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가꾸기

                        이찬석: 고마리교회 전도사

 북상교회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작년에는 이 텃밭을 그대로 놔두었더니 잡초만 풍성하게 자랐고 종종 뽑아 주는데도 끈질긴 잡초의 생명력을 이길 수 없었다. 언젠가는 북상 텃밭의 잡초가 보기 흉했던지 나도 모르게 동네 아저씨가 제초제를 뿌려 놓게 가셨다.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분들은 잡초를 왜 뽑느냐고 말씀들을 하시지만 시골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성한 잡초는 곧 게으름이다.

작년 여름에 이천진 목사님, 채희동 전도사님 셋이서 충주 이현주 목사님댁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호박잎으로 점심을 차려 주시면서 텃밭에서 손수 수확한 채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자주 맛있게 식사를 하였는데 사모님의 음식솜씨도 일품이였고 시장에서 사온 채소가 아니라 손수 가꾸신 채소였기에 뜻 있는 식사였다. 식사 후 목사님 집안을 둘러 보면서 예쁘게 심어져 있는 채소들을 보고 내년에는 북상의 텃밭에도 채소를 심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1월 결혼한 아내도 서울에서만 자라 시골을 잘 모르지만 텃밭에 채소를 가꾸자는 제의에 기쁨을 감추지는 못했다.

 따스한 봄날 우리는 텃밭을 일구기 위해 삼을 들고 아내와 함께 흙을 파서 뒤엎고 있었다. 지나가던 민주 아빠가 “뭘 하시느냐?”고 물으신다. “채소 좀 심으려고 밭을 일군다.”는 대답에 “그냥 두세요 제가 로타리 쳐줄께요!”. 잠시후 민주 아빠는 경운기에 로타리를 달고 오셔서 단 몇 분만에 텃밭을 모두 갈아 엎으시고 유유자적히 사라지신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삽질하는 우리의 모습이 민주 아빠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아내와 함께 생각해보며 “귀여웠겠지”로 결론을 지었다.

 괴산읍내 종묘사에서 상추씨, 쑥삿씨를 사니 배추씨를 덤으로 주시기에 세가지 씨앗을 뿌렸다. 뿌리는데도 전혀 경험이 없어서 추측으로 뿌렸고, 이웃집 아주머니가 주시는 감자도 심었다. 매일 물을 주었고 싹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아침 상추밭으로 출근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상추밭의 흙에 금이 간 모습을 보면서 쪼개진 흙을 살짝 엎어 보더니 “찬석씨!” 하고 탄성을 지른다. 좇아가보니 상추싹들이 콩나물처럼 예쁘게 박혀 있었다. 싹들이 상추밭에 금이 가도록 흙을 밀치고 나오는 모습들을 보면서 생명의 강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신이 난 우리는 장날 오이와 가지모를 사다가 심었다. 잘 키워보겠다는 욕심으로 풀도 자주 뽑아주었고 정말 화초를 가꾸듯 정성을 다했다. 그날도 풀이 너무 많아 아내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오이와 가지밭의 잡초를 뽑고 있었다. 대화를 하며 풀을 뽑았기에 조그만 밭이지만 시간이 조금은 걸렸는가 보다. 지나가시던 동네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무슨 흙장난을 그렇게 오래해요!” 우리의 정성이 흙장난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상추, 쑥갓, 감자의 싹들이 쑥 자랐고 우리가 심은 상추로 첫 식사를 하던 날 아내와 함께 그저 신기함에 취해 있었다.

 부모님(장인, 장모님)께서 시집간 딸이 궁금해 복상에 내려 오셨다. 워낙 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서 많은 반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신다. 식사 후 아버님, 어머님,아내와 넷이서 미나리를 캐러 갔다. 교회에서 약 5분 정도 가면 산 밑에 논이 있는데 일손이 모자라고 경운기가 갈 수 없어 몇 년째 묵은 논인데 그곳에 자연적으로 미나리가 나서 미나리 밭이 되었다. 미나라를 캐시던 아버님께서 “야! 이 자연산 미나리를 캐다가 내일 수요일 예배 후 효창교회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말씀하신다. 효창의 식구들을 생각하며 미나리를 캐서 다듬어 박스에 담고, 다음날에는 북강 텃밭의 상추와 쑥갓을 뜯어 박스에 담았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올라가실 때 박스는 몇 개 되었다. 저녁에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야! 그 상추와 쑥갓 아주 인기였다!” 다음날 아침 북상의 텃밭을 둘러보면서 많이 뜯었기에 약간은 썰렁한 느낌이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나눔의 기쁨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제는 오이가 제법 순을 타고 올라갔고 벌써 4개를 따먹었다. 가지도 열려서 자라고 있고, 호박순이 뱀처럼 늘어져 흐뭇하게 해준다. 옥수수는 잘 자라지 않아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고, 고추는 다른 집들보다는 늦지만 그런대로 잘 자라고 있다.

 아주 좁은 공간에 이렇게 다양한 채소가 심겨져 있는 모습을 보고 이제는 이 지방을 떠나간 차진희 목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이 전도사! 북상의 텃밭은 무슨 농작물 실험연구소 같애!” 우리의 텃밭 가꾸기가 동네 아주머니의 누에는 흙장난으로 보이는 것처럼 아주 작은 농사이지만 생명의 신비와 생명을 가꾸는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좁은 밭이지만 제초제를 뿌렸기에 깨끗한 모습과 비만 오면 잡초가 쑥 자란 북상의 텃밭을 비교하면서 말이다. 힘든 농사, 부족한 일손 속에서 제초제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농부들의 절규는 단순히 편리한 농사를 넘어서는 얘기 같다.

 어쨌든 제초제의 유혹을 느끼면서 깨달은 나름대로의 깨달음은 생명을 가꾸는데 있어서 어떻게 가꾸느냐?의 중요성이다.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판도에서 ‘성장’이란 성실함의 선물이라기보다는 필수요, 목표이다. 성장을 위해 아니 성장의 신화를 탄생시키기 위해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적은 투자’, ‘많은 생산물’은 성공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생명에는 질서가 있고 생명의 질소를 무시한 채 힘에 부친 성장의 신화를 낳으려는 인간들에 의해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적으로 신화적이다. 세계 대형교회의 10위안에 한국교회가 그렇게도 많은 것은 짧은 선교 역사상 기적이다. 그 큰 성장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 성장이냐의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가정을 파탄 지경으로 몰아 넣으면서 광신적으로 믿는 교인들에 의해 성장되어진 면이 있다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성장된 것일까? 작년 10월 이땅을 웃겼던 시한부 종말론처럼 왜곡된 복음으로 급성장 되어진 면은 없는지 물어볼 일이다.

 제초제가 농민의 일손을 거든다는 것은 인정하고, 제초제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접도 인정하지만 생명을 죽이고 지구를 죽이는 약임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제초제와 같은 극약적인 처방으로 한국교회는 성장되어진 면이 없는가의 물음이다. 적은 교인, 미자립 교회 담임자로서 성장의 유혹을 받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 성장의 많은 부분이 “예수=천당, 다른 종교와 불신앙=지옥”의 신앙 고백임은 부인할 수 없고 그 논리의 유혹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제초제 같다는 매혹되어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제초제 같은 극약의 논리, 모습은 없는지?

 텃밭을 가꾸면서 두번째 깨달음은 생명의 본질은 자람이기보다는 나눔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정리이다. 북상 텃밭의 채소들이 자람에서 생명의 신기함을 느끼었지만 생명의 기쁨은 가꾼 채소의 생명이 나와 아내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식탁의 자리었고, 참다운 기쁨의 감격은 효창식구들의 생명과 북상채소의 나눔이었다.

 북상의 채소가 효창식구들과 하나되는 나눔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성서 속의 만나를 생각했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배고프다는 백성들의 아우성에 만나를 주시면서 가족들이 먹을 만큼만 가져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어기고 이튿날의 만나까지 가져갔던 점에서 의귀한 일이 발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맛있던 만나가 썩어 구더기로 변하는 것이었다 만나 이야기는 생명의 본질이 자람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것을 성서적으로 증거 해준다. 생명의 분질은 남는 것을 더 자라게 하기 위해 축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나눔에 있다.

 농산물의 생명이 자라는게 목적이 아니라 도시의 인간 생명들과의 나눔에 있고, 노동의 선물로 주어진 돈이라는 생명의 본질은 가족들과의 나눔에 있고, 남는 것은 이웃과, 사회화의 나눔에 있다. 교회도 자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생명들이 정말 예수와 얼마나 사귀고 나누느냐에 본질이 있어야 한다. 나눔을 위해서 성장은 요구되어지나 생명의 핵심은 나눔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의 2대 교수 해월 최시형 선생은 “以天食天“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물고기를 먹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상이 후에 범신론으로 빠져 왜곡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천신천의 본뜻은 생명은 신비한 것이고 생명은 거룩한 것이기에(생명의 창조자는 하느님이므로) 생명을 먹는 것은 신령한 것이다. 이점에서 식사는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신령한 생명을 먹는 거룩한 의식이 된다. 밥 한톨에도 우주의 신비(하느님의 뜻)가 들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모든 생명을 존중되어 진다. 한끼의 식사 속에서 신령함을 먹었다는 깨달음이 있다면 삶에 있어서 게으름과 나태함 그리고 불의한 행동은 음식(생명) 앞에 부끄러움이다.

 농산물이 식사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동물과 사귀는 생명의 나눔에 있듯이 모든 생명의 본질은 나눔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생명의 질서를 정리해 본다. 고마리! 또는 繒山! 시루같이 생겼기에 시루에서 유래된 이작은 마을. 시루가 나눔의 그릇이듯이 우리들이 나눔의 삶을 얼마나 살고 있는지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