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김용성 :큰배움교회 전도사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창 2:18)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러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암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더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 2:21-25)

 오늘의 본문은 혼인예식에 많이 읽혀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 본문은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요한 기둥으로서 칼 바르트와 같은 개신교 신학자는 그의 창조론 속에서 이 구절이야말로 신약과 구약을 잇는 핵심적인 것으로 강조한 바 있습니다. 대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쓰여진 성어를 舊約이라 칭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쓰여진 성서를 新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新’이 뜻하는 것은 契約 또는 新束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과 인간간의 관계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문제로 밝혀준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 ‘계약’, 곧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면서 현 상황을 이러한 성서적인 입장에서 밝혀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는 사상적으로 엄청난 혼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데카르타가 ‘cogito, ergo sum’을 선언한 이후에 서구 사상계의 주류는 ‘rescogitans’, 즉 ‘나는 존재한다’ 였습니다. ‘res-cogitans’는 주체와 객체를 끝없이 구분하면서 모든 인식의 기초를 사유하는 주체에 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흐름은 철학과 신학은 물론이고 모든 제반 학문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쳤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존재의 중심에 가져 다 놓으면서 인간 개인의 주체를 강조하는 독아론적인 세계관은 급기야 ‘신의 죽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쳐댔던 저 주체성의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사상계를 주름잡아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죽음’이전에 ‘하나님의 죽음’을 목소리 높여 주장했던 인간들 자신의 죽음을 현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이래 근대의 이분법적 가치관과 더불어 오늘날 인류 모두를 위협하는 절적인 자연파괴, 기계화 기술의 노예로 떨어지는 인간성 죽음의 현상을 우리는 눈앞에서 목격합니다. ‘사유하는 개인의 주체’를 믿었던 사람들은 인간 서로 간에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고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인간 개인으로서 실존으로서 살아가려고 할 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귀중한 성서적 교훈을 경시했던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지 인간과 자연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인간이 결국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eke지 못했고, 결국 역으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착취에 대한 보상을 지불해 주어야 할 위기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유태계 철학자 마틴 부버는 그의 주저 (나와 너) 속에서 ‘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나-너’에 있어서의 ‘나’일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너’의 관계적 사건이 비단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과의 사이에서도, 그리고 사람과 정신적 실채와의 사이에서도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이념인 上永善提 下化衆生은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화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깨달음을 구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제도화하겠다는 이분법적 수직개념이 아니라 괴로움의 바다를 허우적거리며 헤쳐나가고 있는 같은 시대의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깨우치고 더불어 함께 힘을 합쳐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의 뿌리를 뽑아냄으로써 마침내 이 세상을 사람의 땅과 자유의 나라로 만들자는 좌우의 수평적 관계개념 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별개의 것 내지는 先後의 사안이 아니라 동시적인 관계의 뜻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와 너’됨의 하나님과 인간관계, ‘나와 너’됨의 인간간의 관계가 성서의 중심사상입니다. 이 관계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불신앙이며 예수의 말씀대로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의 반대어는 증오 또는 미움이 아니라 서로 무관하다는 마음, 곧 무관심입니다. 기독교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첫째 사탄은 무관심의 사탄입니다. 이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을 우리는 곳곳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때론 철학의 옷을 입고, 때론 신학의 옷을 입고, 때론 그럴듯한 교양으로 장식한 채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너는 너 자신이 다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여라! 너는 너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삶의 주인이며, 실존이며, 홀로 있는 주체로서 사는 용기를 키워라! 너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 별개의 문제이며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믿어도 된다.!’고 속삭이면서…….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관계적인 존재로 설명해 왔습니다. 기독교 대표적 교리인 삼위일체론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 세상에서 다스리십니다. 성부이신 야훼 하나님은 관계를 맺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구약은 이를 계약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너로서, 신랑과 신부로서 인간과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오늘의 구약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동반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이 잠자는 중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와를 본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을 했으며 남자와 여자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몸이 되는 이 신비로운 기쁨을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결혼계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사도 바울도 에베소거 5:31-32절에서 “남자가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은 깨어지게 됩니다. 성서는 이를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게 됩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던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으나 타락한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로마서는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으며…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단언합니다. 아담으로 인해 죄된 본성을 지니고있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웟은 “그들은 모두 진리와 정결에서 떠나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예언가 이사야는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맞은 흔적 뿐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이 파기되고 철저하게 타락한 인간본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에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영원히 깨어진 듯 여겨졌던 이 계약을 다시 세우기 위해 주님께서는 친히 타락한 인간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 분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성자이신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든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인간과 인간간의 담을 허물기 위해 스스로 허물어져 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부인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더불어 존재함을 부정하고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고독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병든 영혼을 치유해 주시는 위대한 의사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삶을 몸소 보이신 우리의 스승이며 모범이십니다. 당시에 ‘나와 그것’(부버)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무시되어 인간의 기본적 존엄조차도 보호받지 못했던 사람들-창녀, 세리, 고아, 뱃사람 등-과 더불어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시키겼던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형상이 상징하듯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수직),’이웃을 사랑하는’(수평) 행위를 상관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교만했던 자아(홀로 존재함)가 변하여 겸손한 비움과 배움(더불어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했던 상하수직적인 이분법의 신앙이 ‘너’가 있음으로 ‘나’가 존재하는 좌우수평적 삶이 장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파기되었던 계약의 갱신이며 약속의 성취입니다.

 구약본문의 말씀대로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함께 더불어 살라고 동반자이자 이웃인 하와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관계의 하나님이며 계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계시는 주님으로서 화해와 평화가 완성되는 나라를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은 큰배움교회를 귀중히 여셔야 할 것입니다. 적은 교우들로 구성된 공동체이기에 우리는 이와 같은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들이 적나라하게 만날지라도, 서로의 부족함과 결점들을 쉽게 발견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부끄러워 아니하며 그것들조차 용납하면서 이해하면서 아름다운 한 몸을 이루게 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제 겨울의 문턱을 넘어 12월 첫 주에 드리는 예배에,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는 이 달에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탈함이 찾아오기도 하고 자못 들뜨기 쉬운 것이 우리들의 정서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사건을 통하여 하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용히 묵상하는 12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