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味에서 보낸 편지

도시인들에 대한 농촌사람의 꾸지람

                            김순현: 오미교회 전도사

오늘은 낮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한밤중인 지금까지도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달 하나, 별 하나 뜨지 않는 칠흙 같은 밤입니다. 빗소리만이 적막을 가르고 있습니다. 잠시 깊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개구리와 맹꽁이의 흐느낌 섞인 울음뿐입니다. 평상시에는 이곳 오미의 한밤을 내내 떠들썩한 노래로 가득 채우던 개구리들이 오늘 밤은 왠지 몇 마리 밖에 울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아득한 전설을 따라서 어디론가 묻혀있을 더미의 무덤을 찾아달라 외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해 봅니다. 마치 전설과 현실이 어우러져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거대한 무대 한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사방을 감싸 안고 짙푸른 산들만큼이나 높푸르던 하늘이 봄비를 예고하는 하늘이 봄비를 예고하는 먹장구름으로 뒤덮이던 오늘 낮에, 마침 단양에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일년 후배요, 대학교 일년 후배인 전도사님이셨습니다. 그 분도 어지간히 적막한 산골에서, 그것도 교통편 하나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시골에서 그곳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영혼들을 위해 목회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과 저는 오늘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야기들을 나누던 중 일치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좀 부정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줄여 말하면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이 봄이라서 그런지 산골을 찾는 도회지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습니다. 산나물을 뜯어가기 위해서라나요. 텔레비전에서 산나물은 무공해 식품이고 농약이 쳐지지 않은 것이라 당뇨와 고혈압에 효과가 좋다고 방영되자 마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처럼 시골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분명 문명인처럼 보였습니다. 각종 승용차를 대동하고, 길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면서, 이 산 저 산을 이잡듯이 뒤지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이 신성한 자연 속에 들어와서도 도회지 사람들의 흉내-야만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흉내- 를 잊지도 않고 그대로 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손이 부족해서 야단인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낫과 나물주머니를 들고서, 마치노다지를 캐듯, 산들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좀 키가 크다싶은 두릅나무는 낫으로 찍어 두릅을 떼어갑니다. 이제 싹이 터서 아직 먹을 만큼 자라지 않은 것도 모조리 뜯어 갑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마을 주민들이 논과 밭으로 일하러 나가고 없는 텅 빈집에 들어와 운동화를 가져가기도 하고 아예 돌려주기는커녕 산 속에 그대로 방치해 버립니다. 그들은 이곳에 올 때 폼을 내면서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자가용을 몰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만 일어났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남의 울타리조차 구분할 줄 모르고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약초를 재배하는 밭으로 들어가서 그 약초를 몇 뿌리씩 캐가기도 한다나요. 도시 사람들이 보기에 시골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이 넓은 사람처럼 보이는가 봅니다. 그러니 ‘실례합니다’라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무례한 짓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라며, 모처럼 시골에 왔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무지 남의 기분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 사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경치가 아름답네요’라고 말 한 마디라도 해주었더라며, 시골 사람들의 상했던 기분이 그런대로 회복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야유, 이렇게 교통도 나쁘고, 산세도 험한 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맥빠지게 하는 말입니다. 고향 산천을 지키면서, 가장 정적한 마음과 모습으로 땅을 일구는 우리네 시골 사람들, 그러면서도 일한만큼의 대가를 전혀 챙기지 못하는 그런분들에게 이와 같은 말은 지옥을 만들어주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나 봅니다. 그래서 요즘 이곳 시골 사람들은 약은 꾀를 생각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만이 이 아름다운 마음과 산천을 지키는 길이라 믿고 그 꾀를 실행해 옮기고 있습니다. 그 중 일례를 들면 도회지 사람들이 들어와 나무 많이 나는 곳을 물으면, 일부러 나물없는 곳을 지목하여 그들로 하여금 헛수고를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지요?”

 너무 부정적인 말만 앞세운 것 같습니다. 이곳 시골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비록 몇 안되지만 이곳 사람들의 바쁜 일손을 도와 힘겨운 일을 잠시라도 덜어주고 가는 이들도 있답니다. 단 한 사람의 손도 귀하고 아쉬운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런 분들의 도움이 이 세상 어떤 도움보다 크고 고맙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런 분들이 돌아 갈 때는 뒷 텃밭에 심어 몇 년동안 잘 가꾸어 놓은 더덕 몇 뿌리가 손에 쥐어지기도 한답니다. 이런 것이 이곳 사람들의 인사방식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운답니다. 질서를 세운답시고 쓸모 없는 쓰레기만을 양산해내는 도시에서 배우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배움이랍니다. 사택 앞 정원에 심겨진 더덕을 보면서 협력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들은 홀로는 제대로 서지 못하기에 둘 이상이 서로의 몸을 휘감아 위로 치솟습니다. 서로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고 비비꼬아 모아리(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들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워 보입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미의 밤 하늘을 수놓아 흐르는 은하수- 세상에 이렇게 많은 별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별을 보면서 문득 두려움과 아울러 경외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새롭고 점증하는 감탄과 외경으로 채워주는 것이 둘이 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우리 속에 있는 도덕률이 그것이다.”(신천이성비판에서)라는 칸트의 저 유명한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서 저절로 피어오르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과 경외였습니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두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 올 듯한 그 많은 별들은 분명 우리의 탐구의 대상이 아닌 주체요, 또 다른 주체인 나와 마주서고 나에게 다가오는 주체였습니다. 주체라는 말이 너무 딱딱하다면 당신이라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훈훈해지며, 따뜻해지는 당신이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오미의 저수지 수면위로 떨어지는 별빛들, 그리고 이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교감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신록으로 뒤덮인 자연을 보면서 그 후덕함을 배우게 됩니다. 같은 하늘 아래 그 어딘가에서는 자연과 인체에 유해한 독소들을 쏟아 붓고 있는데도, 그저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그 독성을 해독하러 부지런히 옷을 입고 엽록소와 산소를 만들어 내는 자연, 그는 분명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말로만 배우던 배움이라는 것들이 가르침으로 변해 피부 깊숙히 뚫고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굳이 가르치겠다고 야단을 떨지 않으면서도, 말없는 실천으로 가르침을 주는 자연, 그 앞에서 저는 정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언어 이전의 감탄이 피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에게서 신성함을 벗겨버리고, 맨 정신으로 보기에도 섬뜩한 쇳덩이들을 들이대어 자연을 침탈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저로서는 그저 부끄러움만 앞설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내려온 뒤로 늘 눈물만을 흘리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도 눈물을 흘리고, 기도시간에도 눈물을 흘리고, 설교 시간에도 눈물을 흘리고, 성도들의 기도에 눈물을 흘리고, 설교시간에도 눈물을 흘리고, 성도들의 기도에도 눈물을 흘리고,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뭐가 그리 슬프냐구요? 슬픈 것이 아니랍니다.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해서랍니다. 배움을 향해 앞으로 치닫기만 하고, 남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힘을 소모했던 저에게, 인적 드문 곳에서 저를 돌아보게 하시고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눈물을 흘린답니다. 눈물에는 묘한 자기정화의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만 나의 마음이 맑아져 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소모된 인생의 한章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내면과 씨름하고, 氣運을 재충전하여 보다 큰 인생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앞세우게 되는 촉촉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