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유의 울타리를

                        성백걸: 한 생명교회 전도사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고 말씀하셨다.”(눅 9:58)

걷어 치우면 온 천지 산하가 내 “집”이고 온 우주 만물이 내 “임”이더라

싸리 울타리에서 철창 벽까지: 물질 문명의 끝없는 소유욕

우리네 울타리의 변화는 우리네 삶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초가집에 울타리가 없든지 있다 해도 고작 싸리나무로 만든 울타리나 흙담이었습니다. 그때는 물론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이 가난만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자연적으로는 아주 풍부했던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었으니까요. 청청한 하늘 아래 푸르는 청산 속에 넉넉한 황토 위에서 어울려 일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엉성한 싸리 울타리 너머햇살도 내려와 놀고 싱싱한 바람도 마음대로 와서는 머물다가고 마당은 언제나 앞산 산자락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갑자기 소용돌이 치더니 언제부턴가 우리도 세계 물질 물질문명의 흐름을 따랄 근대화, 공업화, 선진화, 산업화, 도시화, 서구화를 부르짖고 농촌에서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고 새마을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일어난 변화는 싸리우리나 흙담을 부셔버리고 딱딱한 시멘트 벽돌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 길을 넓히고 쓰레트 기와를 얹는다 해서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한 집 두 집 보따리를 챙겨 들고 도시로 떠나가는 이농화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이면에서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혼란과 급변의 와중에서 권력의 독재와 부의 독점과 물질 소유의 검은 손길이 세상을 마구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엄청난 변화의 혼란 속에서 정신 못 차리고 살려고 바둥거리는 틈을 타서 물질문명의 어두운 “마”(?)가 독재자와 독점가와 당 투기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비극은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문화도 심지어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중요조차도 그 꼬임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소유하라. 소유하라, 무조건 소유하라.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기 원해서는 소유해야 한다. 이 물질문명의 적자생존 경쟁의 시대에 차지해라, 차지해라. 딴 놈이 차지하기 전에 우선 먼저 차지하라. 많을수록 좋다. 더 많을수록 좋다. 빼앗고 속이고 얼루고 사기치고 위장하고, 수단이야 어찌해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차지해서 집에 갔다 금고 속에 모셔놓고 무법한 도둑의 검은 손길로부터 내 소유물을 지켜라, 벽을 쌓고 높이 쌓고 철책 벽에 철창문을 달고 그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소유와 탐욕과 독점에 어두운 벽이 높아만 가는 사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 딱딱하고 시커먼 저 높은 벽 너머에 있는 자연이 소외되고 파괴되고 썩어가고 죽어가기 시작했고, 내 이웃형제자매가 집이 없어 방한칸이 없어 셋방으로 전세살이로 서러워 울고 있었고, 이 나라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와, 심지어 그 순결해야 할 종교까지도 부패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지요, 그 죽음의 세계 속에서 갇혀있는 탐욕과 소유욕의 노예자로 죽어갈 수 밖에요. 이런 물질 문명의 세상 속에 사는 현대인들이 그 주가 실제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들 빈공간과 여유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내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 치우면

 그러면 교회, 한국교회는 그 동안 어떠했습니까? 아니 과거 얘기는 그만 하고, 바로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합니까? 너무 많이 가졌습니다. 너무 많이 소유하고 너무 많이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 인생의 스승이요 우리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너무나 부자입니다. 실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분보다 너무나 많이 차지하고 너무나 잘났습니다. 사실 그 분한테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라서 통곡하며 참회할 일이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누가복음 9장 58절)

    이것의 그 분이 가진 재산 공개였습니다. 근사한 집도 으리으리한 교회당도 없었습니다. 산속의 여우보다도 저 숲 속의 새들 보다도 더 가난하게 사셨으니까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이 땅에서 가난한 나그네로 흐르다 가셨으니까요, 그렇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흐르고 흘러 하늘의 세계,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로 흘러 가셨으니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우리들 중 누가 진짜 더 부유하고 누가 진자 더 부유하고 누가 더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까? 그 분이 정녕 가난하게 살았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분은 내 소유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걷어치우고 그 것도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얻어치웠지만 그러므로 그 분은 정말 부유했지요, 더할 것 없이 풍성했고요, 탐욕과 소유욕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전 세 우주 만물을 품었으니까, 그래서 가는 곳이 내 집이요, 머무는 곳이 머리 둘 곳이요, 만나는 사람 사람이 내 형제자매였으니까요. 그러면 이런 가난한, 그러나 풍성한 삶의 길은 그 분에게 해당되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까.

온 천지산하가 내 “집”이고

 우리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그저 믿고 그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나도 모르게 높고 두껍게 쌓아왔던 소유의 벽을 걷어치우고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쳐 놓았던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자연 앞으로 나서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무엇이 보입니까?

 아하! 그렇습니다. 우리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진짜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소유한, 또 소유 할려고 발버둥치는 몇 십 평짜리 집만이 내 집이 아니라 저밖에 저렇게 펼쳐져 있는 온 천지 산하가 바로 내가 그 속에 살고 있는 내 집이라는 진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 높은 푸른 청정한 하늘, 저 깊고 그윽한 정겨운 청산, 저 넉넉한 대지가 있는 그대로 내 집인 것입니다. 소유하고 차지할려고 땅투기를 하기 위해 두 눈에 시뻘건 탐욕에 불을 켜고 지랄발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내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있는 그대로의 온천지 산하(自然)를 내 머물고 쉬다 갈 집으로 하여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게서 누리셨던 삶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이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며 하나도 소유치 않고 살아가셨던 그분의 참된 기쁨과 자유의 삶을 우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 말입니다. 문제는 내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치우는 신앙적인 결단과 용기 일뿐입니다. 그럴 때 저쪽에서는 내가 자유와 생명이 샘솟는 진리의 세계가 두 손 벌려 우리를 받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풍성한 세계가 열려있는 것이지요, 우리 쫀쫀하게 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온천지 산하를 내 집으로 하여 살아갑시다. 전국토를 소유할려고 날뛰지 말고, 내 태어난 한반도 이 산하를 있는 그대로 내 집으로 맞아서 그 속에서 자유로 흐르고 흘러 갑시다. 하늘 아래 땅 위에 내 가는 곳 그 어디나 내 머무는 곳 그 어디나 내 걷는 곳 그 어디나 그 곳이 바로 내 집인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이 내 “임”이더라

 온 천지산하를 내 집으로 삼고 이 한반도 산하를 내 잠시 머물다 살 집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은 그 속에 함께 살아갈 사람들도 친구들도 형제 자매도 연인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실로 집을 가질려고 하는 이유는 거기서 내 사랑하는 임과 한평생을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않을 터입니다. 사랑하는 임이 있어 삶이 있고 함께 살 임이 있어야 집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임이 없다면 삶도 삶이 아니요 집도 집이 아닐테니까요, 그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임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한평생을 사랑하는 임을 찾아 우리의 외로운 혼은 헤매고 헤매야 하는가 봅니다. 이 밤도 저 밤도 그윽한 기다림과 그리움과 촛불을 밝히고 타는 혼으로 깨어있어야 할 우리의 살아있는 정신! 저 시편의 시인은 이런 우리네 인생의 그리움과 목마름을 애타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봐오리이까” (시편 42장 1-2절)

 우리는 어디서 이 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을, 사랑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랑, 나의 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온 천지산하 내 집에서 한평생 더불어 행복을 꿈꾸며 살아갈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랑, 나의 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디서 내 애타게 찾고 있는 그리운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요, 아! 알 수 없어라. 임 찾아 길 떠나는 우리네 인생의 그 정처 없는 발길이여!

 그런데 이건 또 웬 은혜입니까?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한번 내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보니 언제부턴가 내 만나는 온 우주 만물이 내 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만나는 바람도 내 사랑하는 임이요, 저 청청한 하늘도 내 그리운 임이요, 저 넉넉한 대지도 내 포근함이요, 저 깊은 청산도 내 그리운 임이요, 길가에 저 나무들도 내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랑하는 임으로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는 산길을 가는데 길가에 참나무가 어서 오라고, 이제야 오느냐고, 그 동한 비바람 눈보라 칡흙 같은 어둠 속이나 은은한 별빛 달빛 아래서 애타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반가이 두 손 벌려 맞아 주어습니다. 언젠가는 청산에 핀 어여쁜 진달래 꽃들이 사랑하는 임이 되어 와락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임만이 임이 아니요,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보면 온 천지산하 우주만물 뭇생명들이 내 임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썩어가는 쓰레기 조차도 안타까운 내 사랑하는 임이요, 현대 물질문명의 산업쓰레기 조차도 다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가엾은 내 사랑하는 임인 것입니다. 실지로 인간의 싶은 혼과 정신은 온 우주만물과 서로 교재하고 교감할 수 있는 사랑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내 정신 속에 있는 그 무엇과 우주만물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서로 애타게 찾고 찾다가 마침내 만나서는 사랑과 친교에 교감을 갖는 것입니다.

 왜 그렇까요. 사람을 포함하여 온 우주만물에는 바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숨결과 혼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꿰뚫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기운이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혼의 편린이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온 우주만물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에베소서 4장 6절)

 그래서 사람을 포함하여 온 우주만물은 온 천지산하를 감싸 안고 있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우주적 사랑의 “한생명”체를 이루어 함께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지금은 우리의 쫀쫀한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우주적 사랑으로 온 우주만물, 천지산하와 손잡고 서로 정겨운 임이 되어 살아갈 때입니다. 온 우주만물 속에서 내가 애타게 찾고있는 그리운 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실로 임뿐인 임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내 사랑하는 임으로 하여 온 천지 산하 내 집에서 한평생을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생명교회 식구들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너도 나도 소유욕의 세력에 눈을 팔고 있는 이 물질문명의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내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바로 우리가 온 천지산하가 내 집이요 온 우주만물이 내 임이라는 새로운 안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느낌, 새로운 깨달음을 더욱 단단히 살피고 다져서 그 위에 의연히 서서 이땅에 하나님의 참된 세계를 열어가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한생명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바로 그때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힘과 사랑이 우리 가는 삶의 길에 함께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