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상상력

                            김영무: 서울대 교수

 지난 겨울 캐나다의 토론토 북쪽에 있는 어느 시골 수도원 성당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성당 안의 모습은 여느 성당이나 별 차이가 없었으나. 제단 뒤 양쪽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사진을 보는 순간 깊은 충격 같은 것을 받았다. 그 사진은 막막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둥근 지구를 찍은 것 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창조주를 찬미하고 경배하는 성스러운 성전에 십자가와 함께 걸려있는 푸르른 지구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현대문명의 발전으로 지구가 참혹하게 망가지고 있음에 생각이 미치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만이 아니고 바로 지구 자체구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배타적 인간중심의 사고방식(그나마 인간 전체를 포용하지 못하는 남성우월주의에 불과한)을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굳게 믿고, 발전과 개발과 진보라는 신화를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하여 현대적인 대기업을 발전시킴으로서 그런 현대적 기업의 수혜자이자 피해자가 된 우리들 즉 병든 영혼들이 지구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창조주께서 아름답게 지어내신 우주에 뜬 그토록 어여쁜 지구가 지금 어떤 몸살을 앓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대개는 어렴풋이 나마 짐작은 한다. 오존층이 심각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그래서 세계 곳곳의 기후도 전과 같지 않고, 아마존강 유역의 밀림을 비롯해서 지구의 산소공급의 원천인 숲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어가고 있고, 자동차의 배기가스, 공장폐수, 가정의 오물, 합성세제, 농약, 몇 백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 온갖 플라스틱 등 인간이 만들어내는 숱한 쓰레기로 공기와 물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 유조선이 좌초하여 흘러나온 기름으로 바다의 온갖 생물이 죽어 가는 이야기 등등 특별히 환경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들 탓에 지구가 얼마나 파괴되고 시달리고 있는지 조금만 생각하면 짐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또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지구파괴를 서슴지 않고 있거니와, 이런 환경의 훼손은 환경자체의 훼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 자체의 파괴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인간들이 인간 아닌 모든 다른 생명체가 모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란 착각을 하는 데서 생겨난 것인 듯하다. 숲의 나무는 오직 인간에게 버려지기 위해서 자라나고, 들판의 꽃은 마땅히 인간에게 꺾이려고 거기 피어있고, 바다의 물고기는 인간에게 잡혀 먹히려고 있는 것 인양 우리는 생각하기 일쑤이다. 과연 지구상의 가장 고등생물인 인간은 지구 생물의 꽃이었고 축복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은 지구의 재앙이 되고 있다. 이것은 가부장적 원리를 바탕으로 이룩된 인간문명의 필연적 결과이다.

 요즈음 들어서 인간이 창조질서의 축복이요 꽃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인식이 뒤늦게 마나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식의 깊이를 반영하는 것이 1992년 6월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열인 <지구정상회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장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지구 온실 효과 문제를 비롯해서 생물다양성 보존문제 등 환경 공해에 관련된 광범위한 문제를 논의한 이 지구정상회담에는 전 지구의 160개국에서 3만여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대통령, 수상등 국가 원수들만도 1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린피스(Green Peace), 지구 감시(Earth Water) 들의 운동의 앞날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이런 움직임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사실, 얼마 전 미국의 부통령으로 취임한 고어 같은 사람이 이런 환경보호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 등은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의 정도가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지구가 인간들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물과 더불어 지구공동체, 삼라만상공동체를 이룩하도록 창조되었음을 까맣게 망각하게 된 원인등에는 잘못 이해된 기독교신앙의 책임도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교회가 배타적인 남성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닌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어떻게 생산해내고 유지시켜왔는지는 달리 길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뒤 번식하며 삼라만상을 다르리라고 말씀하셨더니, 이 말씀을 삼라만상 위에 인간이 임금으로 군림하여 마구 부려도 좋다는 것쯤으로 잘못 알아들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하늘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고 했더니, 하늘나라 하늘나라 하는 말에만 매달려 인간은 마치 지구의 존재이기에는 너무 고귀한 존재인 양, 턱없이 지구를 깔보고 마치 인간이 지구를 떠나서 어디 다른 곳에서 다만 한 시간이라도 살 수 있는 양 착각하게 만든 책임을 전적으로 면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유대민족의 선민사상이라는 집단 이기주의적 소망의 산물이 유대교이고, 유대교라는 부족신앙이 기독교신앙으로 진화 발전하면서 드러내는 보편성은 우주공동체, 지구공동체, 삼라만상이었는데 서양의 역사에서 이것이 배타적 인간 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 사상과 맞물리면서, 인간의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신앙으로 왜곡되었고, 더 나아가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묘하게도 자본주의의 성립 및 발전과 이어지면서 기독교 전통은 더욱 인간이기주의를 부채질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주공간에 떠있는 수 많은 별들 중에서 지구처럼 그 균형이 완벽하여 삼라만상이 어여쁜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어떤 다른 별이 있는지 현재로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지구는 우주의 영광이요 축복이다. 그리고 그 지구의 생명체중에서 인간처럼 탁월한 능력을 갖춘 생물은 없기에 인간은 또한 지구의 영광이요 축복이다. 그런데 그 인간이 지구의 재앙이 되었다는 것은 지적한 대로이다. 그렇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우리들의 꿈이 무엇인가? 흑인 백인 황인종 차별 없이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그 자격 하나만으로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살림터의 건설, 그것이 인류의 꿈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꿈은 지금까지의 인류 문명의 전개가 똑똑히 보여준 바와 같이 배타적 인간중심수의, 그것도 인간의 반쪽은 가리고 다른 반쪽은 멸시하는 남성중심주의로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이런 꿈은 나무와 풀과 물고기와 산짐승과 하늘의 새와 온갖 벌레와 바위와 물과 흙 등 세상만물과 인간이 한 형제가 되어 더불어 이루는 생명공동체 또는 지구만물공동체라는 보다 넓고 큰 전망을 바탕으로 출발할 때에만 비로소 그 실현 가능성이 보이는 것일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우리들은 대개 그럴듯한 바 없지 않은 생각인데 그런 거창한 꿈은 그냥 꿈 일뿐,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이라고 코 웃움쳐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탁상공론을 우습게 여기도록 세뇌교육을 받아와서 모든 종류의 탁상공론을 서슴없이 배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차분한 마음으로 따져보면 사태가 그런 것만도 아니다. 불과 몇 백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인간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탁상공론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다. 임금은 태어날 때부터 왕가의 자식이고 양반은 또 태어날 때부터 현관에 흐르는 피가 고상한 양반의 피이고, 머슴은 평생 머슴으로 지내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누군가가 인간이 평등하게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인간공동체의 이상을 들고 나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미친놈의 잠꼬대 취급을 받았을 것이며,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날 때부터 상놈과 양반의 구별이 있다는 생각이 넋 나간 얼간이의 망상으로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지구는 도마처럼 납작하다고 생각했고, 지구가 해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동설을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여기고 천동설이 진리라고 믿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이다. 참뜻에서의 인간공동체의 실현은 오직 지구 만물공동체라는 넓고 깊은 비전을 가지고 온갖 세상사를 이해하고 실천할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도 천동설 지동설의 경우와 같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누누이 강조한 대로 가부장제의 원리에 입각한 근대적 합리주의 전통이 만들어 우리에게 덮어씌운 사고방식이고, 이것은 인간의 배타적 이기주의 남성우월주의를 그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삼고 있다. 이런 인식과 사고의 틀은 자연스럽게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 문명과 자연, 인간과 다른 하등만물을 차별적으로 구분하여 전자를 찬미하고 후자를 업신여기게 된다. 우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사는 한 지구 파괴, 환경파괴,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구의 멸망과 온갖 생명의 멸종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이룩해야 할 세상이 인간끼리만 화목하게 지내는 인간공동체가 아니라 지구만물공동체 혹은 삼라만상공동체라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에서도 사실 그렇게 황당무계한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이해된 기독교의 본질이다. 가장 비근한 보기로, 성서에서 예수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스스로 걱정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여 살리시지 않느냐, 하물며 인간인 너희들을 설마 하느님께서 먹여 살리시지 않겠느냐고 말할 때, 또 솔로몬이 수천 수만의 노예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쌓아올린 그 영화로운 궁전과 그가 입은 값비싼 옷과 온갖 영화가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를 당하지 못한다고도 얘기할 때, 우리 인간이 어린이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칠 때, 이런 말씀들이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 인종주의, 남녀차별주의와는 정녕 남남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우리는 철옹성같던 소련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이 내걸었던 것은 공산주의 공동체의 건설이었다. 남들은 공산주의 국가하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공산주의 사회하면 수많은 공장의 굴뚝들이 떠오르고 그 공장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어딘지 자연과는 거리가 먼 건설 건설 건설하는 구호가 난무하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들은 자본주의 국가하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자본주의 사회하면 역시 어딘지 자연과는 거리가 먼 별별 기기묘묘한 상품이 와글거리는 백화점이나 슈퍼마켓과 소비자로 변한 인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듯 불구재천의 원수로 전혀 다른 것 같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배타적인 인간중심사상을 그 핵심적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인간의 안락과 편안과 복지라는 옹색한 지평에 갇혀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이라는 이름의 파괴활동 또는 배타적 인간중심의 경제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소외시키고 파괴하고 인간 아닌 다른 만물을 망가뜨리고 박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생명체들의 멸종과 더불어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쓰레기더미로 변하여 궁극적으로 인간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인류가 그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민주주의-문명과 야만,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이 역동적으로 창조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이룩하는 인간공동체 즉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은, 앞에서 비친 대로 배타적 인간중심주의 그 가운데서도 남성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기계적 합리주의로는 결코 불가능하거니와, 삼라만상이 화해하여 공존하는 지구만물공동체, 삼라만상공동체를 궁극적 전망으로 갖고서 나아갈 때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소비만능의 상업주의적 자본주의와 생태 파괴적 공산주의 전개과정이 보여주고 있듯이 가부장적 인간 중심주의의 필연적이 결과는 인종차별, 남녀의 성차별, 계급투쟁, 지구파괴, 생명 파괴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병적인 사고 방식이지 참뜻에서의 과학적 사고방식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 내면의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인간의 이런 창조질서 왜곡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삼라만상이 창조적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며 이룩하는 우주 만물공동체에의 꿈으로 인간을 이렇게 은밀히 그러나 불가피하게 부르는 것, 이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적 운명과도 같은 것이, 만물의 꽃인 인간이 창조주에게서 받은 신비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은총의 선물이 다름아닌 녹색 상상력이요, 생태학적 상상력이고, 이것은 모든 참다운 과학적 바탕으로 작용하며 또한 우리가 시에서 늘 만나는 원초적 충동이기도 하다.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길을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신진 시인 박형진의 <사랑>이라는 이 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투명한 작품이다. 시속의 화자인 나는 어느날 가다가 자신의 옷에 날아와 앉은 풀여치 한 마리를 보고 모든 생명의 제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게 되는 것이 이시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길을 가는데 옷자락에 벌레가 날아와 앉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아마 대개는 공연히 소름이 끼치고 오싹해서 얼른 털어 버릴 것이다. 손으로 건드리는 것도 어딘지 켕겨서 막대기 같은 것으로 쳐버리기 심상이다. 이 시속의 화자인 나도 아마 처음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 비슷한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파란 날개의 숨결을 느끼”게 되면서, 불현듯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풀여치는 흔히 풀잎에서 산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내게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풀잎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네. 이 녀석이 나를 풀잎으로 철석같이 믿지않고 자기를 해칠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녀석은 온전한 풀벌레가 못되고 공포에 떠는 혹은 독이 오른 적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이런 구절이 생겨난 것이리라. 또한 “하늘은 맑고 /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속”에서 나는 이렇게 나를 잊고 풀잎이 되어 풀잎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다 보니까, 어느새 풀잎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또 물이 되어 지줄지줄 흐르기도 하고, 다시 저기 뛰노는 아이들이 되기도 하는 등, 이 세상 만물속에 내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게 된다. “모든 살아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라고 말하게 된다.

 옷깃에 날아와 앉은 한 마리 풀벌레에 질겁하는 자세, 벌레는 자연의 보잘 것 없는 미물이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여버린들 어떠냐는 아주 심상한 태도, 흑인을 벌레 비슷한 흉물로 생각하는 발상법, 여자란 눈물이 많고 본능적으로 비이성적인 이등인간이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이성적이고 용감한 남성이 도맡아야 한다는 일그러진 생각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들로, 이것은 참 인가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며, 참 뜻에서의 과학적 사고방식도 아니다.

 우리는 풀여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겼는지 날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풀여치가 볼 때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가? 아마 풀여치하고도 함께 길을 걸어가는 지구만물공동체, 삼라만상공동체를 만드는데 만물의 영장이요 꽃으로서의 그 뛰어난 능력을 쓰도록 불림을 받은 존재가 인간이 아니겠는가. 이런 깨달음 위에서 신비로운 은총의 신물인 생태학적 상상력이 이끄는 길을 따라 삶을 살아갈 때에만 우리 인간은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니라 축복을 안겨주는 참 인간으로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