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된 의식이여!

                          김윤식: 영광 감리교회 목사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과학문명의 발달과 정비례하듯이 …… , 인간의 마음속에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과 이기심 바로 그것인가 봅니다. 경제성장과 안정된 생활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편협함과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생활태도요, 윤리의식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한 것은 지어진 세상의 아름다움 겉모습을 보시고 평하신 것이 아니라 자연질서의 조화로움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들면 쉬운 예로 우리나라의 4계절과 그 계절에 따른 동, 식물의 자람과 거두어들임…, 거기다가 동, 식물의 자람에 어우러지는 온도와 비, 눈 등,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과 만들어 좋아하며 기뻐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에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서 질고의 씨앗들이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자연을 이용하여 오고 있지만 자연을 살리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즐기는 일만 앞장서 왔습니다.

우리 국민이 주식으로 삼고있는 쌀을 생각해 봅시다. 그 쌀이 양식이 되어 입으로 들어오는 과정까지를 살펴보면 양질의 벼와 건강한 벼를 위해 소독한 씨앗을 뿌리고, 병충해 예방을 위해 어린 묘목 때부터 농약 살포를 시작해서 목도열병을 예방하고, 모든 쌀과 농산물과 가공식품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만큼 오염된 것들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살포는 보다 양질의 곡식을 거두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지만, 실은 오염된 땅에서 오염된 것을 많이 거두어 들이므로, 많은 인간을 병들게 하기 위해서 투자한 것들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병든 땅에서 병든 농산물을 생산하고, 병든 양식으로 사람을 병들어 가게하고 있는데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이 방치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농촌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를 더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온 지구촌이 병들어서 제 기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지구가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 즉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셨던 그 질서가 무너져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위해 지으신 만물의 질서가 균열된다는 것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예상치 못한 일을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문명의 이기 때문입니다. 즉, 잘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욕심과 편하게 살아보려는 편협한 인간주의요, 개인주의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그 어떠한 나라나 사회에 규범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는 아름다운 사회질서를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서로의 약속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보지 않나 하고 기회를 틈타서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이젠, 누가 보던 말던 대담하게 규범을 깨뜨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인간들의 잘못된 욕심으로 지구의 수명을 짧게 만들고 있는 이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 북한의 핵사찰 문제로, 서방 선진국들을 비롯한 주변 당사국들이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이 지구를 48번 망가뜨리고도 남을 만한 양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모자란다는 듯이 핵무기 생산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는 나라들이 있으니 실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세계 도처에 이상기후의 변화로 생겨나는 폭우와 긴 가뭄은 인간들의 생명을 쉽게 빼앗아 가고 있으나, 그런 재해는 정해진 때에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더더욱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근래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잠시 살펴보면, 동남아 지역의 지진, 캘리포니아의 엄청난 태풍, 영국의 도시한가운데서 일어났던 가스 질식사……, 이 모두가 인간들의 자연에 대한 잘못된 욕심과 행동에서 비롯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된의식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들면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던 것처럼, 금 세의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이 세상에 보내어져서 지구촌을 잘 관리하고, 가꾸어, 지구촌의 생명력을 오랫동안 유지해야 하는데, 남이 보든 말든 자기만을 위한 생활이자 죄된의식으로 지구를 오염시켜 가면서도 전혀 무신경적인 모습을 보이며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간의 커다란 죄란 바로 그러한 의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죄의 기원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 찾을 수 있으며 그 죄의 본질은 불법과 선을 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부패한 성격등에서 나타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죄의 삯은 지구의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사망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울마다 맑은 물과 활개치는 물고기 대신에 검은 물에 물거품은 그 무슨 이유이며, 가끔 잡아보는 붕어와 미꾸라지의 등이 굽어지며 삐뚤어진 기형의 모습은 어인 일입니까? 이는 자기 이익과 자기 편의만을 생각하는 그릇된 사람들의 몰상식한 행동에서 기인된 일이 아닙니까? 이제까지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그릇된 생활 태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천이 오염되고 고기들이 기형으로 자랄 만큼 더럽혀진다는 것은 지구의 생명력을 병들게 하는 일이고, 이는 자연의 파괴요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생태계의 파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그릇된 의식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지구의 건강이 우리의 건강과 이어진다는 합리적인 사고와 예수님 보여주신 희생적이고 청아한 정신으로 모든 피조물의 건강과 보전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발달한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가정의 건강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나타내면서도 이웃의 건강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소나 곰처럼 힘이 있어서가 아니며, 그렇다고 말과 타조처럼 빠른 발을 가지고 있거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힘센 날개를 가지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리가 분명하여 그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족히 알 수 있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능력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에는 한없이 발달해있는지 몰라도 이웃이나 인류를 위한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핵가족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성격은 지금의 기성세대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버릇없는 인간으로 커 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아이들이 기성세대와 합류하면서 보다 절실한 것은 올바른 인도자와 스승이 이 사회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바른 의식과 협력을 이끌어 내기위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하나에의 일치와 바른 의식을 갖지 못하고 저마다 자기만을 아는 모래알과 같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외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하신 말씀은 오늘날과 같이 이웃의 건강을 외면하고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의식 속에서 성장과 발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창조와 기뻐하심은 우주만물의 조화로운 질서와 제 기능을 다하는 모습에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조용한 마음으로 생각해 봅시다. 창 2:25절에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동산에 사람을 두시고 그 사람으로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했는데 우린 이 지구촌의 관리를 맡은 사명자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손실 없이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마 25:14-30절에 보면 한 주인이 집안에 모든 일을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맡기고 타국에 다녀온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두 명의 하인은 주인이 맡긴 것을 능동적으로 관리했기에, 있는 것만큼 더 받으며 칭찬 중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였지만, 한 달란트를 받았던 하인은 받은 사명을 땅에 묻어두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게으름 중에 지내다가, 심한 꾸중과 함께 그 있는 것조차 빼앗겨 버리는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린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이 지구촌의 관리를 하나님이 지으셨던 처음의 아름다움을 잘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심한 꾸중을 들을 만한 자리에서 아름다워야 할 생태계요, 건강해야 할 지구촌을 파괴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간들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지구촌의 관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리 능력은 막 11:13절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잎만 무성한 채 외형적인 성장만 꾀해온 허황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이 땅은 깊은 병중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 유익만을 찾는 개인주의에 젖어 살으시렵니까? 하나님은 큼 관심 중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됩시다.

 고전 10:24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믿음은 시인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빛이 되는 삶을 살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행함을 의미하여 의로운 행동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요 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듯이 구원의 길은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얻지 못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을 당하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해 주시고 인간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셨기에 가능해진 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한량없이 넓은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이고, 무지한 인간대신에 하나님 손수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오직 주의 선 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겸허함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란 이 세상에 있어서 이웃에 폐가 됨을 알면서도 나만 잘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죄된의식에서 살아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늘의 의를 구하는 성도의 거룩함을 나타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더럽히고, 병들게 하며, 파괴해 갈 것이 아니라 함께 공생한다는 의미에서의 생명력 있는 관리요, 서로의 자기 자리를 지키게 하는 참 관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나의 건강과 지구의 건강을 염려하며, 지구오염을 방지하는 방지자들이 되어 지구를 살리는데 조금이나마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기쁨의 역사를 주와 함께 창조해 가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