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을 위한 큰 약속
세계환경의 날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이정배:감신대 교수, 목사

"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아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 채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안하여 그 중에서 변성하라 하셨더라." (창 9:1-7)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 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을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18-25)

 매해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1992년 환경의 날을 즈음하여 브라질 리오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정치 수뇌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 환경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잘 살게 될 줄만 알았던 인류가 이제 그것이 주는 반대 급부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존뿐만 아니라 후대에 올 생명들의 삶의 토대 자체를 의문 투성이로 만들고 있다는 불안과 그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오 회의의 결과는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간의 첨예한 이해 대립만을 노출시켰을 뿐 인류 당면의 현실을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정치가들은 선진국이 환경을 빌미로 하여 자신들이 경제 및 자본을 빼앗는 환경 테러리즘을 감행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선진국들은 인구 증가를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보기 있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인구 증가를 가장 두렵게 인식하고 있으며, 반면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환경위기를 인구 증가의 결과로만 보는 서고적 시각을 비판하면서 한 사람 당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량을 예로 들어 선진국의 편리주의적 생활 양식(고 엔트로피적 생활 방식)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것 하나 사실 아닌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 어느 쪽의 입장 하에서도 우리는 인류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대안적 이념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모두 환경 분제를 정치, 경제적 시각에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선지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현금의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역시 선진국의 기술 이전의 덕분으로 자신들의 당면 문제를 넘어 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의 부분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환경 문제를 정치 경제학적으로, 기술공학적으로만 해결하려는 리오 환경 회담의 시각은 분명한 한계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있습니다. 2010년까지 인류는 현재 내 품고 있는 이산화탄소량의 30퍼센트 정도를 감소하지 않으면 사실적 종말론(reale Eschatologie)의 징조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고가 말해 주듯이 세계의 환경 문제는 정치적, 기술공학적 문제 이전에 삶의 질을 더 이상 높여서 살지 않으려는 삶의 양식의 전환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그 극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종전과 같은 물질적인 가치관을 고집하면서 기술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고 하는 것은 지구의 운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처방력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창조 신앙을 지니고 살아 온 기독교 신앙인들의 역할을 새삼 기대해 보게 됩니다. 천지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오늘 환경 위기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에게는 물론 전 세계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참 좋다”(Es ist gut)라고 하신 그 환호성을 기억합니다. 이때의 환호성이란 단순한 도덕적 의미 또는 그분의 인격적인 흥분이라기 보다는 이 세계가 조화와 균형 속에서 상호 관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생태학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창세기 6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히려 이세상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자신의 창조 의지를 철회시켜야겠다는 결심을 접하게 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 결과로 일어났던 사건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었지요, 그래서 메스터만과 같은 학자들은 성서의 창조 신앙이란 세계의 기원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자명하게 생각되던 세계의 멸망, 곧 노아의 홍수사건 속에서 그 본래적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 위기 상황 곳에서 노아의 홍수 설화가 창조 신앙의 중심 부분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 의미가 무척이나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서는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만 하나님 의 창조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계속되어 오히려 맨 처음 때보다도 더 큰 축복의 말씀으로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바다의 모래알처럼 퍼져 나갈 것을 약속해 주었다고 기술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성서는 축복을 위한 하나님 편에서의 두 가지 단서를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즉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말 것과 동물들을 산채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창 9:1-7). 전자는 인간 사회 내에서 정의의 감각을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짐승과의 관계 속에서 탐욕을 버리고 공존하는 즉, 환경(생명) 위주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선포한 메시아 왕국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나라, 사자와 염소가 함께 뛰놀며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는 자연과의 평화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이사야 11장). 실상 이 두 가지 단서는 서로 깊게 연결되는 주제로서 어느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것 역시 잘못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감동스럽게 지켜 보았던 영화-‘늑대와 함께 춤을’(Dance with Wolf)-는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지 500주년 지는 해를 기념하면서 그 동안 백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얼마나 큰 범죄를 행했는가를 가죄하는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는 백인들이나 인디언들이나 모두가 들소를 사냥하는 주체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들소 사냥은 자신들에게 고귀한 생명을 내어 주는 들소들에 대한 제의를 동반한, 양식, 먹이를 위한 살생 행위였지만, 백인들의 사냥은 들소의 가죽을 벗기는 대량학살, 즉 들소들이 생명 자체를 요구하는 폭력 행위였습니다. 더욱더 백인들의 사냥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정복하고 재배하기 위해 그들의 주식원이 되는 들소 자체의 멸종을 도모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서부 개척자들의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동물을 피채로 먹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는 죄악이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있는 총체적 위기 역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단서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인류는 저마다 물질적인 삶의 발을 낮추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좀더 좋은 것, 좀더 편한 것, 좀더 귀한 것을 찾고 그것을 소유하며 살려고 하고있는 것입니다. 한국 전력에서는 핵 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게으른 베짱이의 모습으로 묘사한 포스터를 지하철 안에 공공연하게 부착하고 있으며, 모 에어컨 회사는 ‘지구를 식히자’라는 파렴치한 표제와 함께 에어컨 판매를 부축이는 광고를 신문에 버젓하게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본주의적인 광고의 홍수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를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로써 소유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남과 비교하여 우월하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마다 이로만 향해 살려고 노력하는 경쟁의 소용돌이가 깊어 가면 갈수록 우리 사회 내에는 경쟁에서 좌절한 소외계층이 더욱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 내에 망연 된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살인 행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이러한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놀라움을 표하곤 합니다. 한 시골 청년이 대구이 모 나이트 클럽에서 농촌 사람인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불을 질러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게 했으며 또 한 도시 빈민이 서울의 열악한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아무도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앙심을 품고 여의도 광장에서 자동차를 질주하여 수 십명의 어린 생명을 희생시킨 사건을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종전이 살이 행위를 어떤 특정한 사람 몇몇을 겨냥한 분노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는 살인 행위의 대상이 불특정 다수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 곧 성장 위주의 물량주의적인 정책하에서 농촌을 희생시킨 결과이며 도시 빈민을 소외시킨 이 사회의 집적물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동체 속에서 어느 한편을 소외시키면 이러한 소외 현상은 우리 hen을 불특정 다수의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류의 이익과 발전 및 성장을 위해 자연을 계속 희생시키고 소외시켜 버린다면, 즉 자연에게 그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물적 토대로만 평가한다면 자연은 그 옛날 리사본의 대지진 사건 및 영국 런던의 스모그 사건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우리 인류를 불특정 다수의 희생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의 권리 (The Rights of Nature)를 쓴 내쉬(Roderick F. Nash)라는 학자는 자연을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다하라는 새로운 격언을 다음과 같은 권리의 확장사의 빛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5년 마그나카르트, 1776년 독립선언, 1863년 노예해방선언, 1920넌 부인들의 참정권 인정, 1938넌 노동자들이 권리인정, 1957넌 흑인들에게 공민권 인정, 그리고 1973넌 자연에 대한 권리 선언.

 하나님에 의한 두 가지 단서가 언표된 창세기 9장과 연결되는 신약성서의 본문으로 우리는 로마서 8장 17절에서 25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 신학자 케제만에 따르면 창세기9장과 로마서 8장은 평행으로 읽혀져야 하는 부분으로서 전자가 다소 소극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와의 인간의 관계방식을 말했다면 후자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세계화의 관계를 말한바, 즉 피조물을 위한 큰 약속이라는 말로 명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 8장 17절의 피조물의 탄식이란 바로 창세기 9장에 기록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두 전제가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지켜지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오존층 파괴, 온실 효과, 생물의 종들의 멸종 현상, 농약에 중독된 화초들로 인해 독꿀을 내고 있는 벌들의 왜곡된 생태, 그리고 기형아 출산을 염려하고 있는 임산부의 두려움 등 피조물의 탄식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환경 위기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표제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바울-비록 이러한 전 피조물의 탄식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만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고통 및 탄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영광된 해방 및 자유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인간들 그러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워진 인간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에서 바울이 묵시문학의 이원론적 표상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로마서 8장 17절 이하의 본문으로 그 만큼 더 종말론적 희망을 강렬하게 현실화시키려고 하는 바울의 창의론(구원론)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구원받은 인간이야 말로 피조물들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그의 해방을 위한 큰 약속이 될 수 있음을 바울은 종말론적으로 언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근자에 들어 이러한 자각이 신앙인들에 의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바 생태계 구원을 위한 큰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기독교 여성들에 의해 편집된 잡지 Schriff ins Offene (1992년  4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표제어에 따른 소박한 글들이 몇 편 실려 있었습니다. “Nicht mehr Autonomie, sondern Abhangigkeit”(Gemeinschaft).해석해 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율성을 원하지 않고 상호 의존성, 공동체성을 원한다.’라는 것입니다. 본래 자율성(Autonomie)이란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이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주제인바, 인간은 자신의 자율성을 가지고 중세로부터 넘겨진 자신의 미성숙함을 벗겨 버리고 스스로 책임을 걸머진 채로 진보 및 발전을 계속해 올 구 있었습니다. 자율성 문화의 대표적 상징물로서 우리는 아우토( Auto) 곧 자동차를 들 수 있는데, 자동차란 그 동안 우리들에게 빠름, 진보, 앞섬, 편리 등과 둥가어로서 이해되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자동차는 오늘 우리들에게 짜증, 욕, 불안을 대표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또 다른 억압을 가중시키는, 인간의 비인간화 뿐만 아니라 환경을 파괴시키는 실체로서 서서히 인식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율성을 선호하지 않고 좀더 늦게, 천천히 속도를 조절해도 좋으니, 좀 불편해도 좀더 화려하지 않아도 좋으니 서로서로 관계하며, 서로 의존됨을 경험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기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인간 몸 속의 암세포처럼 자기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하여 끝 모르게 치닫던 삶의 방식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종식을 가져 온다는 자각하에 자신의 자율성, 진보 이념 등을 양보하고 뒷전으로 미루어 놓는 새로운 가치관을 태동시켜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물질적 축적, 부의 확대, 소유의 극대화, 편리함의 극치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죄이며 하나님의 저주일 수 있다는 사실이 신학적으로는 물론 과학적으로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은 물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최소한의 물질을 가지고 살려고 할 때 그것은 물질적 가치를 넘어 정신의 속성을 띠게 된다는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이에프의 지적은 자율성 문화 이후를 살아가는 연대 기독교인들에게 크나큰 힘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본래 십일조란 열중 아홉을 가지고 사는 종교적 삶의 방식을 제도화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최소한의 물질로 아니 정신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겠다는 신념이 자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 바울의 피조물의 탄식을 해방의 환호성을 바꾸기 위하여 자신의 ‘Autonomie’를 유보하고 상호 의존성, 상호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자족과 나눔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피조물을 위한 큰 약속’-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들은 이게 전피조물이 고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껏 스스로 세계의 주인처럼 살아왔었으니 이제 우리는 고통 받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방식으로 내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활이 주님을 체험한 베드로가 젊어서는 내가 내 마음대로 다녔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노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은 연약한 자,-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간에-와 더불어 아래로의 연대성을 위해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자연(피조물)이 회복되지 못하면 인간의 구원 역시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구원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피조물을 위한 큰 약속’을 가슴에 새기는 성숙한 기독교이의 삶을 꿈꿔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환경과 종교’라는 실로 지움에서 드려졌던 기도문을 다음처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맨 처음 세상을 빚어 내실 때
삼라만상의 심연에 질서를 이루신 분이시여
단조로운 온갖 것을 충만한 생명으로 동여매 주셨던
하느님의 영이시여

이제 다시 한번 이땅에 생명이 넘치게 하소서
인간욕심이 안겨준 상처를 싸매 주시고
인간욕심으로 인한 부스럼 깊숙이에
기름 발라 어루만져주신, 생명이신 분이시여,
세상의 조화를 찍어버린 난폭한 우리의 탐욕을
깊이 뉘우치게 하소서.
뿌리채 뽑혀진 수림의 아픔
오염된 바다의 울부짖음.
말라 버린지 오래된 하천들
기름 찌꺼기로 뒤덮인 황폐한 해변과 그 신음소리,
그속에서 함께 괴로워하시는 당신을 느끼게 해주소서.
죽어 가는 자연과 함께 우리도 죽어가고 있음을,
자연과 인간은 나누일 수 없는 하나의 생명임을
모든 이가 깨닫게 하소서

기쁨의 원천인 성령이시여
생명이 위태롭게 된 이 오염된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주소서.
그러면 이 황막한 세상은 다시 풍요로운 정원이 되겠고
거기 정의가 꽃필 것이고
꽃핀 정의는 평화로 열매 맺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