있는 동반자였습니다.

 셋째, 인간과 자연세계 사이에 샬롬이 있었습니다.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임무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인 자연계의 조심성 있고 성실한 관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조화로운 샬롬의 관계는 인간 편의 불 손종 행위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개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오만(Hubirs)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불 손종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샬롬이 파괴됨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부여한 샬롬이 다른 영역들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했던 샬롬은 이제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 (창 3:16) 인간 사이의 조화와 화합과 샬롬의 관계는 증오와 폭력의 관계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점은 가인과 아벨의 형제 살인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창 4). 인간과 창조주,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깨어진 샬롬은 결국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였던 샬롬의 관계도 파괴됨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당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창 3:18)를 내었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착취자, 또는 약탈자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씀 드려서 불 순종과 오만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피조물 세계의 샬롬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창조주와 다른 피조물,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유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서, 곧 샬롬은 혼돈의 파편들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깨어진 샬롬을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실 분의 오심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이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잃어버린 샬롬의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바에 다르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5:1).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의 사역을 통해 하늘과 땅에 샬롬을 회복시키십니다. 바울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이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바울은 또 에베소서에서 예수를 가리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이는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돌을 한 몸으로 하나님의 화목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4-16)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인류에서 잃어버린 샬롬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심을 하늘의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상실된 샬롬을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전 역사에 걸쳐 예수가 평화의 왕이라고 선포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이라고 선포할 때 그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행동에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평화의 왕의 신실한 제자들로서, 공동체로서는 교회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hems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케 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샬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케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잇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회복되는 은혜의 선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보든 사람에게 맡겨진 과제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단순히 평화를 좋아하고 온화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평화, 즉 교회와 그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분쟁과 폭력으로 얼룩지고, 증오와 적으로 분열된 이 세계에서 샬롬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평케 하는 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샬롬이 파괴되고 상실된 곳,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일을 시작해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정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의 샬롬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땅에는 화평케 하는 우리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분야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교회공동체로서 시급히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몇 가지 분야들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국가간의 샬롬을 회복하는 일: 민족과 국가간의 샬롬을 회복하는 첫 단계는 전쟁을 막는 것입니다. 부력충돌이 없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샬롬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소극적 샬롬”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평화를 보전하고 증진시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하룻밤 사이에 온 인류와 문명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핵무기나 생화학무기의 위험성과 죄악성을 심각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많은 군대와 가공할 무기에 의해 불안하게 유지되는 평화는 결코 진정한 샬롬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방어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을 휠씬 넘어서는 군비경쟁을 더 강력히, 더 적극적으로 저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비 축소 문제는 화평케 하는 공동체인 교화가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인종간의 샬롬을 회복하는 일: 인종적 차이 때문에 인간의 기본권이 거부되고 차별당하는 한, 우리는 샬롬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가족 모두가 화합과 조화를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종차별 문제가 개인적으로 직접 자기에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죄화를 만들며 여가를 선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그리스도의 교화는 나라와 종족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이 자녀들 속에 샬롬을 온전히 이룩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과도 싸워나가야 합니다.

 사회만의 샬롬을 회복하는 일: 어떤 사회가 특권층과 소외계층, 힘이 있는자와 힘없는 자로 나누어져 있다면 그것에는 샬롬이 없습니다. 힘 있는 자의 이익을 위해 정치경제 사회적불의와 억압의 희생자들이 외치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공평과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화평케하는 자들의 범세계적인 모임으로서 정의로운 인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도 함께 일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샬롬을 회복하는 일: 오늘과 같은 후기 산업사회에서 조차 우리는 여전히 성차별과 불평등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또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은 샬롬의 창조질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복음을 선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질서가 타락한 옛 질서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시작했음을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하나님이 창조 때에 의도하셨던 샬롬의 관계로 회복하고 치유하는 과제를 위임받았습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샬롬을 회복하는 일: 성서적 신앙은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착취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기독교는 인류가 직면하고있는 생태학적 위기와 환경오염의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자연을 무조건 파괴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까지 끌어올려진 인간의 위치는 자연을 돌아보라는 무거운 청지기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회는 자연의 질서와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무책임하고도 탐욕스럽게 자연을 착취하는 행위를 막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샬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 평화의 왕은 샬롬이 깨어진  세계 속에 샬롬을 이룩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며 이 사명을 감당할 확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