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살림의 길로… 김규수: 전도사 "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친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른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 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어서 잡던 희생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문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 17:3-7)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 시대에는 그 집안의 가장이 곧 그 집안의 제사장이었으므로 가장이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제단을 쌓고 짐승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 이방 민족들의 이방 종교와 접하면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자유로운 제사 제도는 극심한 우상 숭배의 문제를 이르렀습니다. 결국, 본문의 규례는 제사제도의 단호한 규정으로써 문란한 우상 숭배를 근절하고, 야훼 신앙의 연대감을 강화하고, 모든 생명의 중요성을 인지시켜 함부로 짐승을 살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이외에도 여러 곳(1:5, 3:7,8,13, 4:4,15,24,29 등)에서 짐승을 잡을 때에는 반드시 야훼 앞에서 잡아야 한다고 레위기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미물라 할지라도 그 생명은 고귀한 것이니 야훼가 보시는 앞에서 야훼의 허락 하에 그 생명을 취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 사회에는 생명 경시사상이 극심하게 팽배해 있습니다. 그저 장난삼아 아파트 옥상에서 병아리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병아리의 죽음을 즐기는 오늘의 우리 어린이들. 대부분의 전자오락기기가 서로 죽이며 파괴하는 프로그램이고, 대다수의 영상매체 또한 폭력, 살인, 마약, 섹스를 다루고 있어, 이렇게 정서적으로 불완전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생명의 존엄을 그의 사상의 기본 원리로 삼았습니다. 예수도, “만일 온 천하를 다 얻더라도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마 16:26)”고 했고, 실존 철학자 키엘케골도 같은 의미의 말로 “만일 온 천하를 잃더라도 생명을 온전히 보전한다면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라고 갈파했습니다. 목숨이 있고 나서 비로소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목숨과 바꿀 것은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목숨이 중요하듯이 다른 이의 생명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존귀한 것처럼 다른 생물들의 생명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의 기독교는, 흑인들은 환전치 못한 인간이라고 해석, 판단하였습니다. 결국 아프리카를 침략해서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짐승처럼 올무를 채워 온갖 학대와 멸시를 퍼부으며 노예로 삼기 위해 고국으로 끌로 갔습니다. 이때,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목하고 배 위에서 죽어간 수많은 흑인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바다 속으로 집어 던졌던 더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기독교 역시,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라는 신학적 판단을 내리고는 마음대로 파괴하고 훼손하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을 치닫고 말았습니다. 이런 아전인수격의 이기적인 신학 해석에 의해 수 많은 흑인들이 짐승처럼 죽어갔고 수 많은 생물들이 멸종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대의 기독교 또한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침몰해 가는 생태계와 죽어가는 소외 계층을 돌아보지 않는 잘못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도 이 지구촌에선 하루에도 약 1,500명 가량이 기아에 허덕이다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미국을 비롯한 기독 선진국에서는 뇌졸중, 암 등 한마디로 영향과다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 입니다. 먹을게 없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형제들을 바다 건너 두고는, 살찌지 않는 다이어트 음식을 만들기 위해 기하학적인 돈을 개발비로 쓰고 있는 현대의 기독인들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까? 고픈 배를 움켜 줜채 울다 지쳐 서서히 꺼져가는 아프리카의 수 많은 어린 생명들로 인해 마음 아파 눈물 흘리고 계실 하나님께, 현대의 기독인들은 기름진 배를 끌어안으며 건강하게 해 달라고 복 내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쓴 우리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갖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저주를 받은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43)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것은 인간이 이성의 주체요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밝은 이성과 착한 양심으로 끊임없이 선량해지려고 애쓰는 도덕적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인격은 존엄한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악해지고 타락만 한다면 그 생명에 무슨 존엄성이 있겠습니까? 선한 의지가 우리 인격에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반복되는 거짓, 위선, 배신으로 일관된 우리 인간들의 그 더러운 삶조차 불쌍히 여겨 멸하시기를 더디하시고 꺼려하셨던 하나님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나의 목숨이 소중하듯이 내 이웃의 생명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존귀한 것처럼 다른 생물들의 생명 또한 귀중한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를 사하시는 방법으로 흠 없고 순전한 짐승의 생명을 취하게 하셨던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귀한 생명을 잃는 생명체를 보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범죄하는 것은 곧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생명을 죽이는 죄악의 길을 떠나 서로 살리며 서로 생명을 더해 주는 살림의 길로 힘차게 정진해야 하겠습니다. |